결핍 혹은 새로운 세계의 구축


<화성의 인류학자>는 뇌신경과 의사인 올리버 색스가 임상경험을 바탕으로 쓴 사례모음이다. 이 책에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이유로 뇌신경학적 질병에 걸린 환자 7명이 등장한다. 나는 우연히 동네 헌책방에서 이 책을 접했고 소제목을 읽는 순간 책 속에 푹 빠졌다. 몇몇 제목은 다음과 같다. 색맹이 된 화가, 투렛증후군 외과의사, 자폐증을 가진 천재 소년, 화성의 인류학자. 

마음에 담아 두고 싶은 구절들이 너무 많아서 이 곳 저 곳에 밑줄을 긋고 귀퉁이를 접었더니 책이 너덜너덜해지고 말았다. 평소 책읽기 습관과 거리가 먼 방식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를 테면 다음과 같은 구절들 말이다. 


환자에게 어떤 병에 걸렸느냐고 묻기보다는 병에게 어떤 사람을 덮쳤느냐고 물어야 한다. 


의학계의 전통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일종의 ‘사례’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나름의 세계관을 구축한 독특한 인간이기도 하다.


때로는 딱딱하게 정립된 ‘기준’이 아니라 변화된 상황과 욕구에 따라 새로운 조직과 질서를 탄생시키는 유기체의 능력이라는 관점에서 ‘건강’과 ‘질병’의 개념 자체를 재정립해야 하지 않을까 싶을 만큼 감동을 받은 적도 있었다.


뇌신경학에 있어 역사적으로 축적된 다양한 이론, 가설, 실험, 오류에 대한 이야기는 물론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까지 쉼 없이 이야기가 꼬리를 물며 계속된다. 그런데 흐름이 깨지거나 산만해지지 않는다. 수십 년을 한 분야에 전념한 전문가답게 관련 지식이 풍부한 이유도 있지만 병과 환자를 대하는 태도가 중심을 명확히 잡아주기 때문이다.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책이었다거나 또는 그 반대로 감정이 과잉되어 있는 병상일기 같은 글이었다면 굳이 이 책을 소재로 글을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탐구를 멈추지 않는 이 뇌신경학자에게서 받은 감동의 핵심은 병을 대하는 고유한 태도에 있다. 저자가 언급한 환자들은 대부분 원인을 명확히 알 수 없는 뇌신경질환을 앓고 있다. 가벼운 틱장애에서부터 심각한 뇌손상까지 그 정도가 매우 다양하다. 어떤 환자는 색을 잃어버려 세상이 온통 흑백으로만 보이고 어떤 환자는 아무 이유 없이 항상 자신이 행복하다고 느낀다. 세상은 그들에게서 어떤 결핍을 본다. 환자들은 대단히 비정상적이다. 그런데 저자는 그들에게서 새로운 세계가 구축되는 과정을 본다. 


점자를 읽을 때 계속 한 손가락만 쓰면 대뇌피질에서 해당 손가락이 차지하는 부분이 상당히 비대해진다. 그리고 어렸을 때부터 청력을 잃어 수화를 쓰게 되면 청각피질이 시각 정보 처리에 동원되는 등 대뇌의 구조가 대폭 달라진다. 


하지만 그로 인해 스티븐이 작아지거나 재능이 하찮아지는 것은 아니다. 역설적이지만 한계는 장점으로 작용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스티븐은 세계를 아무 편견 없이 똑바로 바라볼 줄 아는 소중한 눈을 가지고 있다. 그는 편협하고 특이하며 독특한 자폐증 환자다. 하지만 그 덕분에 대부분의 사람들과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표현하고 관찰할 수 있다. 


자연의 풍요로움은 건강과 질병의 측면, 인간과 인간이 만든 조직들이 인생의 도전과 변화를 맞닥뜨렸을 때 어떤 식으로 끊임없이 적응하고 스스로 재건하는지의 측면에서 연구해야 하는 대상이다. 이런 관점에서 결함, 장애, 질병은 역설적인 역할을 한다. 평상시에는 보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상상조차 못했던 잠재적인 능력, 성장, 진화, 삶의 형태가 이로 인해 발현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책의 주제는 질병의 역설적인 측면과 숨겨져 있는 ‘창의력’이다.


저자는 이전 지식이 축적되어 온 과학적 방법을 충분히 존중하면서도 새로운 관점에 입각한 시도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호스피스와 의사와 학자로서 필요한 태도를 모두 가지고 있다. 무엇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을까? 그가 휴머니스트이기 때문이 아니다. 또 다른 세계의 구축이라는 완전히 새로운 관점으로 질병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환자는 무언가 결핍된 존재이기 이전에 새로운 세계를 구축해가는 개척자다.(환자라는 표현 말고 다른 표현을 쓰고 싶지만 더 적절한 표현이 떠오르질 않는다.) 그의 몸은 새로운 세계관을 구현하는 지도다. 지도 위에는 끊임없이 새로운 지형이 그려진다. 


삶이 깨어나는 시간


흥미로웠다. 과학적인 태도를 가진 덕분에 가장 인간적인 면모를 지닐 수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관련 정보를 뒤지던 중 저자가 쓴 또 다른 책 <소생(awakenings)>이 영화로 만들어졌고 1991년에 <사랑의 기적>이란 제목으로 국내 개봉도 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영화는 로빈 윌리엄스(말콤 세이어)가 새로운 직장을 찾으면서 시작된다. 연구를 목적으로 원인불명의 뇌신경질환 환자들이 머무르는 요양병원에 취직한다. 그는 의사가 아니라 의학자로 근무하고 싶어하지만 의사가 모자란 병원에서는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세이어 박사를 곧바로 진료에 투입한다. 

병원의 일상은 정지되어 있다. 환자들은 이해 불가능한 특이한 행동을 반복하거나 혹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병원 풍경은 정물화에 가깝다. 병원 밖에서는 계절이 흐르지만 안에서는 시간의 흐름이 느껴지질 않는다. 의료진은 무언가 개선되리라는 생각이 없다. 그저 때 맞춰 밥을 주고 환자를 재우며 관리할 뿐이다.  

외부 자극에 전혀 변화가 없던 환자들이 특정한 자극에만 반응한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아내게 되면서 변화가 시작된다. 떨어지는 물체에만 반응하는 사람, 선이 그어진 바닥에서만 걸음을 옮기는 사람, 특정한 장르의 음악에만 몸을 움직이는 사람 등등. 세이어는 그들을 자극할 수 있는 온갖 실험을 시도한다. 사람들이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하면서 병원도 활기를 찾는다. 관조하던 의료진도 차츰 변화에 동참하기 시작하다. 사람들은 정물화의 캔버스를 찢고 나와 변화무쌍한 장면들을 연출한다. 여기에서 결정적 국면 전환이 시작된다. 

파킨슨병을 치료하는 엘-도파(L-DOPA)라는 신약이 개발되자 세이어는 병원과 환자 가족을 설득해 환자들에게 임상실험을 시작한다. 이 실험의 중심에 레너드(로버트 드 니로)가 있다. 레너드는 어릴 때 원인 모를 마비가 시작되었다. 손가락부터 시작된 마비는 이내 온 몸으로 퍼졌고 혼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얼굴에는 표정이 사라졌고 시선은 정지했으며 말은 주인을 잃었다. 그런 레너드에게 투약이 시작되었다. 가족 동의서를 구하러 간 세이어에게 레너드 엄마가 묻는다. "레너드가 파킨슨병도 아닌데 이 약으로 뭘 할 수 있죠?" 세이어가 대답한다. "전혀 다른 병을 위해 만들어진 약이어서 확신할 수가 없습니다." 다시 묻는다. "그럼 뭘 원하시는데요?" 다시 대답한다. "그를 다시 데려오기를 원합니다. 이 세상으로요." 슬픈 얼굴이 묻는다. "이렇게 세월이 흘렀는데 이곳이든 그곳이든 어떤 차이가 있죠?" 애정어린 얼굴이 답한다. "당신이 여기 있잖아요." 

레너드는 30년 만에 기적적으로 되돌아왔다. 여전히 그의 시간은 유년에 머물렀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레너드는 빠르게 적응했다. 모두가 기뻐했다. 레너드는 어릴 적 친구들과 놀던 동네를 다시 찾아갔고 처음 보는 사람에게 사랑을 느끼기도 했다. 제목(awakenings) 그대로 레너드는 긴 잠에서 깨어났다. 여기저기서 투자가 쇄도했고 투약은 전 환자에게 확대되었다. 그리고 기적의 밤, 환자들은 스스로 침대에서 일어나 걷고, 말하고, 춤을 추었다. 병원은 지난 시간을 회상하는 환자들의 활기로 유래없이 소란스러웠다. 환자들은 자유로운 출입을 요구하며 집단 행동을 벌이기도 했다. 밀폐된 사회는 급격히 새로운 양상으로 조직되었고 그 중심에 레너드가 있었다. 세이어의 실험은 성공하는 듯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레너드에게서 발작적인 마비증세가 다시 시작되었다. 원인을 알 수 없었다.레너드는 집단적인 저항을 주도하다가 이내 세이어에게 자신을 꼭 고쳐달라며 울부짖는 처지가 되었다. 그의 몸은 다시 자신의 통제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고통스런 온갖 번뇌가 몸의 언어로 구현되었다. 그렇게 기적의 시간이 왔다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세이어가 그 시간에 대해 말한다. 


그해 여름은 특별했습니다. 재탄생과 순수 그리고 기적의 계절이었습니다. 15명의 환자들과 관리인인 우리들에게 말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기적의 내용을 바꿔야만 합니다. 과학이라는 이름 뒤에 숨어 약 때문에 실패했다고도, 단순히 병이 재발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환자들이 잃어버린 세월을 따라잡는데 실패했다고 말할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뭘 잘못 했는지도 모른다는 게 진실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뭘 잘 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아는 건 약을 통한 해결의 길이 막혀도 또 다른 깨어남이 발생하리라는 것, 인간의 정신은 어떤 약보다도 강하다는 것입니다.


과학은 언제나 최악으로 치닫는가?


“농경 이전의 수렵과 채집 시대에 인간의 기대 수명은 20~30살 사이였다. 1870년경에 이르러서야 비로서 인간의 기대수명은 40살이 되었다. 1915년에는 50살, 1930년에는 60살, 1955년에는 70살 그리고 오늘날에는 거의 80살에 이른다.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멋진 인도주의적 변천의 원인은 무엇인가? 질병의 세균 이론, 공중 보건 대책, 의약 및 의학 기술 등이다. 과학이 인류에게 선사한 가장 고귀한 선물, 그것이 바로 생명이다...그러나 과학이 도덕적으로 해이한 기술자들이나 권력을 가진 부패한 미친 정치인들에게 너무 막강한 힘을 부여했다고 쉽게 단정짓고, 그렇기 때문에 과학은 제거되어야 한다고 결정할 수는 없다. 의학과 농업의 진보는 인류 역사에서 발발한 많은 전쟁으로 죽어간 사람보다 훨씬 더 많은 생명을 구했다.”

칼 세이건, <악령이 출몰하는 세상>, 김영사, 19~21쪽


여전히 이런 글은 사실여부를 떠나, 글이 옹호하고자 하는 입장 때문에 선뜻 지지의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수학과학이 더 이상 발전하지 않고 여기서 멈췄으면 하고 바라던 때가 있었다. 전쟁은 수학과학의 발전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모든 인류를 먹여 살리고도 남을 생산력이 있지만 여전히 수많은 사람이 굶어죽고 있다. 황우석 사태는 맹목적인 과학에 대한 맹신이 불러온 코메디였다. 수명을 다한 원전은 여전히 가동 중이다. 수학과학이 발전하는 만큼 파국의 사이즈만 커지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 때문에 모든 게 덧없이 느껴졌다. 

뇌신경학이나 정신분석학도 예외는 아니다. 뇌신경학이나 정신분석학이 이름지은 수 많은 병적 증상들은 현실을 위장하기 위한 수단으로 고안된 경우가 많다. 산업사회는 과도한 노동을 합리화시키려고 만성피로와 같이 딱히 병이라 부르기 힘든 증상에 신경쇠약이란 이름을 붙였다. 그러면서도 성차별은 강화하려는 목적으로 여성에게는 히스테리란 이름을 붙였다. 1, 2차세계대전을 겪으며 전쟁과 군대로 인한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이 늘자 스트레스란 개념을 만들어냈고, 그 정도가 심해지자 트라우마라는 말이 등장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1950~60년대 스트레스란 개념을 담은 보고서를 가장 많이 만들어낸 집단은 군대다. 1970년대에 스트레스 연구인력 중 1/3이 미국의 군부기관과 관련이 있었다는 통계가 있다.


그런데도 다시 과학의 힘에 기대고 관심을 가지고 무언가 역할을 하려고 고민하게 된 것은 몸이 아프면서다. 인공암벽타기를 취미로 1년 넘게 배우다가 손목과 어깨 인대가 심하게 찢어졌다. 좀 나을만하니 이번에는 농구를 하다가 전방십자인대가 파열되어 이식 수술을 받았다. 지금도 재활훈련 중이다.

병원은 흡사 실험실의 이미지를 닮아 있다. 차갑고, 무섭고, 낯설다. 어려운 용어들로 가득한 처방전, 좀처럼 인간미를 느끼기 어려운 병원이란 시스템 속에서 유일한 구원은 환자친화적인 의사의 존재다. 이를테면 여전히 과학이란 선의를 가진 존재없이는 그 용처가 의심스럽고 통제가 불가능한 무엇이다. 어쨌거나 부정하기 힘든 사실은 내 몸이 과학의 힘에 기대 회복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가장 따뜻한 논리, 가장 치밀한 감성


가설은 자주 빗나가고 실험은 항상 성공하지 않으며 과학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지도 않는다. 새로운 도전은 오히려 더 나쁜 결말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이어 온 이야기가 주는 감동은 일관되게 휴머니즘이 아닌, 휴머니즘이 근거하는 태도에 있다. 세이어의 휴머니즘은 신파가 아니라 과학적 태도로부터 나온다. 더 근본적으로 과학적 태도는 논리가 아니라 의지로부터 출발한다. 

 

책 제목이자 마지막 7번째 에피소드이기도 한 <화성의 인류학자>는 세 살 때 자폐증 진단을 받은 생물학자 템플 이야기다. 

템플은 성장과정을 거치며 학습을 통해 사회생활도 가능했는데 어떤 상황이 주어지면 마치 함수처럼 그에 적합한 반응을 찾아내었다. 하지만 템플은 정상적인 생활과 그에 따르는 정상적인 기쁨(사랑, 우정, 취미생활, 인간적인 만남)이 자신이 결코 닿을 수 없는 세계임을 깨달았다. 세상은 때로 템플을 속이고 이용했다. 템플은 사람에게서 위로를 얻지 않고 직접 고안해서 만든 포옹기계로 스스로를 위로한다. 그리고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사육환경이 가축에게 미치는 영향을 연구한다. 템플은 대량사육시스템, 특히 대량 살상 시스템이 가진 비인간성에 분노하고 시스템 개선에 주력하고 있다. 템플의 주장을 듣고 있노라면 템플에게 가해지는 비정상이란 공격이 너무도 부질없이 느껴진다. 그러나 사람들은 좀처럼 편견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달리 자폐증 진단을 받은 사람들도 끊임없는 노력으로 사회적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어떤 분야에서는 오히려 더 탁월한 업무 능력을 보이기도 한다. 가령 템플은 다른 사람에게 잘 보여야할 이유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다. 템플에게는 인과관계에 충실한 과학이란 언어가 이해하기 쉬웠다. 이것이 과학의 세계로 들어서는 출입구가 돼주었다.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성인 자폐증 환자에 대해서는 좀처럼 언급하지 않는다. 자폐아가 나이를 먹으면 갑자기 사라져버리기라도 하는 걸까? 일부 청소년 자폐증 환자들은 황폐했던 세 살 무렵과 달리 상당한 수준의 언어 능력과 약간의 사회적 기술을 갖추고, 놀라운 지적 능력을 발휘한다. 밑바닥에는 심각한 자폐성 특징이 끈질기게 남아 있다 하더라도 겉으로는 통상적인 인생을 충분히 즐기는 것처럼 보이는 자율적인 인간으로 성장한다. 아스퍼거는 캐너보다 훨씬 분명하게 이런 가능성을 예견했다. 따라서 '고도의 능력'을 갖춘 자폐증 환자들은 아스퍼거 증후군 환자라고 불린다. 


한 동안 손에 놓고 있던 수학과학에 대해 다시 손을 내밀어보기로 한다. 수학과학 공부를 다시 하겠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삶의 태도로서 한 동안 버려두었던 것을 다시 만지작거리기로 했다는 의미다. 지적 호기심과 따뜻한 시선이 결합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다시 긍정해보기로 한다. 과학은 편견을 강화시키기도 하지만 편견을 깨기도 한다. 과학적 태도를 지워버리는 것이 현명한 것일까? 그게 가능하기나 할까? 과학에 대한 맹신이나 불신이 오히려 편견과 불합리를 키운다면 그에 맞서기 위해 무엇이 필요할까? <화성의 인류학자>가 우리에게 던진 질문이다. 


Posted by 칸나일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