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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09.19 게임은 꼭 경쟁적이어야 할까?

다들 의자놀이를 한 번씩 해봤을 것이다. 게임의 규칙은 이렇다. 참가자들은 음악이 틀어진 동안 자유롭게 돌아다니다가 음악이 멈추면 의자를 하나씩 차지하고 앉는다. 이때 의자의 수는 참가자의 수보다 적고, 의자에 앉지 못한 사람은 탈락한다. 이제 의자의 수를 더 줄이고 남은 참가자들이 다시 게임을 진행한다.


이 게임은 전형적인 ‘경쟁 게임’이다. 경쟁 게임에서 플레이어들은 희소한 자원(돈이나 땅 그리고 많은 경우 목숨)을 놓고 경합을 벌인다. 여기서 희소한 자원은 의자이다. 누군가가 의자에 앉으면 다른 누군가는 필연적으로 그 의자에 앉지 못한다. 경쟁의 결과로 매번 탈락하는 사람이 생기고 이 과정을 반복하여 최후에 남는 사람이 승리한다. 게임이 끝나면 참가자들은 승자와 패자의 두 집단으로 구분된다.


실제로 우리가 즐기는 대다수의 게임과 스포츠는 경쟁 게임이다. 교육심리학자 알피 콘(Alfie Kohn)은 경쟁이 놀이와 동일시되는 것에 대한 반론을 펴며, 다음과 같은 의자놀이의 변형을 제시한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참가자보다 적은 수의 의자가 주어지지만, 한 의자에 꼭 한 사람만 앉을 필요는 없다. 모든 사람이 어떻게든 의자 위에 올라가기만 하면 된다. 게임이 진행될수록 의자의 수는 줄어들고 모두 앉기는 점점 어려워진다.


이 게임에는 성공과 실패가 있을 뿐 승리와 패배는 없다. 이 두 가지의 차이는 중요하다. 성공은 승리와 달리 참가자들 모두가 동시에 성취할 수 있다. 다 같이 이기거나 다 같이 지는 것이다. 이런 협력 게임에서는 누구도 적으로 돌릴 필요가 없으며, 패배의 두려움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 ‘협력 게임’은 플레이어들이 서로 싸우는(PvP) 것이 아니라, 함께 외부의 환경과 맞서 싸우는(PvE) 게임으로 정의할 수 있다. 다른 플레이어가 아니라 게임의 규칙과 대결하는 셈이다.


공지영의 ‘의자놀이’ - 2009년 정리해고로 시작된 쌍용차 사태에 관한 르포르타주


콘에 따르면 놀이의 본질은 경쟁, 즉 승자와 패자를 가르는 것이 아니라 즐거움 그 자체에 있다. 사람들이 경쟁 게임을 선호하는 것은 그것이 오늘날의 사회와 경제제도의 관점에서 유용하기에 “경쟁이 즐거운 것이라고 생각하게끔 우리가 사회화”된 결과라는 것이다. 그는 한걸음 더 나아가 “놀이의 순수한 즐거움을 얻으려면 스포츠와 같은 경쟁적 활동은 배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각주:1]


이런 급진적인 결론까지 옹호하지는 않더라도, 우리가 즐기는 게임이 왜 대부분 경쟁적인가는 깊이 생각해볼 만한 문제다. 많은 사람이 경쟁 게임이 협력 게임보다 더 재미있다고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 게임이 재미있기 위해서는 반드시 경쟁의 요소가 들어가야 하는 걸까? 이런 질문들에 직접 답하는 대신에 한번 반대의 질문을 던져보자. 우리가 즐기는 협력 게임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간혹 경쟁 게임에도 협력의 요소가 있다. 다대다로 싸우는 전략게임의 팀플레이나 축구, 농구와 같은 팀스포츠가 그러하며, 나를 제외한 모두가 적인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에서도 더 큰 적을 상대하기 위해 언젠가는 대적해야 할 상대와 일시적으로 손을 잡아야 할 때가 있다. 하지만 이 경우도 본질은 집단 내의 협력보다는 결국 집단 간의 경쟁에 있으므로 진정한 의미의 협력 게임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주로 혼자 하는 퍼즐이나 액션/어드벤처 장르의 비디오게임 중에는 멀티플레이어 협력 모드를 지원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대체로 여럿이 즐기는 전략게임이나 일인칭슈팅게임(FPS)에 ‘디펜스’와 같은 협력 모드가 있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사례들도 싱글플레이어 혹은 멀티플레이어 경쟁 게임이 주가 되며 협력 게임은 덤으로 딸려온 특별 모드나 유저들이 만든 변형 게임(mod) 수준인 경우가 많다. 순수하게 협력을 본위로 만들어진 비디오게임은 드물다.


‘리그 오브 레전드(LoL)’ - 어떤 의미에서 거의 모든 3인 이상 멀티플레이어 게임은 협력의 요소를 지니고 있지만, 이것을 진정한 의미의 협력 게임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한편 보드게임을 비롯한 아날로그 게임 중에는 협력 게임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보드게이머들 사이에 잘 알려진 예로는 팬데믹, 플래시 포인트, 하나비, 아컴 호러, 로빈슨 크루소, 스페이스 얼럿, 좀비사이드, 메이지 나이트 등이 있다. 이 게임들에서 플레이어들은 인류를 위협하는 전염병을 퇴치하거나, 화재를 진압하고 인명을 구하거나, 고대 악령의 부활을 막거나, 조난된 섬에서 탈출하는 등 공동의 목표 달성을 위해 힘을 모은다.


탁자에 둘러앉아 하는 역할놀이 즉, TRPG(tabletop role playing game)는 거의 모두가 협력 게임이다. TRPG의 플레이어들은 각자 하나씩 역할을 맡고 일행이 되어 던전과 같은 가상 세계를 탐험하고 주어진 임무 혹은 퀘스트를 완수한다. TRPG에도 규칙은 있지만 비디오게임이나 보드게임처럼 정교하게 알고리즘화된 규칙은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에 TRPG의 진행은 주로 대화를 통한 역할의 수행으로 이루어진다.


경쟁이 게임의 필수적인 요소가 아니라는 사실은 수많은 싱글플레이어 게임들의 사례를 보아도 알 수 있다. 플레이어가 주인공이 되어 주어진 시나리오를 클리어 하는 액션/어드벤처 게임이나 현실을 모사한 환경을 간접 체험할 수 있는 시뮬레이션 게임은 비디오게임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항상 인기를 끌어 왔다. 이런 게임들마저 ‘자신과의 경쟁’이라고 부르는 것은 수사의 남용일 것이다.


‘팬데믹’ - 전염병으로부터 세계를 구하라!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싱글플레이어 게임이나 협력 게임들은 대개 소재나 테마에 있어서 경쟁 게임들과 두드러지게 구분된다는 것이다. 협력 게임 중에는 전쟁보다는 모험, 살생보다는 생존, 상잔보다는 상생을 다루는 것이 많다. 그 과정에 싸움이 수반되더라도 상대는 대등한 위치에 있는 가상의 경쟁자보다는 괴물이나 재난, 위기상황과 같은 거대한 악(惡)이다. 요컨대 협력 게임은 대체로 공공선이나 바람직한 가치를 추구한다. 물론 이는 경쟁 게임이 구조상 어느 정도의 대칭성을 띄기 때문일 수도 있다.


협력 게임의 재미는 다른 플레이어를 밟고 올라가 승리의 왕관을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의 목표 달성을 위해 모두가 힘을 합치고 의견을 조율하는 데서 나온다. 그렇다고 협력 게임이 항상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진행되는 것은 아니다. 한 사람이 플레이를 지나치게 주도하는 경우 나머지는 게임에서 소외될 수 있다. 결정적인 잘못을 저질러 실패를 초래한 사람이 원성을 사기도 한다. TRPG에서는 자기 역할과 맞지 않는 말과 행동을 하는 것이 게임의 분위기를 완전히 망칠 수 있다.


‘던전 앤 드래곤(D&D)’ - 모든 TRPG의 효시이자 지금까지 가장 널리 즐겨지는 TRPG 중 하나


협력 게임이 경쟁 게임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하다거나, 항상 더 재미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협력 게임보다 경쟁 게임을 선호하는 사람에게 “그런 것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은 당신뿐이다.”라고 윽박지를 수는 없지 않은가? 다만 경쟁이 재미의 필수적인 요소는 아니라는 점, 협력 게임에는 거기서만 느낄 수 있는 고유한 재미가 있다는 점, 그리고 우리가 경쟁 게임을 선호하는 것은 어쩌면 타고난 본능이 아니라 학습된 것일 수 있다는 점은 잊지 말아야겠다.


사실 경쟁 게임이든 협력 게임이든 ‘결과 지향적’ 활동이라는 점에서는 같다. 하나는 타인에 대한 승리를, 다른 하나는 전원의 성공을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다를 뿐이다. 그럼 결과에 관계없이 게임을 플레이하는 과정만으로 즐거움을 얻을 수는 없는 걸까? 게임에서 지거나 목표 달성에 실패해도 재미를 느낄 수 있듯이 승리와 패배, 성공과 실패의 구분이 아예 없는 게임도 충분히 재미있을 수 있지 않을까? 다음 글에서는 이런 ‘과정 지향적’ 게임들에 대해 살펴보겠다.


  1. Alfie Kohn, No Contest: The Case Against Competition, 1992. (이영노 옮김, 『경쟁에 반대한다』, 산눈, 2009) [본문으로]
Posted by 人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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