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에 첫 편이 출시되어 이후 심시티2000, 심시티3000, 심시티4 등 많은 속편을 낳은 심시티(SimCity)’ 시리즈는 가장 많은 판매 부수를 올린 비디오게임 중 하나로 기록되어 있다. 이 심시티 시리즈의 특징은 결말이 열린 게임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성취되면 게임이 종료되는 일정한 목표가 없이 끝없이 게임이 진행된다는 뜻이다. 이 글에서는 이와 같은 과정 지향적 게임들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그 전에 먼저 놀이와 게임에 대한 몇 가지 고전적인 저작들을 살펴보자.


1989년작 윌 라이트(Will Wright)의 심시티


요한 하위징아(Johan Huizinga)[각주:1]는 <호모 루덴스(Homo Ludens: 놀이하는 인간>에서 인간 사회의 본질이 놀이에 있다고 보았다. 그는 다양한 언어에서 놀이를 나타내는 단어들을 살펴봄으로써 놀이 개념을 파악하고자 했다. 그리스어에는 파이디아(paidia)와 아곤(agon)이라는 두 단어가 있다. 파이디아는 원래 어린아이의 놀이를 뜻하는 단어였으며, 아곤은 경기 혹은 경연을 가리킨다. 한편 라틴어는 놀이의 전 영역을 통칭하는 루두스(ludus)라는 단일한 단어만을 갖고 있다.


로제 카이와(Roger Caillois)[각주:2]와 장 피아제(Jean Piaget)[각주:3]는 규칙의 복잡하고 엄격한 정도에 따라 초기 아동이 하는 파이디아/놀이(play)와 보다 나이든 아이나 어른이 하는 루두스/게임(game)을 구분했다. 둘의 차이라면 카이와가 규칙이 덜 복잡한 게임과 더욱 복잡한 게임으로 구분한 반면에, 피아제는 사실상 규칙으로부터 자유로운 운동감각적 놀이 및 상징적 역할놀이와 규칙을 가진 게임으로 구분했다는 점이다.


놀이는 특정 시간과 공간 내에서 벌어지는 자발적 행동 혹은 몰입 행위로서, 자유롭게 받아들여진 규칙을 따르되 그 규칙의 적용은 아주 엄격하며, 놀이 그 자체에 목적이 있고 ‘일상생활’과는 다른 긴장, 즐거움, 의식(意識)을 수반한다. -요한 하위징아, <호모 루덴스>


한편 곤살로 프라스카(Gonzalo Frasca)[각주:4]에 따르면 규칙이 없는 놀이 혹은 게임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점에서 그의 견해는 모든 놀이에는 놀이가 벌어지는 장소와 시간에서 무엇이 통용되는지를 결정하는 규칙이 있다고 본 하위징아와 일치한다. 하지만 하위징아가 놀이(파이디아)와 경기(아곤)는 근본적으로 분리될 수 없다고 주장한 것과 달리, 프라스카는 게임의 승리 및 패배를 가르는 종료 조건의 유무에 따라 게임을 분류했다. 그러한 종료 조건을 루두스 규칙이라고 하며, 게임의 진행과 관련된 나머지 규칙을 파이디아 규칙이라고 한다.


모든 게임에는 파이디아 규칙이 있다. 예를 들어, 전래놀이인 강강술래에는 손을 잡고 원을 만들어 노래를 부르며 돈다는 파이디아 규칙이 있지만 루두스 규칙은 없다. 장기에는 졸(卒)이 앞이나 옆으로 한 칸씩 움직일 수 있다는 등의 파이디아 규칙과 상대방의 왕을 잡으면 이긴다는 루두스 규칙이 있다. 프라스카는 강강술래처럼 파이디아 규칙만 있는 게임을 ‘파이디아’, 장기처럼 파이디아 규칙과 루두스 규칙이 모두 있는 게임을 ‘루두스’라고 정의한다. 승리 및 패배 조건의 유무에 따른 프라스카의 범주 구분은 규칙의 복잡성처럼 모호한 기준에 따른 다른 학자들의 분류보다 훨씬 더 명확하다.


어쩌면 ‘승리 및 패배’라는 표현보다 ‘성공 및 실패’라는 표현이 적당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싱글플레이어 게임이나 협력게임에서는 다른 플레이어와의 경쟁에서 승리를 거두는 것이 아니라, 게임 속의 환경에 맞서 일정한 성공 요건을 성취하는 것이 게임의 목표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싱글플레이어 게임과 멀티플레이어 경쟁게임 및 협력게임 모두 게임의 목표가 있으면 루두스에 속한다. 이 점에서 루두스와 파이디아는 각각 목표의 달성을 지향하는 ‘결과 지향적’ 게임과 플레이 과정 자체를 즐기는 ‘과정 지향적’ 게임이라고 부를 수 있다.


심즈 - “심시티 제작자의 사람 시뮬레이터”


그렇다면 ‘덜 복잡한’ 규칙을 가진 놀이를 제외하고 제법 형식을 갖춘 복잡한 게임들 중에서도 게임의 목표가 없는 파이디아가 존재할까? 비디오게임의 주요 장르 중 하나를 차지하는 시뮬레이션 게임들 다수가 거기에 해당한다. 시뮬레이션 게임이란 현실의 다양한 상황들을 모사하는 게임을 말한다. 시뮬레이션 게임은 다시 전략 시뮬레이션, 건설 시뮬레이션, 경영 시뮬레이션, 연애 시뮬레이션, 비행 시뮬레이션, 운전 시뮬레이션 등 다양한 하위장르로 구분되기도 한다.


물론 많은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과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처럼 목표가 분명한 것들도 있다. 이때의 목표는 각각 상대 진영과 캐릭터의 ‘정복’이 될 것이다. 한편 심시티나 ‘심즈(Sims)’ 같은 시뮬레이션 게임들은 도시를 건설하고 한 가족의 삶을 가꾸는 과정 자체에서 즐거움을 제공한다. 이 밖에도 ‘심팜(SimFarm)’, ‘심앤트(SimAnt)’, ‘심콥터(SimCopter)’, ‘심타워(SimTower)’, ‘심어스(SimEarth)’ 등 게임의 제목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심(Sim)’이 바로 시뮬레이션(simlulation)이라는 단어에서 딴 것이다.


위 이름들에서 보듯이 시뮬레이션 게임에서 다루는 소재는 농장, 개미집, 헬리콥터, 건물, 행성까지 정말 다양하다. ‘마이크로소프트 플라이트 시뮬레이터(MSFS)’라는 비행 시뮬레이션 게임은 실제로 항공기 조종사 교육용으로 사용될 정도로 정확한 모사를 자랑한다. 전투기를 조종해 공중전을 벌이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한 공항에서 다른 공항까지 항공기를 몰고 가는 게 무슨 재미가 있을까 싶기도 하지만, 이 같은 가상현실 체험이 바로 시뮬레이션 게임의 묘미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온라인 롤플레잉 게임(MMORPG)들도 파이디아라고 볼 수 있다. 레벨업이나 퀘스트처럼 작은 목표들이 있기는 하지만 게임의 궁극적인 목표와 끝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을 잘 살린 ‘세컨드 라이프(Second Life)’ 같은 게임도 있다. 세컨드 라이프에는 레벨업도 퀘스트도 없다. 현실의 일상생활 전부를 가상으로 옮겨놓은 심즈의 온라인 버전인 셈이다. ‘마인크래프트(Minecraft)’처럼 플레이어의 자유도를 극대화한 오픈월드 혹은 샌드박스 게임들도 파이디아의 좋은 예이다.


마인크래프트 - 무엇이든 만들 수 있는 놀이터의 모래밭처럼 플레이어의 창조성을 극단적으로 발휘할 수 있는 샌드박스 게임의 하나


오늘날 많은 루두스(결과 지향적 게임)가 경쟁게임이고 파이디아(과정 지향적 게임)가 시뮬레이션 게임이라는 관찰이 일찍이 하위징아에게서도 비슷하게 발견된다는 점이 흥미롭다. 하위징아는 고등 형태의 놀이에는 두 가지 기본적 양상이 있는데, 하나는 어떤 것을 얻기 위한 ‘경쟁’이고 다른 하나는 어떤 것의 ‘재현’이라고 보았다.


프라스카는 위에서 언급한 파이디아들이 ‘피억압자의 게임’이 될 잠재성을 갖추고 있다고 말한다. 게임 디자이너가 미리 규정한 틀을 따르는 대신에 플레이어 스스로가 규칙을 만들어나가는 게임이 바로 파이디아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파이디아를 즐기는 플레이어는 아무 목표 없이 헤매는 것이 아니라 자기만의 루두스 규칙을 좇는다. 그것은 세계 최대의 도시 건설이 될 수도 있고, 그렇게 건설한 도시를 화산 폭발로 파괴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파이디아 규칙 역시 플레이어에 대한 암묵적 제약을 가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예컨대 심즈에서 플레이어의 캐릭터는 군인, 과학자, 범죄자, 사업가 같은 직업은 가질 수 있지만 시민단체 활동가가 될 수는 없고, 어린이와 청소년은 무조건 학교에 가야 한다. 한편으로 사용자가 직접 게임의 규칙를 고친 모드(mod: modification)를 제작하여 플레이하고 다른 플레이어들과 공유하는 문화가 게이머들 사이에 존재한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이 플레이어와 디자이너가 분리되지 않고 하나 되는 진정한 게임 해방으로 가는 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 Johan Huizinga, Homo Ludens: A Study of the Play Element in Culture, 1938. (이종인 옮김, 호모 루덴스 - 놀이하는 인간, 2013) [본문으로]
  2. Roger Caillois, Man, Play and Games, 2001. [본문으로]
  3. Jean Paiget, Play, Dreams and Imitation, in Children, 1951. [본문으로]
  4. Gonzalo Frasca, The Videogames of the Oppressed, 2004. (김겸섭 옮김, 억압받는 사람들을 위한 비디오게임, 2008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Posted by 人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