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의자놀이를 한 번씩 해봤을 것이다. 게임의 규칙은 이렇다. 참가자들은 음악이 틀어진 동안 자유롭게 돌아다니다가 음악이 멈추면 의자를 하나씩 차지하고 앉는다. 이때 의자의 수는 참가자의 수보다 적고, 의자에 앉지 못한 사람은 탈락한다. 이제 의자의 수를 더 줄이고 남은 참가자들이 다시 게임을 진행한다.


이 게임은 전형적인 ‘경쟁 게임’이다. 경쟁 게임에서 플레이어들은 희소한 자원(돈이나 땅 그리고 많은 경우 목숨)을 놓고 경합을 벌인다. 여기서 희소한 자원은 의자이다. 누군가가 의자에 앉으면 다른 누군가는 필연적으로 그 의자에 앉지 못한다. 경쟁의 결과로 매번 탈락하는 사람이 생기고 이 과정을 반복하여 최후에 남는 사람이 승리한다. 게임이 끝나면 참가자들은 승자와 패자의 두 집단으로 구분된다.


실제로 우리가 즐기는 대다수의 게임과 스포츠는 경쟁 게임이다. 교육심리학자 알피 콘(Alfie Kohn)은 경쟁이 놀이와 동일시되는 것에 대한 반론을 펴며, 다음과 같은 의자놀이의 변형을 제시한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참가자보다 적은 수의 의자가 주어지지만, 한 의자에 꼭 한 사람만 앉을 필요는 없다. 모든 사람이 어떻게든 의자 위에 올라가기만 하면 된다. 게임이 진행될수록 의자의 수는 줄어들고 모두 앉기는 점점 어려워진다.


이 게임에는 성공과 실패가 있을 뿐 승리와 패배는 없다. 이 두 가지의 차이는 중요하다. 성공은 승리와 달리 참가자들 모두가 동시에 성취할 수 있다. 다 같이 이기거나 다 같이 지는 것이다. 이런 협력 게임에서는 누구도 적으로 돌릴 필요가 없으며, 패배의 두려움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 ‘협력 게임’은 플레이어들이 서로 싸우는(PvP) 것이 아니라, 함께 외부의 환경과 맞서 싸우는(PvE) 게임으로 정의할 수 있다. 다른 플레이어가 아니라 게임의 규칙과 대결하는 셈이다.


공지영의 ‘의자놀이’ - 2009년 정리해고로 시작된 쌍용차 사태에 관한 르포르타주


콘에 따르면 놀이의 본질은 경쟁, 즉 승자와 패자를 가르는 것이 아니라 즐거움 그 자체에 있다. 사람들이 경쟁 게임을 선호하는 것은 그것이 오늘날의 사회와 경제제도의 관점에서 유용하기에 “경쟁이 즐거운 것이라고 생각하게끔 우리가 사회화”된 결과라는 것이다. 그는 한걸음 더 나아가 “놀이의 순수한 즐거움을 얻으려면 스포츠와 같은 경쟁적 활동은 배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각주:1]


이런 급진적인 결론까지 옹호하지는 않더라도, 우리가 즐기는 게임이 왜 대부분 경쟁적인가는 깊이 생각해볼 만한 문제다. 많은 사람이 경쟁 게임이 협력 게임보다 더 재미있다고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 게임이 재미있기 위해서는 반드시 경쟁의 요소가 들어가야 하는 걸까? 이런 질문들에 직접 답하는 대신에 한번 반대의 질문을 던져보자. 우리가 즐기는 협력 게임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간혹 경쟁 게임에도 협력의 요소가 있다. 다대다로 싸우는 전략게임의 팀플레이나 축구, 농구와 같은 팀스포츠가 그러하며, 나를 제외한 모두가 적인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에서도 더 큰 적을 상대하기 위해 언젠가는 대적해야 할 상대와 일시적으로 손을 잡아야 할 때가 있다. 하지만 이 경우도 본질은 집단 내의 협력보다는 결국 집단 간의 경쟁에 있으므로 진정한 의미의 협력 게임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주로 혼자 하는 퍼즐이나 액션/어드벤처 장르의 비디오게임 중에는 멀티플레이어 협력 모드를 지원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대체로 여럿이 즐기는 전략게임이나 일인칭슈팅게임(FPS)에 ‘디펜스’와 같은 협력 모드가 있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사례들도 싱글플레이어 혹은 멀티플레이어 경쟁 게임이 주가 되며 협력 게임은 덤으로 딸려온 특별 모드나 유저들이 만든 변형 게임(mod) 수준인 경우가 많다. 순수하게 협력을 본위로 만들어진 비디오게임은 드물다.


‘리그 오브 레전드(LoL)’ - 어떤 의미에서 거의 모든 3인 이상 멀티플레이어 게임은 협력의 요소를 지니고 있지만, 이것을 진정한 의미의 협력 게임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한편 보드게임을 비롯한 아날로그 게임 중에는 협력 게임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보드게이머들 사이에 잘 알려진 예로는 팬데믹, 플래시 포인트, 하나비, 아컴 호러, 로빈슨 크루소, 스페이스 얼럿, 좀비사이드, 메이지 나이트 등이 있다. 이 게임들에서 플레이어들은 인류를 위협하는 전염병을 퇴치하거나, 화재를 진압하고 인명을 구하거나, 고대 악령의 부활을 막거나, 조난된 섬에서 탈출하는 등 공동의 목표 달성을 위해 힘을 모은다.


탁자에 둘러앉아 하는 역할놀이 즉, TRPG(tabletop role playing game)는 거의 모두가 협력 게임이다. TRPG의 플레이어들은 각자 하나씩 역할을 맡고 일행이 되어 던전과 같은 가상 세계를 탐험하고 주어진 임무 혹은 퀘스트를 완수한다. TRPG에도 규칙은 있지만 비디오게임이나 보드게임처럼 정교하게 알고리즘화된 규칙은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에 TRPG의 진행은 주로 대화를 통한 역할의 수행으로 이루어진다.


경쟁이 게임의 필수적인 요소가 아니라는 사실은 수많은 싱글플레이어 게임들의 사례를 보아도 알 수 있다. 플레이어가 주인공이 되어 주어진 시나리오를 클리어 하는 액션/어드벤처 게임이나 현실을 모사한 환경을 간접 체험할 수 있는 시뮬레이션 게임은 비디오게임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항상 인기를 끌어 왔다. 이런 게임들마저 ‘자신과의 경쟁’이라고 부르는 것은 수사의 남용일 것이다.


‘팬데믹’ - 전염병으로부터 세계를 구하라!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싱글플레이어 게임이나 협력 게임들은 대개 소재나 테마에 있어서 경쟁 게임들과 두드러지게 구분된다는 것이다. 협력 게임 중에는 전쟁보다는 모험, 살생보다는 생존, 상잔보다는 상생을 다루는 것이 많다. 그 과정에 싸움이 수반되더라도 상대는 대등한 위치에 있는 가상의 경쟁자보다는 괴물이나 재난, 위기상황과 같은 거대한 악(惡)이다. 요컨대 협력 게임은 대체로 공공선이나 바람직한 가치를 추구한다. 물론 이는 경쟁 게임이 구조상 어느 정도의 대칭성을 띄기 때문일 수도 있다.


협력 게임의 재미는 다른 플레이어를 밟고 올라가 승리의 왕관을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의 목표 달성을 위해 모두가 힘을 합치고 의견을 조율하는 데서 나온다. 그렇다고 협력 게임이 항상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진행되는 것은 아니다. 한 사람이 플레이를 지나치게 주도하는 경우 나머지는 게임에서 소외될 수 있다. 결정적인 잘못을 저질러 실패를 초래한 사람이 원성을 사기도 한다. TRPG에서는 자기 역할과 맞지 않는 말과 행동을 하는 것이 게임의 분위기를 완전히 망칠 수 있다.


‘던전 앤 드래곤(D&D)’ - 모든 TRPG의 효시이자 지금까지 가장 널리 즐겨지는 TRPG 중 하나


협력 게임이 경쟁 게임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하다거나, 항상 더 재미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협력 게임보다 경쟁 게임을 선호하는 사람에게 “그런 것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은 당신뿐이다.”라고 윽박지를 수는 없지 않은가? 다만 경쟁이 재미의 필수적인 요소는 아니라는 점, 협력 게임에는 거기서만 느낄 수 있는 고유한 재미가 있다는 점, 그리고 우리가 경쟁 게임을 선호하는 것은 어쩌면 타고난 본능이 아니라 학습된 것일 수 있다는 점은 잊지 말아야겠다.


사실 경쟁 게임이든 협력 게임이든 ‘결과 지향적’ 활동이라는 점에서는 같다. 하나는 타인에 대한 승리를, 다른 하나는 전원의 성공을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다를 뿐이다. 그럼 결과에 관계없이 게임을 플레이하는 과정만으로 즐거움을 얻을 수는 없는 걸까? 게임에서 지거나 목표 달성에 실패해도 재미를 느낄 수 있듯이 승리와 패배, 성공과 실패의 구분이 아예 없는 게임도 충분히 재미있을 수 있지 않을까? 다음 글에서는 이런 ‘과정 지향적’ 게임들에 대해 살펴보겠다.


  1. Alfie Kohn, No Contest: The Case Against Competition, 1992. (이영노 옮김, 『경쟁에 반대한다』, 산눈, 2009)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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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굴업자, 선장, 고위관리, 상인, 토지 개척자, 제조업자, 건축업자. 여러분은 신세계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할 것인가? 가장 풍요로운 농장을 소유할 것인가? 가장 위대한 건축물을 건설할 것인가? 여러분의 목표는 오직 하나이다. 그것은 바로 최대의 부와 최고의 명성을 성취하는 것!


여러분은 20세기 초의 일본인 지주이다. 여러분과 경쟁자들은 기회의 땅 조선으로 앞 다투어 건너가 불하받은 토지에 쌀과 대마, 면화, 인삼을 재배한다. 수확된 쌀과 가공된 삼베, 면직물, 한약은 다시 선적하여 내국으로 수출한다. 보다 원활한 생산과 유통을 위해 여러분은 조선에 시장과 창고, 관청, 학교, 항구, 수공업 공장을 건설한다. 총독과 다양한 역할들의 특권을 활용해 수탈과 개발로 가장 많은 부와 명성을 얻은 사람이 승리한다.


이런 게임이 나온다면 어떨까? 순수하게 즐거운 기분으로 게임에 몰입할 수 있을까? 왠지 출시 전부터 온갖 논란에 휩싸일 것만 같다. 그런데 이런 게임이 정말로 있다. 20세기 일본을 16세기 에스파냐로, 조선을 푸에르토리코로, 쌀·대마·면화·인삼을 옥수수·인디고·설탕·담배·커피로 바꾸면 그렇다.


푸에르토리코


안드레아스 사이파스(Andreas Seyfarth)가 2002년에 선보인 보드게임 ‘푸에르토리코(Puerto Rico)’는 출시 직후부터 평단과 게이머들의 호평을 받으며 큰 인기를 끌었다. 그 뒤 보드게임 커뮤니티 보드게임긱에서 수년 간 순위 1위를 독차지했고, 지금까지 5위권 밖으로 밀려난 적이 없다. 한편 이 게임의 주제에 대한 논란은 그동안 별로 없었다. 따지고 보면 그다지 폭력적이지도 선정적이지도 않은 게임이라 그런 게 당연한 듯도 하다.


하지만 비판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세바스찬 아타이는 어느 게임사(史) 웹진에 실린 글 ‘푸에르토리코의 수사학’에서 이 게임을 “철저하게 유럽 중심적인 문화의 산물”이라고 평했다. 그것이 “서구의 억압적 실천을 축소·은폐하고, 비유럽인의 성취를 부정하며, 서구인을 진보의 주된 촉매로 묘사하는 자유주의적 역사관을 재생산한다”는 것이다.[각주:1]


“1493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서인도제도 동쪽 끝의 섬을 발견했다. 50년 뒤, 푸에르토리코는 번성하기 시작한다. 당신의 손에 의해!” -‘푸에르토리코’ 영문 1판 상자 뒷면


이 말을 이해하려면 먼저 푸에르토리코의 역사를 조금 알아야 할 것 같다. 1493년 콜럼버스는 이 섬에 상륙해 에스파냐 국왕의 영토임을 선언했다. 뒤이어 정착한 이민자들은 금광을 개발하고 현재 수도인 산후안을 개척했다. 푸에르토리코라는 이름이 생긴 것도 이때다. 스페인어로 ‘puerto rico’는 영어로 ‘rich port’, 즉 ‘부유한 항구’를 뜻한다.


1530년대부터 금광이 고갈되자 사탕수수와 담배 등을 재배하기 위한 대규모 농장이 건설되었고, 여기서 일할 아프리카인 노예가 대량으로 실려 왔다. 이때 콜럼버스의 ‘발견’ 당시 3만 명이 넘었던 선주민 인구는 질병과 과로, 학살로 이미 2천 명 아래로 줄어 있었다. 이후 푸에르토리코는 400여 년 동안 에스파냐의 식민 지배를 받았다. 현재 푸에르토리코의 인종 구성은 백인이 75%, 흑인이 12%이고, 미원주민은 0.5%에 불과하다.


알고 보면 푸에르토리코는 조선과 많은 면에서 비슷하다. 둘 다 일본과 에스파냐의 통치에서 벗어난 뒤 곧바로 미군정이 시작되었고 이후에도 미국에 종속된 신식민지 체제를 겪었다. (푸에르토리코는 1952년부터 국방·외교·통화를 제외한 내정을 이양 받아 미국의 완전한 주는 아니지만 자치령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냉전 시대에는 각각 동아시아와 중앙아메리카에서 공산진영에 맞서 최전선의 교두보 역할을 했다. 양국 모두 아직까지 미군이 주둔해 있다는 점도 같다.


비에케스 미해군기지에 반대하는 직접행동. 푸에르토리코의 비에케스 섬은 2003년까지 미해군의 사격훈련장으로 쓰였다. 수도 산후안에는 아직도 포트 뷰캐넌 미육군기지가 남아 있다.


다시 게임으로 돌아가자. ‘푸에르토리코’에서 플레이어의 목표는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아니다. 게임에서 이기기 위한 승점을 얻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생산물을 본토로 실어 보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건물을 짓는 것이다. 이 점은 게임의 핵심을 잘 보여준다. 수탈과 개발은 식민 지배의 본질이 아닌가. 이제 그 과정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자.


플레이어는 자신이 경영하는 농장과 건물에 사람을 배치한다. 사람이 없는 농장과 건물에서는 생산을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이 과정은 게임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흑갈색’ 목재 토큰으로 표현되는 이 사람들은 규칙서에 따르면 식민지 ‘이민자’를 상징한다. 배에 실려 온 이민자를 사탕수수 농장에 보내 일을 시킨다고? 솔직해지자. 이건 이민자가 아니라 노예이다.


채석장과 옥수수밭, 사탕수수밭 등에 배치된 문제의 ‘이민자’ 토큰들


이 문제는 보드게임긱 커뮤니티에서도 논란이 되었다. 물론 개발자와 제작사가 일부러 게임에 그런 은유를 심어놓지는 않았을 수도 있다. 어쩌면 그들에게 이것은 “그저 게임일 뿐”일 것이다. “그저 흑갈색 토큰이지,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는 말이 옳을지도 모른다. (자연목의 색을 그대로 쓸 수도 있는데 왜 굳이 게임 중 커피를 나타내는 토큰과 헷갈릴 수 있는 색깔을 칠했는지는 잘 납득이 가지 않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런 해명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이 게임의 수사가 몰역사적이라는 지적은 여전히 유효하다. 게임의 수사적 기능을 부정하고 외면한다고 해서 그것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케이티 샐런과 에릭 짐머만에 따르면 “게임은 문화적 학습이 일어나는 사회적 맥락”이며 “사회의 가치가 착근되고 전달되는 장소”이다.[각주:2] 이안 보고스트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부연했다.


비디오게임과 같은 절차적 매체는 대상에 내재된 절차에 관한 의견을 세움으로써 그것의 핵심에 다가선다. 우리가 비디오게임을 만드는 것은 곧 우리가 찬양하고, 우리가 무시하며, 우리가 문제 삼는 이런 과정들에 관한 주장을 하는 것이다. 우리가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은 곧 이런 과정들을 우리의 삶에서 심문하고, 미래의 경험으로 이월하는 것이다.[각주:3]


식민지라는 심각한 주제를 게임의 소재로 써서는 안 된다고 말할 생각은 없다. 나는 전쟁게임이나 유혈이 낭자하는 좀비학살 게임도 즐겨 한다. 다만 ‘게임은 그저 게임일 뿐’이라는 생각만은 경계하고 싶다. 적어도 게임의 수사가 현실의 어떤 면은 은폐하고 또 다른 면은 미화하고 있지는 않은지, 그리고 이것이 게임을 즐기는 사람에게 어떻게 해석될지는 고민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전쟁게임을 만들어 놓고 이 게임에서는 말이 잡힐 때 병사가 죽는 게 아니라 포로로 잡히는 거라고 말한다고 해서 그것이 더 평화적인 게임이 되지는 않는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민감한 소재를 애써 회피하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게임’보다는 현실을 불편함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게 해주는 게임일 것이다. 물론 그것이 일단 재미있다는 가정 하에 말이다.


  1. Sebastian Atay, The Rhetoric of Puerto Rico, Memory Insufficient, July 2013. [본문으로]
  2. Katie Salen & Eric Zimmerman, Rules of Play: Game Design Fundamentals, 2003. [본문으로]
  3. Ian Bogost, Persuasive Games, 2010.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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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을 한해를 가장 뜨겁게 달군 게임이 무엇일까? 아무래도 천만 명이 넘는 스마트폰 사용자가 직접 즐겼고 게임 마니아가 아니라도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봤을 모두의마블이 아닌가 싶다. 2013 한국 게임대상 지스타에서 모바일게임 부문 인기상을 받기도 한 이 게임은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1982년작 국산 보드게임 부루마불을 원형으로 삼고 있다.


어디 가서 보드게임을 좋아한다고 하면 부루마불 같은 거요?”라는 말을 들을 그 정도로 부루마불은 한국에서 보드게임의 대명사라 할 만하다. 그런데 부루마불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외국 보드게임 모노폴리를 베꼈고, 모노폴리 역시 다른 게임을 고스란히 베꼈다. 1930년대 미국에서는 모노폴리와 같은 형식의 게임들이 유행했는데 그 중 최초가 바로 엘리자베스 매기가 1902년에 만든 지주게임(The Landlord’s Game)’이었다.


원래 지주게임은 토지사유제의 부조리를 비판하고 헨리 조지의 토지공개념 사상을 알리고자 만들어진 교육용 게임이었다. 매기는 1935년 지주게임에 대한 특허를 파커브라더스사에 500달러에 팔았다. 당시 파커브라더스는 찰스 대로의 모노폴리를 유통하기 시작하면서 독점적 판매권을 확보하기 위해 관련 특허를 사들이고 있었다. 이후 모노폴리는 수십 가지 판본으로 만들어져 전 세계적으로 25천만 개가 넘게 팔렸다. 이 모노폴리의 원작이 세월을 거치며 어떤 풍파를 겪어 왔는지 살펴보겠다.


2013년 한해를 휩쓴 모두의마블

 

지주게임에는 완전히 다른 두 가지 규칙이 있었다. 하나는 오늘날의 지배적인 사업 방식에 기초하여 토지 독점자가 모든 것의 절대적 통제권을 가지게 되는 이 체제의 논리적 귀결을 보여줌으로써 토지 독점자가 세계의 군주라는 진실을 알리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이것이 바로 100년이 지난 지금 우리가 즐기는 유일한 규칙이다.


다른 하나는 이른바 단일세 규칙(Single Tax Rules)’으로 생필품에 대한 세금인 간접세가 면제되며, 철도·수도·전기 같은 공익사업이 공영화되고, 모든 지대는 개인의 금고가 아닌 국고로 납부되어 공공개발에 사용된다. 침범 시 감옥으로 보내지는 귀족 가문의 사유지는 정부에 몰수되어 무상대학부지로 사용된다. 마지막으로 노동 기회의 원천인 토지에 대한 접근권이 모든 사람에게 있기에그 필요성이 사라진 빈민 구제소는 폐지된다.


지주게임(1904)과 모노폴리(2008)의 게임판


모노폴리에서 각 플레이어의 목표는 자신을 제외한 다른 모든 사람을 파산시키는 것이다. 한편 지주게임에는 파산의 개념이 없었다. 대신에 비용을 지불할 현금도, 대출을 받을 능력도, 저당 잡히거나 매각할 토지도 없는 사람을 위한 빈만 구제소가 있어 돈이 없는 사람도 게임에서 낙오되지 않고 비굴하게나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앞서 말했다시피 지공주의 사상을 구현한 단일세 규칙에서는 빈민 구제소의 필요조차 사라졌다.


1933년에 만들어진 모노폴리 초판에도 모든 토지를 저당 잡히고 현금이 $100 미만인 사람에게 찬스, 보물상자, 세금 등에서 발생하는 모든 비용을 면제해주는 구빈제도가 선택규칙으로 있었다. 다만 이것은 은행에 내는 돈에만 해당되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지불해야 할 지대는 면제되지 않는다. 따라서 파산을 조금 늦출 순 있을지언정 피할 수는 없다. 애초 모노폴리는 다른 모든 사람을 파산시키고 최후의 독점자로 남는 것이 게임의 목적이 아닌가! 파커브라더스가 출판한 1939년판 모노폴리에서는 이런 구빈제도마저 자취를 감췄다.


이후 표준으로 자리 잡은 모노폴리 애틀랜틱시티 판에서는 세제에 있어서 약탈적 자본주의의 요소가 더욱 두드러졌다. 일률적으로 재산의 10%였던 재산세가 “200달러 또는 재산의 10%”로 바뀐 것이다. 즉 재산이 2000달러 미만일 때는 10%의 고정세율이 적용되고 그 이상일 때는 200달러의 고정액을 내는 것으로, 누진세는커녕 과세금액이 늘어날수록 세율이 줄어드는 역진세인 것이다. 2008년 개정판에서는 이조차 계산이 번거롭다는 이유로 200달러 고정의 인두세로 바뀌면서, 부자에게나 빈민에게나 똑같은 액수의 세금을 거두는 잔혹한 세금제도가 자리 잡게 되었다.


안티모노폴리


게임의 규칙이 아닌 제목과 관련된 일화도 흥미롭다. 1973년 샌프란시스코주립대 경제학 교수 랠프 안스팍은 안티모노폴리(Anti-monopoly)’라는 이름의 게임을 출판했다. 마치 독점이 바람직하다는 인상을 주는 주류 게임에 대항하여, 독점이 자유기업제도에 얼마나 해롭고 반독점법이 어떻게 이를 규제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그의 의도였다.


이에 모노폴리의 유통사인 파커브라더스는 그를 상표권 침해로 고소했다. 장기간 진행된 공판에서 안스팍은 모노폴리가 매기의 지주게임을 표절했다는 사실을 밝혀냈고 법원도 이 사실을 인정했다. 1979년 항소심은 독점을 뜻하는 모노폴리(monopoly)’가 일반명사이므로 상표권 침해가 아니라는 판결을 내렸고, 대법원이 상고를 기각함으로써 판결이 확정되었다. 하지만 뒤이은 법 개정으로 파커브라더스가 다시 상표권을 가지게 되었고, 결국 양측은 1984년에 합의에 도달해 안티모노폴리라는 이름을 다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분쟁이 진행되는 동안 이 게임은 안티(Anti)’라는 이름으로 유통되어야 했다.


이후 안스팍은 한 좌익 게임이 거대 기업에 의해 어떻게 무자비한 자본주의의 상징으로 탈바꿈되었는지”, “원작자가 파커브라더스에 의해 어떻게 이용되고 배신당하고 버려졌는지그리고 이 사기가 어떻게 뇌물과 위증과 매수에 의해 은폐되었는지에 대한 진실을 책으로 썼다.


추억의 부루마불


모노폴리가 부루마불을 거쳐 모두의마블이 되면서 규칙은 더욱 단순해지고 게임 시간은 크게 짧아졌다. 한자리에 앉아 얼굴을 맞보고 느긋하게 유희를 즐기는 것이 아니라 지하철과 버스를 타고 바삐 오가며 틈틈이 여가를 소비하는 현대 도시인의 삶에 게임이 적응한 것일 수도 있겠다. 놀면서까지 머리를 쓰기에는 일상이 너무 각박하지 않은가.


게이머의 입장에서 모두의마블의 등장과 인기는 호재인 동시에 악재이다. 보드게임이 모바일 기반으로 제작되어 많은 사람이 즐길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기쁘지만, 게이머들에게 오랜토록 사랑받는 게임들은 점차 사라지고 모두의마블처럼 전략적 마케팅으로 시장에서 반짝했다가 금세 묻히는 게임들이 게임계를 지배해가는 것 같아 안타깝다. 반독점 게임이었던 지주게임이 모노폴리로 대체되어 게임 시장을 독점한 역설처럼, 놀이하는 인간들의 안식처도 현실의 억압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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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을 만하면 떠오르는 게 비디오게임의 폭력성 논란이다. 폭력을 소재로 한 게임이 그것을 플레이하는 사람의 폭력적 행위를 유발하는가? 솔직히 잘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인기 있는 게임의 대부분이 때리고 부수고 죽이거나 돈을 많이 버는 것이 목적인, 즉 폭력적이거나 자본주의적인 게임이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나는 종종 이런 게임들을 즐겨도 괜찮은 건지 고민에 빠지곤 한다.


게다가 그중 다수는 현실의 구체적 부조리를 철저히 왜곡하고 은폐한다. 전쟁과 자본증식에 따르는 민간인의 희생이나 피착취계급의 고통은 게임에서 비본질적인 요소로 간주되어 추상화되거나 삭제된다. 작가나 플레이어의 의도와 관계없이 현상의 멋지고 그럴듯한 일면만이 재현되고 강조된다. 마틴 월러스(Martin Wallace)는 19세기 영국 콘월 지방의 광업을 다룬 보드게임 ‘티너스 트레일(Tinners' Trail)’의 작가 후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무리 복잡한 규칙을 갖추었더라도 게임은 현실의 추상화이다. 이 게임도 예외가 아니어서 많은 ‘역사’를 빼버려야 했다. 대표적인 예로는 다이너마이트의 사용과 갱내 승강기[각주:1]의 발명, 광산 폐쇄에 따른 대량의 실업이 있다.


그렇다고 이런 매체를 규제하거나 검열하는 게 해답일까? 전쟁을 미화하는 영화가 싫다고 전쟁을 소재로 한 영화를 모조리 금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소위 음란물을 규제한다고 성기 노출이나 섹스의 묘사를 일괄적으로 금지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더군다나 현행의 사전 검열 제도는 목적의 정당성을 떠나 표현의 자유를 침해함으로써 수단의 정당성을 결여한 방법이다. 그럼 대안은 무엇일까?


비디오게임에 국한된 이야기지만, 게임도 영화나 만화처럼 국가의 심의와 검열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잠시 화제를 돌려 내가 요즘 즐겨 하는 보드게임[각주:2]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보드게임 역시 어떤 면에서는 비디오게임과 크게 다르지 않아서 전쟁과 돈벌이를 소재로 한 것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드게임은 비디오게임에 비해 대체로 덜 폭력적이고 덜 자본주의적이다. 보드게임이 비교적 ‘점잖은’ 사람들의 취미이기 때문인지, 얼굴을 맞대고 모여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하는 놀이이기 때문인지 이유는 잘 알 수 없지만 말이다. 한번 예시를 들어보자.


독점을 뜻하는 ‘모노폴리(Monopoly)’라는 게임을 들어봤을 것이다. 아마 한국에서 안 해본 사람이 드물 ‘부루마불’의 원조이자 모든 현대 보드게임의 시조격인 게임이다. 하지만 ‘모노폴리’의 전신이 토지사유제를 비판하는 정치적 목적의 게임이었음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리지 매기(Lizzie Magie)는 자본주의적 독점의 폐해와 헨리 조지의 토지공개념 사상을 알리고자 ‘지주 게임(The Landlord’s Game)’을 만들었다. 결국 원작자의 의도와 무관하게 게임이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둬 보드게임 시장을 독점하다시피 한 것은 아이러니다.


물론 이것은 아주 예외적인 경우에 속하고, 오늘날 상용화된 게임의 대다수가 지주 게임처럼 대놓고 ‘이념적’이지는 않다. 그럼 실제로 요즘 보드게이머들 사이에 인기 있는 게임들을 살펴보자. 다음에 소개할 것은 2014년 현재 보드게임긱(boardgamegeek.com) 커뮤니티에서 한 손 안에 꼽히는 순위를 달리고 있는 게임들이다.


황혼의 투쟁 - 지도만 봐도 게임의 방대한 스케일이 느껴지지 않는가?


‘황혼의 투쟁(Twilight Struggle)’은 20세기 중후반 미소 냉전을 배경으로 한다. 탱크나 보병, 전투기 등이 직접 등장하지는 않지만, 정치공작과 쿠데타 기도 등을 통한 양 초강대국의 패권 다툼을 다루고 있다. 그런데 게임이 진행되는 와중에 미소 간의 갈등이 지나치게 고조되어 핵전쟁이 일어나면 게임은 즉시 종료된다. 흥미로운 점은 이유 여하 간에 핵전쟁의 원인을 제공한 쪽이 무조건 패배한다는 사실이다. 작가는 자신이 가장 많이 영향받은 게임 중 하나인 크리스 크로포드(Chris Crawford)의 ‘힘의 균형(Balance of Power)’에 나오는 유명한 문구를 빌려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핵전쟁을 촉발했습니다. 하늘에 나뒹구는 시체 조각들과 버섯 구름 따위의 애니메이션은 제공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실패를 장려하지 않습니다.


‘쓰루 디 에이지스(Through the Ages)’는 특유의 중독성으로 악명(?) 높은 비디오게임 ‘시드 마이어의 문명(Sid Meier's Civilization)’의 보드게임 판이라고 할 만하다. 역사적으로 문명의 발전에서 문화, 정치, 과학 등과 더불어 군사가 빼놓을 수 없는 요소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비디오게임 문명에서 군사의 운용이 게임 플레이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데 반하여, 이 게임에서 침략과 전쟁은 카드 한 장으로 간략하게 표현된다.


작가는 아예 “쓰루 디 에이지스는 침략에 관한 게임이 아니”며 “무력을 통해 게임에서 승리하기는 어렵다”고 밝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사력은 게임에서 여전히 중요한 요소인데, 실제로 전쟁이 일어나지 않더라도 전쟁의 위협이 있는 한 이를 소홀히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마저도 마음에 들지 않는 이들을 배려해서 작가는 게임에서 침략과 전쟁의 요소를 완전히 배제한 ‘평화적인 변형규칙’까지 마련해놓았다.


마지막으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게임인 ‘아그리콜라(Agricola)’는 경제학적 의미의 상품도 없고 화폐도 없는 전(前)자본주의적인 자급자족적 농촌생활을 소재로 한다. 분쟁이나 권모술수의 요소가 없음은 물론이다. 보기 드물게 그야말로 평화적이고 전원적인 테마의 게임이다. 척박한 환경에서 먹고 살기가 워낙 팍팍해서 어떤 의미에서는 그다지 평화적이지만도 않지만 말이다.


아그리콜라 - 게임이 끝나고 알차게 가꿔진 농장을 보면 마음이 뿌듯하다.


그 밖에 처음부터 플레이어 간의 경쟁이 아니라 협력과 공생을 목표로 하는 게임도 있다. 일례로 ‘팬데믹(Pandemic)’에서는 플레이어들이 질병 전문가가 되어 치명적인 전염병으로부터 세계를 구한다. ‘플래시 포인트(Flash Point)’에서는 소방관이 되어 화재를 진압하고 사람들을 구출한다. 최근에는 독일의 어린이 과학잡지 게오리노(GEOlino)가 세계 최초의 ‘녹는’ 보드게임 ‘멜트다운(Meltdown)’을 개발했다. 플레이어들이 북극곰 가족이 되어 얼음이 녹기 전에 안전한 곳으로 가는 게 목적인 협력게임이다.


어쩌면 방금 소개한 게임들에 반영된 시각도 ‘진정한 평화’와는 다소 거리가 있을지 모른다. 그래도 나는 이만하면 진일보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어쨌든 내가 보드게임에서 발견한 것은 ‘작은 희망’이다. 이렇게 말하면 너무 거창할지 모르지만 취미와 문화가 우리의 평화를 옹호하고, 신념과 재미가 상호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양립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했다고나 할까? 이런 평화적인 놀이 문화가 자리 잡기 위해서는 문화 생산자와 소비자 모두의 자발적이고 의식적인 노력이 동반되어야 할 것이다.


취미를 가진 사람의 대개가 그러하듯 나 역시 언젠가는 취미의 소비자가 되는 데 그치지 않고 생산자가 되어 정말 나만의 게임을 만들고픈 욕심이 있다. 여기에 내가 생각하는 평화의 관점까지 담을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그래서 틈틈이 게임을 만들고 있는데 아직 구색을 갖춘 것은 별로 없다. 솔직히 ‘오적(五賊)’이나 한강의 기적 같은 제목의 게임이 출판될 수나 있을지 의문이지만, 언젠가 이 게임들이 빛을 볼 수 있길 바란다.


  1. 1919년 레반트 광산에서 노후한 갱내 승강기(man engine)가 붕괴되어 광부 31명이 목숨을 잃는 사고가 발생했다. 그 밖에도 1846년 이스트휠로즈에서 침수로 39명이 익사하는 등 콘월 지역에서만 여러 번의 광산 사고가 있었다. 20세기 초까지 미국에서만 매년 천 명 이상이 광산 사고로 사망했다. [본문으로]
  2. 보드게임이란 비디오게임과 달리 앉은 자리에서 놀이판과 말, 주사위, 카드 등 물리적인 도구를 주로 사용하여 진행되는 놀이를 말한다. 넓게 생각하면 명절에 하는 화투나 윷놀이도 보드게임의 일종이다. [본문으로]
Posted by 人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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