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해 보겠습니다.

 

 

고통 없이 죽는다면

 

멸종이란 말은 그 자체로 어딘가 매력적이다. 죽음만이라도 평등할 수 있다면, 그래서 고통의 토양 자체를 없앨 수 있다면. 어쩌다 운이 좋으면 리셋이 될지도 모른다는 착각. 버티기 힘든 불안한 삶에 멸종은 마지막으로 꿈꿀 수 있는 행복한 파멸이다. 가장 완벽한 디스토피아적 유토피아.

멸종이란 단어 자체에 매혹을 느낀다면 <EBS 다큐10+ 지구대멸종> 시리즈를 보자. 그 중에도 제3[백악기의 소행성 충돌]을 꼭 챙겨보길. <지구대멸종> 시리즈는 지구 역사에 존재했던 5번의 대멸종을 다루는데 그 양상을 매우 구체적으로 묘사한다. CG기술 발달로 멸종의 순간은 초단위로 생생하게 재현된다. 그 중에서도 공룡이 사라졌던 백악기 대멸종에 대한 묘사는 멸종 판타지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반경 10km가 넘는 거대한 운석이 총알보다 20배 빠른 속도로 날아와 지구와 충돌한다. 숫자를 동원한 각종 비유가 파멸의 크기를 가늠하게 해준다. 멕시코만을 강타한 충돌로 48km 깊이의 구덩이가 발생하고 수소폭탄 1억 개에 해당하는 에너지가 발생한다. 반경 160km 안에 있는 물이 모두 증기로 변한다. 바위는 부서지는 과정을 건너뛰고 곧바로 기화된다. 음속보다 빠른 충격파가 북미 대륙으로 퍼져나간다. 인류역사상 경험한 적 없는 진도 13의 강진이 발생한다. 시속 960km에 달하는 쓰나미가 동심원 형태로 지구 전역으로 퍼져 나간다. 음속과 맞먹는 속도다. 파도 높이는 300미터에 이른다. 나래이션이 정점을 찍는다.

고통 없이 일찍 죽는 것이 오히려 운이 좋을 상황이다.”

 

충돌 지점 반경 400km안의 모든 생명체는 죽음을 인지하기 전에 사라졌다. 죽음의 순간을 계획할 수 있다면 가장 매혹적인 선택이 아닐런지.

 

삶을 산다는 것, 살아갈 뿐이라는 것

 

차라리 전쟁이나 나버려라. 그냥 다 망해버렸으면 좋겠다는 자조가 넘쳐난다. 넘쳐나는 말은 관용어가 되면 그 다음부터 의미가 변형된다. 망했다는 말이 일상이 되면 정말 망했음을 표현할 말이 빈약해진다. 망했다는 말로는 망했음을 표현할 수 없는 세상에서는 더 처절하게 망했음을 표현할 말들이 필요하다. 멸종이나 멸망은 이런 맥락에서 망했다는 말보다 더 망했음을 표현한다. 그런데 멸종에 대한 환상을 산산조각내는 소설, 망했는데도 계속 살아보라는 소설이 있다. 황정은 <계속해 보겠습니다>.

 

살려는 의욕이 제로에 가까운 엄마 애자가 있다. 이름 그대로 사랑을 위해 태어났던 종족, 그리고 사랑이 사라졌을 때 삶도 사라진 종족. 애자는 남편 김금주가 공장 톱니바퀴에 말려들어 죽고 난 후 멸망 상태에 돌입했다.

 

애초 반대하던 결혼이었고 이쪽엔 제사 지낼 아들내미 하나 없으므로, 라는 명목으로 사고 합의금을 친가 쪽에서 받아갔고, 애자도 생활에 별 열의가 없어서 애자와 나나와 내겐 금전적인 여유가 없었다. 아버지와 살던 집의 계약이 끝나 집을 비워줘야 할 때가 되었는데 애자는 짐도 꾸리지 않고 나날을 생각에 잠겨 보내고 있었다.

 

죽고 나면 그뿐, 이라면서 세계엔 원한이 가득하다고 애자는 말한다.

 

아빠는 죽었고 엄마는 죽은 듯 산다. 따라서 자매 소라와 나나는 선택의 여지없이 서로 의지하며 살아야 한다. 둘 사이 끼어든 또 다른 존재. 옆 집 사는 나기와 나기 엄마 순자. 요양원에 맡겨진 애자를 빼고 나면 이들 넷은 두 집이지만 한 식구처럼 유사가족을 형성하고 산다. 두 집은 지하에 나란히 붙어 있고 화장실을 공유한다. 소라와 나나는 순자의 도시락을 먹으며 성장하고 나기는 그 둘에게 연인인지 가족인지 혹은 그 사이 무엇인지 규정하기 어려운 관계 속에 위치한다.

 

주로 소라와 나나 이야기가 중심인 소설 속에서 삶은 예상대로 고통의 연속이다. 산재 그리고 계속 이어지는 인재. 삶도, 사람도 다 괴로울 뿐인 세상이다. 그리하여 무언가를 싫어할 에너지조차 남아 있지 않은 상태. 삶은 무욕하며 단지 살아낼 뿐인 시간의 집합체다.

 

나는 사람과 접촉하는 게 싫었다. 닿는 것은 싫다. 닿아도 괜찮은 것은 나나와 나기뿐, 나나와 나기뿐이고, 나나와 나기는 그것을 잘 알지. 그것을 잘 아는 나기에게 섹스를 한 지도 일년이.....라고 말해봤자.

 

나는 나나. 나나는 나. 좋아하는 것보다도 싫어하는 것보다도 좋아하지 않는 것이 잔뜩 있습니다.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결국은 비등한 에너지의 소요. 이것저것을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좋아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나기의 삶도 고통스럽기는 매한가지다. 고등학교에서 나기는 소위 왕따였고 동성애자였는데 사랑했던 사람은 자신을 괴롭히는 무리의 중심에 있었다. 나기는 끊임없이 배신당하는 관계 속에서도 사랑을 놓지 못하고 자기혐오를 키우며 성장했다.

 

자신들에게 맞고 있는 몸이기 때문에 혐오했을 것이고 때릴수록 맞고 있는 그 몸에 관한 혐오는 불어나 더욱 때렸을 것이다. 맞아도 맞아도 상황은 끝나지 않을 것처럼 여겨졌다.

너는 개입하지 않았다. 보태지도 않고 말리지도 않았다. 너는 삼분의 일쯤 타다 남은 소파에 앉아 잡지를 읽었다. 나는 너를 보았다. 맞아가면서도 언제나 보는 것처럼 너를 보았다. 이런 순간에도 나를 바라보지 않는 너를 열망하고 원망했다.

 

특별히 살아갈 이유도, 살지 말아야 할 이유도 없었던 소라와 나나와 나기는 한 공간에서 만나 서로를 지탱시켜주는 힘이 된다. 꼬맹이 때부터 서로 아빠가 없다는 사실에 안도할 만큼 셋은 너무 일찍 성장했다. 이들에게 순자의 존재는 각별하다. 순자는 소라와 나나를 만난 순간부터 세 개의 도시락을 쌌다. 도시락은 상징적이다. 근본적으로 인생은 혼자라는 진리를 체득했지만 적어도 부족연맹체 같은 유대감 속에서 안도했고 덕분에 삶은 지속되었다.

 

나나와 나는 소중하게 그것을 먹었다. 성장기였으므로 그 밥을 먹고 뼈가 자랐을 것이다. 뼈에도 나이테라는 것이 있다면 나기네 밥을 먹고 자란 시절의 테가 분명 있을 것이다.

 

봐 이 공간에 셋뿐인데 이렇게 다르잖아. 간장을 좋아하냐 좋아하지 않냐, 하다못해 그런 질문에도 답이 다르잖아. 다 달라. 사소하게도 다르고 결정적일 때도 다르지. 말하자면 나는 간장에 무덤덤한 부족, 소라는 간장을 좋아하는 부족, 나나는 간장을 싫어하는 부족.

 

갈등은 동생 나나가 임신을 하면서 시작된다. 소라는 애가 싫다. 애를 만드는 게 싫다. 나나가 애자와 같은 엄마가 된다는 사실이 싫다. 가족을 늘리는 게 싫다. 관계가 늘어나는 게 싫다. 세대가 이어지고 그 세대로 감정이 전달된다는 게 싫다.

 

아기를 낳는다는 것은 엄마가 된다는 것이고 엄마가 된다는 것은 애자가 되는 것. 회로가 그렇게 꼬여 있다. 생각이 아니고 심정의 영역에서. 그러므로 애초에 아기는 만들지 않는 게 좋다. 아기를 낳지 않는다면 엄마는 없지. 엄마가 없다면 애자도 없어. 더는 없어. 애자는 없는 게 좋다. 애자는 가엾지. 사랑스러울 정도로 가엾지만, 그래도 없는 게 좋아. 없는 세상이 좋아. 나는 어디까지나 소라. 소라로 일생을 끝낼 작정이다. 멸종이야. 소라, 라는 이름의 부족으로.

 

무감한 사람은 괴물이 된다

 

멸종이야 소라.

소라는 진짜 멸종을 꿈꾸지는 못하지만 자기 대에서 관계를 소멸시키려 한다. 그것이 소라에게는 작은 멸종이다. 그런데 나나가 그 기본 전제를 깨려 한다. 나나는 건조한대로 사랑을 시도하고 애를 낳으려 한다. 많은 것을 바라지 않지만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가족을 만드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사랑에 관해서라면 그 정도의 감정이 적당하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이윽고 괜찮아지는 정도. 헤어지더라도 배신을 당하더라도 어느 한쪽이 불시에 사라지더라도 이윽고 괜찮아, 라고 할 수 있는 정도. 그 정도가 좋습니다. 아기가 생기더라도 아기에게든 모세씨에게든 사랑의 정도는 그 정도, 라고 결심 해두었습니다. 애자와 같은 형태의 전심전력, 그것을 나나는 경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새롭게 우리를 만드는 일은 생각보다 고통스럽다. 모세는 성역할 구분이 분명한 보수적 환경에서 자랐고 나나는, 이를테면 요강을 쓰는 사람은 모세 아버지인데 왜 항상 모세 어머니가 요강을 비워야 하는지에 대해 납득하지 못한다. 그 질문을 던졌을 때 무엇이 문제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모세도 납득할 수 없다. 모세 어머니가 아무렇지도 않게 사주를 위해 날짜에 맞춰 수술하고 애를 낳아야 한다는 말도 마찬가지. 요컨대 나나에게 새롭게 다가오는 관계는 폭력적이었다. 남의 감정이나 고통 같은 것은 생각하지 않는 예의 없는 관계는 그 자체로 폭력이다. 나나 자신도 그런 폭력에 둔감할 때가 있었다. 나나에게 무감한 사람은 괴물이 된다고 가르쳐 준 것은 나기다.

 

그 시절에 나나는 작은 동물을 괴롭히며 놀았습니다. 강아지, 고양이, 햄스터, 드물게 기니피그. 꼬리를 밟아본다거나 발바닥을 찔러본다거나 가슴을 눌러본다거나, 괴롭혀서 즐겁다거나 괴롭다거나 도대체 뭘 느끼는 것도 없으면서 멍하게 괴롭혔습니다.

 

아파?

오라버니는 물었습니다.

고개를 끄덕이자 기억해둬, 라고 오라버니는 말했습니다.

이걸 잊어버리면 남의 고통 같은 것은 생각하지 않는 괴물이 되는거야.

 

나나는 헤어지기로 결심한다. 혼자서 애를 키워보려 한다. 이별을 통보받은 모세는 나나를 찾아온다. 흥분한 나머지 나나를 힘으로 제압하고 어째서 헤어지려는 것이냐, 애는 어떻게 하려고 하느냐 따진다. 어깨를 제압당하고 목을 졸린 채 나나는 혼미한 정신상태에서 손을 휘둘러 모세의 빰을 할퀸다. 그리고 때마침 소라가 나타난 덕분에 모세의 손아귀에서 풀려난다. 눈물을 흘리며 언니를 외치는 나나.

멸종은 멸종해가는 과정 그 자체

 

지구 나이는 45억 살 정도 된다. 대략 6억 년 전에 맨눈으로 볼 수 있는 크기의 생물들이 나타났다. 23천만 년 전에 공룡이 등장했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200만 년 전에 등장했으며 현생 인류는 20만 년 전에 나타났다. 급격하게 종이 줄어드는 대멸종은 지금까지 다섯 번 있었다. 가장 심각했던 페름기 대멸종 때는 90%가 넘는 종이 사라졌다. 공룡 멸종으로 유명한 백악기 말 멸종 때는 공룡 100%, 조류 95%, 포유류 90%가 사라졌다. 덩치가 클수록 많이 죽었는데 육지에서 체중이 25kg을 넘는 종은 모두 사라졌다. 지금까지 지구상에 존재했던 생명체 중 99%는 멸종했으며 평균 생존기간은 500만 년이다. 숫자는 때로 그 어떤 설명보다 간명하고 직관적이며 압도적이다.

멸종은 보편적 현상이다. 모든 종은 언젠가 사라진다. 단순하고 명쾌하다. 하지만 멸종의 국면에 대해서 우리는 생각보다 아는 게 별로 없다. 마치 달력 페이지를 넘기듯 한 시대에서 다른 시대로 훅 넘어간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달력을 찢어 버리면 뭐가 됐든 새 페이지가 열린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멸종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우리 몸이 쇠락 국면을 거쳐 죽어가는 것처럼 수많은 멸종이 말해주는 바, 멸종은 멸종해가는 과정 그 자체다. 그리고 그 과정은 짧아도 수천 년, 길게는 수십만 년도 더 걸린다. 우리에게 멸종은 순간 사라짐이라기보다는 지속되는 매드맥스 와도 같다. 거부할 수 없는 재해가 닥쳐 인간이 멸종 국면에 들어서면 어떻게 될까? 모든 능력과 자원을 동원하여 최후의 일인이 사라질 때까지 멸종은 고통스럽게 오랜 동안 지속될 것이다. 멸종 국면에 이르러도 죽음은 결코 평등하지 않다. 지구의 역사가 숫자로 말해주는 진실이다.

 

나는 예전엔 이런 뉴스를 들으면 지구가 망하나보다, 그렇게 생각하고 별다른 감상이 없었거든. 그런데 요즘엔 그렇게 생각할 수가 없어. 아기가 태어났는데 세상이 그렇게 끝나버리면 너무 억울하잖아. 모처럼 낳았고 모처럼 태어났는데 그냥, 세계가 끝나버린다면.

 

나는 말했다.

공룡이 사라졌잖아.

.

멸종했잖아.

멸종했지.

멸종이라서 한순간에 사라져버린 것 같지만 실은 천만년이 걸렸대.

그랬대?

천만년에 걸쳐 서서히 사라진 거야.

꽤 기네.

길지.

......

그렇게 금방 망하지 않아.

세계는, 하고 덧붙이자 나나가 말했다.

그렇게 길게 망해가면 고통스럽지 않을까.

단번에 망하는 게 좋아?

아니.

그럼 길게 망해가자.

망해야 돼?

그렇게 금방 망하지는 않겠다는 얘기야.

 

다시 멸종을 생각한다. 멸종이라는 진통제로 현실에 닥친 고통을 잊어보려 하지만 그렇게 고통에 둔감해지고 나도 남는 것은 여전히, 그냥 다시 현실이다. 그러니 서로의 고통을 외면하려 하기보다는 같이 아파하는 마음을 놓지 않도록. 그래서 금방 망하지는 않을 테니 뭐라도 꿈꿔볼 수 있는 힘을 계속 지켜낼 수 있도록.

 

Posted by 칸나일파

 

위에서 아래로 떨어진다, 낙하한다, 추락한다.

 

일반적으로 사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떨어진다, 낙하한다, 추락한다. 이 동사들은 부정적인 상황에서 자주 쓰인다. 매력이 떨어진다, 지위가 추락한다 등등. 떨어지면 보통은 아프다. 언어보다 몸이 먼저 안다. 그리고 개념은 언어로 완성된다. 보통은 떨어진다는 말과 함께 위와 아래라는 방향성을 동시에 인지한다. 그런데 위에 있는데 떨어지지 않는 것들도 있다.

실험이나 관찰이라는 개념이 없던 시절에 인류는 자연현상이 신 자체거나 신의 행위라고 생각했다. 설명이 체계적으로 발달하면서 종교가 된다. 여기에 초보적인 인과관계와 관찰이 더해지면서 상상훈련을 하기 시작하고 논리를 덧댄다. 자연철학의 탄생이다.

인류가 처음 생각한 지구와 우주는 어떤 모습일까? 상상훈련을 해보자. 나는 처음으로 지구와 우주의 구조를 생각하는 호모 사피엔스다. 세상에 대한 인식은 내가 서 있는 여기를 중심으로 동심원 모양으로 퍼져나간다. 이동수단이 발달하면서 동심원은 점점 커질 것이다. 그러나 이동수단의 발달은 더디다. 지금 동심원의 크기는 크지 않다. 세상의 끝은 내 인식이 닿는 한계보다 조금 더 멀리 있는 정도다. 보통은 내가 가보지 못한 강이나 산 너머. 그곳에는 어떤 절대적인 두려움이 존재한다. 그 존재는 말에서 말로 전해져 올 뿐이다.

아직 지구가 둥글다는 것은 상상조차 힘들다. 그리고 머리 위로 해와 달이 뜨고 진다. 온갖 별들이 움직인다. 이들의 움직임을 이해하려면 꽤 많은 시간이 흘러야 한다. 그런데 왜 높은 곳에 있는 별은 떨어지지 않는 것일까?

 

별은 우리 머리 위에 있는데 왜 떨어지지 않는가?

 

그리스식 세계관은 실험보다는 상상훈련에 기초해 있고 이것을 고상하게 말해 자연철학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 토대에는 수학이란 고도의 논리학과 형이상학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스 자연철학은 밑도 끝도 없는 주장도 부지기수지만 근대 과학이 이룩한 수많은 업적 중에는 그리스 자연철학에 뿌리를 둔 것도 매우 많다. 그리스 철학은 사고의 원형을 모아 둔 잡다한 만물백화점이었다.

떨어진다는 단순한 현상 하나만 놓고 봐도 질문이 산더미다. 왜 어떤 것은 떨어지고 어떤 것은 떨어지지 않는 것일까? 사물을 떨어지게 만드는 원인은 무엇인가? 모든 사물은 똑같은 속도로 떨어지는가? 이 숱한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은 생각보다 험난하다. 천재들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무거운 물체가 가벼운 물체보다 빨리 떨어진다고 했다. 중력에 대한 학습이 없으면 이렇게 생각하기 쉽다. 확실히 돌은 깃털보다 빨리 떨어진다. 그런가하면 세상은 물, , , 공기 4원소로 구성되어 있는데 돌이 빨리 떨어지는 이유는 돌이 흙으로 구성되어 있어 본래 자기가 속한 곳으로 돌아가려는 속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역학이론은 갈릴레이에 이를 때까지 2천 년간 서양세계를 지배했다.

영화 <아고라>에 보면 그리스의 시대정신이 저물어가는 황혼녘에 한 시대의 몰락을 함께했던 수학자 히파티아가 등장한다. 영화는 히파티아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서 제자들과 토론을 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어째서 별은 떨어지지 않는가? 별은 달아나지도 떨어지지도 않으며 이상적인 형태의 경로를 따라 동서로 움직인다. 바로 원이야. 원으로 움직이는 한 별은 절대로 떨어지지 않아.”라고 말한다. 별들의 운동에 수학적인 질서가 숨어 있다고 믿었던 그리스인들은 원이 가장 이상적인 도형이기 때문에 별들이 원운동을 한다고 생각했다. 토론은 이어진다.

 

그런데 지구에서는 어떨까? 물체는 떨어지면서 원이 아닌 직선을 그린다. 대체 지구 내부 무슨 조화가 사람이든 사물이든 노예든 상관없이 전부 아래로 잡아당길까?”

무거워서겠죠. 아니 중량 때문에?”

근본 원인을 말해야지 궁금해본 적 없나? 여러분의 발바닥이 만물을 지탱하고 끌어당기는 우주의 중심을 향하고 있는 까닭? 중심이 없다면 우주는 모양도 실체도, 끝도 없는 혼돈일 거야. 그렇게 세상이 아수라장이라면 아니 태어남만 못해.”

 

현대인들은 물체가 떨어지는 현상이 중력(gravity)에 의한 잡아당김이란 걸 잘 안다. 떨어진다는 건 관찰자인 인간의 관점이고 객관적 사실은 지구가 물체를 지구 중심방향으로 잡아당기는 것이다. 뉴턴이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며 중력을 알아냈다는 일화는 사후적으로 지어낸 이야기이다.

어쨌거나 중력의 발견은 세상을 인식하는 새로운 눈을 달아준 격이었다.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이, 티코 브라헤, 케플러, 헬리, 뉴턴 등등에 이르기까지 이 익숙한 이름들이 등장하는 시기를 과학혁명이라 부른다. 과학혁명은 근대를 여는 핵심 키워드 중 하나다.

 

<낙하한다>

 

성석제 소설 <내 인생의 마지막 4.5>에는 별의 회전운동 원리를 설명하는 대목이 나온다. 돌을 세게 던져 초속 7.9km가 되면 돌은 땅에 떨어지지 않고 지구를 빙빙 돌게 된다. 조금 더 세게 던져서 11.2km가 되면 돌은 지구를 벗어나게 되고 16.7km를 넘으면 태양계를 벗어날 수 있다.

이 설명은 뉴턴의 사고실험과 일치한다. 뉴턴은 아주 높은 산에서 대포를 쏘는 상상을 했다. 너무 약하게 쏘면 포탄은 중력에 의해 다시 지구로 떨어질 것이다. 너무 강하게 쏘면 포탄은 지구 중력을 벗어나 우주로 날아갈 것이다. 정확히 그 중간 정도의 힘으로 쏘면 포탄은 지구 주위를 빙글빙글 돌게 될 것이다. 결국 떨어지는 것도 떨어지지 않는 것도 모두 중력 때문인 것이다.

 

황정은 소설 <낙하한다>는 이렇게 시작된다.

 

떨어지고 있다.

삼년은 지났을 것이다.

 

그리고 소설은 이렇게 끝난다.

 

조금도 빨라지지 않았다. 좀 전과 같은 속도로 떨어진다.

삼년 전과 같은 속도로 떨어진다.

농담이 아니다.

떨어지고 있다.

상승하고 있다.

 

구체적인 시공간은 나오지 않는다. 왜 떨어지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이야기랄 것도 별로 없다. 단지 떨어지면서 시작했고 여전히 떨어지면서 끝이 난다. 그런데 더 정확히는 떨어지는 게 아니라 부유하고 있는 것이다. 무중력 공간 속에서.

영화 <그래비티>는 무중력 상태가 불러오는 공포를 너무나 생생하게 시각적으로 재현했다. 그것은 떨어지는 것보다 훨씬 업그레이드 된 우주적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외롭고, 막막하며, 무엇보다 출구가 없다. 이 소설은 그런 소설이다. 외롭고, 막막하며, 출구가 없다. 소설은 시작도 끝도 없는 우주적 공포를 재현한다.

출구 없는 무중력 공간에서 떨어지는 것인지 상승하는 것인지조차 알 수 없을 때 우리는 차라리 무언가에 부딪치고 싶다는 상상을 하게 된다. 어떻게든 이 상황이 바뀌기를 바라며.

 

외롭고 두려운 것도 관성이 되었다.

관성적으로 외롭고 두렵다.

외롭고 두렵고 무엇보다도 지루하다.

떨어지고 떨어지고 떨어진다.

어디든 충돌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삼년째 떨어지고 있으니 슬슬 어딘가 충돌해도 좋을 것이다. 부서지더라도 충돌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출구 없는 우주를 부유하는 시대의 소설

 

소설은 의도와 무관하게 시대적 상황 속에 놓여 있다. 이 소설은 20년 전에만 나왔어도 아무런 공감대를 불러일으키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 20년 전이라면 이런 소설이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이 소설은 우주적 외로움을 공감할 수 있는 시대에만 나올 수 있다. 우주적 외로움과 공포가 뭔지, 왜 맥락 없이 주인공은 무중력 공간에 떨어져 있는 것인지 공감할 수 있을 때 나올 수 있는 소설이다. 나쁜 놈도 없다우리는 그저 재난에 처한 심정이 되어음 그냥 재난에 처한 심정이 된다뭘 어쩌자는 게 아니라<낙하한다>는 그런 소설이다입구도 출구도 없는 고통과 외로움에 대해 말하는 소설이다.

일정한 거처도 안정적인 수입도 뚜렷한 탈출구도 없는 수많은 이들의 고단한 삶이 떠올랐고 무엇보다 세월호가 떠올랐다. 오늘날 재난은 어느 날 사기를 당해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그런 종류의 재난이 아니다. 실수 따위와는 무관하게 공기처럼 존재한다. 그리하여 재난 자체가 일상이 되고, 재난이 관성이 되는. 눈보라 맞으며 광고판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어도, 어느 날 아파트 관리인이 비인간적 처우를 하소연하며 스스로 목숨을 던져도 집값 걱정을 하는, 이 세상이 재난이다. 재난은 이제 시스템 그 자체이다. 재난은 무중력 상태 우주처럼 도처에 압도적으로 펼쳐져 있다

내가 속한 좌표를 알 수 없고, 그리하여 앞으로 가는 것인지 뒤로 가는 것인지 심지어 떨어지는 것인지 상승하는 것인지도 알 수 없는 우주적 공포. 출구가 있다면, 방향이 있다면 누군가는 주장을 할 것이다. 저리로 가자고. 하지만 누구도 자신 있게 출구를 말하지 않는다. <낙하한다>는 방향감각을 상실한 시대의 소설이다.

낙하하는(상승하는) 내내 주인공 는 공상을 한다. 그러나 그 공상도 완결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단지 에피소드 몇 개에 불과하다. 그 에피소드 속에 방이 등장한다. 그 방에는 개수대가 있는데 개수구멍이 없다. 문도 없다. 시계도 없다. 한마디로 진공 상태다. 구체적인 시공간이 없다. 내부와 외부가 없다. 공상조차 시작도 끝도 없는 지옥이다. 그런데 주인공이 끊임없이 되뇌이는 문장이 하나 있다.

 

세 개의 점이 하나의 직선 위에 있지 않고 면을 이루는 평면은 하나 존재하고 유일하다.

 

이 문장은 고등학교 2학년이 공간도형을 배울 때 제일 처음에 등장하는 간단한 수학 명제다. 공간에 세 점을 찍어보라. 그 세 점을 지나는 평면은 유일하게 하나 존재한다. 세 점이 한 직선에 있을 때는 예외다. 카메라 삼각대나 향을 피우는 향로가 다리가 세 개인 이유다. 어떤 지형에서도 다리가 뜨지 않는다. 반면 다리가 네 개면 이야기가 다르다. 바닥이 고르지 않은 상태에서 세 다리를 고정하면 하나가 뜬다. 네 점을 지나는 평면은 없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책걸상을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수학 공식처럼 분명할수록 거짓말처럼 들리는 시대다. 위아래조차 분간할 수 없는 곳인데 하물며. 주인공은 이 문장이 애매하다고 말한다. ‘하나라는 단어가 두 번 들어간 것도 맘에 들지 않는다. 그런데 계속 되뇌인다. 계속 되뇌이다보면 외로운 것도 애매해질지 모른다고.

주인공 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장면은 지하철역이다. 지하철역에서 만난 아주머니가 출구를 물어보고 대답해주는 장면, 그게 전부다. 그런데 아주머니가 건넨 마지막 말은 이것이었다. 동시에 주인공이 기억하는 마지막 말이기도 하다.

 

친절하게 대답해줘서 고마워요.

 

친절, 대답, 고마움. 우주적 공포 속에서 기억해낸 세 단어. 진공상태에서는 음파도 반사되지 않는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그래서 대답이란 우리에게 방향감각을 일깨워주는 말. 현실에서 출구는 이렇게 간단한 것이지만, 그렇지만

Posted by 칸나일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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