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버배치'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15.03.06 <이미테이션 게임> 천재 서사를 넘어서는 새로운 독법 2

25년 전쯤 초등학교에서 베이직(Basic)이란 컴퓨터 언어를 가르치는 게 반짝 유행했었다. 나도 잠깐 그 유행에 합류해 난생 처음 컴퓨터를 만져보았다. 막연히 정보통신 시대가 온다, 곧 컴퓨터가 세상을 지배한다 어쩐다 했으나 대부분 그걸 배워서 어디다 써먹어야 할지 모르던 때다. 게다가 집에는 컴퓨터도 없었다. 당시에는 상당한 고가였던 탓에 컴퓨터를 가진 애들이 별로 없었다. 그나마도 대부분 값비싼 골동품처럼 모셔져 있었다. 언제 올지 모르는 미래는 대다수 사람에게 실질적인 미래가 아니다. 그래서인지 그 어떤 긴장감도 불러일으키지 않는 방과 후 수업이 좋았다. 지적인 느낌을 물씬 풍기는 예쁜 선생님을 보는 것도 좋았고 부팅될 때나 5.25인치 디스켓을 읽을 때마다 나는 끼르륵 끼르륵 소리도 듣기 좋았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스무 살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내 컴퓨터를 가질 수 있었다. 전화선으로 pc통신을 하던 시절이었고 인터넷이 상용화되니 마니 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니 70~80년 전에 컴퓨터 같은 것을 고안한 사람을 천재라고 부르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것이 말 그대로 computer, 즉 단지 계산을 빨리 해주는 정도의 기계라 해도 말이다. 앨런 튜링은 컴퓨터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컴퓨터의 아버지도 아니고 할아버지쯤으로 불릴만한 인물이다.[각주:1] 그런데 영국 비밀정보기관 밑에서 일했던 전력이 오랜 동안 베일에 가려져 있던 탓에 할아버지 대접을 받지 못했다. 게다가 동성애를 불법으로 간주했던 어두운 시대 상황 때문에 전반적으로 저평가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순수학문 성향이 강한 수학의 관점에서 기계 개발에 몰두했던 튜링에게 높은 점수를 주기 애매한 부분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그는 엄청 똑똑했다.

 

<이미테이션 게임>은 단순한 천재 서사인가?


<굿 윌 헌팅>, <박사가 사랑한 수식>, <뷰티풀 마인드>에 이어 <이미테이션 게임>까지 몇 안 되는 작품이지만 수학자 영화는 나름대로 경향성을 갖고 있다. 괴팍하고 영리한 수학자가 있다. 그 수학자는 남자다. 집중력은 뛰어나지만 사회성은 극도로 떨어져 자의반 타의반 혼자 지내는 시간이 대부분이다. 그들은 왕따거나 은둔자다. 세상과의 불화가 심할수록 주인공의 천재성은 더욱 빛이 나고 극적인 반전이 주는 카타르시스도 커진다. 그를 초라하게 만드는 것도 수학이지만 끝내 그를 위대하게 만드는 것도 수학이다.  

<이미테이션 게임>도 상당 부분 전형적인 천재 서사를 따라간다. 튜링은 학창시절 내내 왕따였다. 어머니조차 튜링을 별난 사람(odd duck)이라고 말한다. 사회생활 역시 마찬가지로 동료들과 관계는 계속 겉돌기만 한다. 하지만 멘토가 등장하고 동료들이 튜링의 천재성을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국면이 바뀌고 튜링은 엄청난 성취를 이뤄낸다. 전 영화들과 차이라면 자살로 마무리된다는 정도인데[각주:2] 이 비극적인 결말조차 튜링의 천재성을 더욱 도드라지게 만든다.

셜록에서 튜링으로 이어지는 필모그래피 덕에 컴버배치에게서는 의심할 수 없는 어떤 천재성마저 느껴질 정도다. 바닥에서 무언가를 골똘히 조사하고 있는 컴버배치가 등장하는 순간 사람들은 셜록 비슷한 천재의 등장을 직감한다. 다만 대화를 나눌 때 상대를 정면으로 응시하지 못하는 이 천재에게 무엇이 부족한지도 동시에 알게되겠지만 말이다.

결핵으로 사망한 튜링의 고등학교 친구이자 첫사랑 크리스토퍼와 관계 역시 마찬가지다. 크리스토퍼는 튜링의 유일한 숨구멍이다. 반에서 1, 2등 하는 애들끼리 수학 문제를 풀며 사랑을 나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의 귀족적 동성애를 떠올리게 한다. 튜링이 게이였다는 사실도 희귀성에 희귀성을 더하는 기능을 한다. 섹스 없이 수학이란 언어로 소통하는 멘토 조안과 관계 역시 같은 맥락을 강화한다.


때로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아무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을 해내거든.


크리스토퍼가 튜링에게 전했고, 튜링이 다시 조안에게 전한 이 말은 세상으로부터 이해받지 못하는 천재들의 자기위로다. 전반적인 설정이 천재 서사를 강화한다. 천재 서사에서 관객이 보이는 반응의 최대치는 다른 삶에 대한 연민이다. 관객은 영화 속 주인공이 나와 다르지만 틀린 것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는데 만족한다. 그런데 어찌 보면 신기한 일이다.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암호해독을 다룬 영화인 데다 주인공이 게이라는 점까지 고려하면 첩보영화, 반전영화, 퀴어영화 등 복합적 요소가 결합된 텍스트이고 사회성이 강한 영화인데 한결같이 천재 서사로만 읽어내는 분위기가 말이다.


전쟁이란 시스템 속에서 갈등하는 기능적 지식인


<이미테이션 게임>을 읽어내는 또 다른 중요한 축은 강력하게 설정된 진영논리 속에서 허우적대는 개인이다선악구도는 비교적 선명하게 설정되어 있다. 2차 세계대전에 대한 관점이 대체로 그렇듯 나치라는 절대악의 설정은 가치판단을 쉽게 만든다. 하지만 선악구도가 분명하게 설정된 경우조차 전쟁에서 승리가 기쁘게 느껴지는 경우는 별로 없다. 전쟁과 같은 거대한 시스템 속에서는 무엇이든 왜곡된다. 가치중립적이라고 믿는 지식을 통해 지식인은 전쟁의 일부로 기능한다. 이런 시선으로 바라보면 천재가 아닌 전혀 다른 서사가 드러난다. 거대한 시스템 속에서 갈등하는 기능적 지식인은 지금 우리 주변에도 아주 흔하다.  


자네 대체 왜 정부 쪽 일을 하려 하는가?

오 하고 싶지 않는데요.

자네 그 망할 평화주의자라도 되나?

저는 폭력에 대해서는 불가지론자입니다. 

자네도 알고 있겠지. 런던에서 100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히틀러라는 망할 놈이 유럽 전체를 삼키려 하고 있다는 것을?

정치는 제 전공이 아닌데요. 


튜링에게 중요한 건 독일이 만든 '에니그마'라는 암호생성 기계와 벌이는 게임에서 승리하는 것이다. 모두가 퍼즐풀이에 열중하고 있을 때 튜링은 에니그마를 능가할 기계를 설계하고, 직접 제작하고, 오류를 수정하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그 기계에 '크리스토퍼'라는 이름을 붙인다. 

이 상황을 이해못하는 동료나 군 입장에서 튜링은 불편하고 짜증스런 존재다. 소련의 스파이로 의심받기도 한다. 하지만 규칙을 배워가며 응용하고 뒤틀기도 한다. 정치적 거래를 하기도 하고 내부규율을 어기기도 한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튜링은 전쟁의 일부로 기능하게 된다. 암호해독에 성공한 후에도 전쟁을 단축시키기 위한 전략짜기에 고심하고 전반적인 상황을 호전시키기 위해 어쩔 수 없는 희생을 감내하기도 한다. 그는 점점 더 자주 갈등한다. 


천재 서사만으로 영화를 보면 이 모든 상황은 형해화되고 개인은 탈역사화 된다. 외골수 천재가 이룩해낸 성취라는 서사는 전쟁이라는 거대한 흐름의 향방이 몇몇 천재 사이에 벌어지는 경쟁의 결과에 따라 달라지며 역사도 이와 같은 식으로 흘러간다는 영웅주의를 강화한다. 그러나 전쟁은 몇몇 영웅들에 의해 좌지우지 되었다기 보다 오히려 이해불가능한 다양한 상황과 갈팡질팡 고뇌하는 수 많은 개인들을 만들어냈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전쟁을 빨리 끝내고 싶지 않느냐, 너는 어느 편이냐, 영국을 위하지 않느냐는 등 튜링이 공격을 받는 상황은 충분히 예상 가능하고 또 그래서 누구라도 그 상황에서 처할 수밖에 없는 근본적 물음들을 던지게 한다. 


앨런 튜링은 어떤 이데올로기도 받아들인 적 없다는 식으로 자신을 이해한다. 하지만 폭력에 대해 그가 보여주는 성찰은 단순하지만 날카롭다. 


사람들이 왜 폭력을 좋아하는지 알아요?

그건 바로 기분이 좋아지기 때문이죠. 

하지만 그 쾌감을 제거하고 나면 폭력의 결과는 공허하죠. 


단순히 천재가 하는 말이 아니다. 이것은 전쟁 한가운데 놓인 인간의 말이다. 동시에 튜링은 가상 세계와 현실 세계, 인간다운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영화 속 현실과 실제 현실의 경계를 뒤흔든다. 

  

튜링이란 존재 자체가 복합적 텍스트


영화 제목이기도 한 <이미테이션 게임>은 앨런 튜링이 인공지능에 관한 이론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도입한 일종의 테스트다. 그래서 튜링 테스트라고도 부른다. 요약하자면 셋이 하는 게임이다. 한 명은 질문을 던진다. 이에 답하는 응답자 중 하나는 인간이고 하나는 기계다. 튜링은“진정한 인공지능 컴퓨터는 사람이 5분간 질문을 할 수 있고, 이럴 경우 질문하는 사람이 30% 이상 확률로 컴퓨터를 인간으로 착각하는 수준”이라고 예시했다. 이 단순한 게임을 통해 튜링은 지능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수학적 혹은 기계적인 답을 내려고 시도한다. 최소한 인간에게 인간처럼 보인다면 그것은 인간에 준하는 지능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물론 이 테스트를 제대로 통과하는 기계를 만들기는 여전히 쉽지 않은 일이다. 게다가 제법 많은 질문에 답을 하는 기계조차 인간이 엄청난 양의 데이터를 입력해야 하니 이것이 지능인가 아닌가 논란이 될 수밖에 없다.[각주:3] 하지만 당신이 <공각기동대>나 <블레이드 러너>같은 영화를 보며 철학적으로 심각해지는 상황을 생각해보라. 이 사람은 이미 한참 전에 그런 고민의 시초를 던진 것이다. 게다가 뇌과학의 발달은 철학적으로 제기되던 숱한 문제들, 물질을 초월한 개념으로 인식되는 많은 것들이 실은 물질의 화학작용에 의한 것임을 밝혀냈다. 만약 이 화학작용이 인간의 의식을 결정하는 것이라면 대체 인간다운 것은 무엇인가?

지적호기심, 수학적 합리성이 튜링을 규정한다. 그는 연인들의 밀당이나 썸을 이해하지 못한다. 튜링의 언어는 컴퓨터 프로그래밍 언어를 닮아 있고 합리적 의사소통과정은 순서도(플로우 차트) 전개와 비슷하다. 감정표현조차 논리로 섭렵하여 사회화하는 캐릭터는 우리 주변에도 제법 있다. 튜링이 많은 경우 사교에 서툰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새로운 멤버를 뽑는 시험장에 유일한 여성인 조안이 나타났을 때, 잘못왔다며 제지하는 사람보다 그녀를 동일하게, 합리적인 한 명의 사람으로 받아들이는 튜링이 훨씬 인간적이다. 

이미테이션에는 모조, 모방이란 뜻이 있다. 어쩌면 튜링에게는 그가 처한 현실이 더 모방에 가깝게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어디에도 진실을 말할 수 없는 수 많은 기밀 속에서 살았던 튜링에게는 차라리 '크리스토퍼'가 진정한 본질에 가까웠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일까? 전쟁 이후 튜링의 삶은 허깨비를 쫓듯 공허했다. 튜링은 우울증에 시달렸고 더욱 진화된 ‘크리스토퍼’를 만드는 일만이 그를 살아있게 했다. 튜링은 동성애로 인해 화학적 거세형을 받고 약물 복용 후유증에 시달렸다. 그리고 우울증과 겹쳐지며 끝내 자살에 이르게 된다.

사람들은 인간 혹은 인간성에 대해 말할 때 나름대로 정해진 답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삶 속에서 발현되는 양상은 제각각이다. 동성애와 기계에 대한 사랑이라는 조합은 다소 생뚱맞게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사이버 가수의 등장, 게임 캐릭터에 대한 환타지, 각종 돌(doll)을 이용한 자위행위 등. 비현실의 현실 속에서 더 자주 위로를 얻는 우리의 삶은 튜링의 삶과 얼마나 다른가? 그래서인지 자주 마음이 시려 왔고 나는 천재가 보이기 보다는 우리 삶 속의 수 많은 튜링들이 보였다.  



  1. 무엇을 최초의 컴퓨터로 보느냐는 중요할 수도,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는 질문이다. 이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의견이 있다.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시도들이 있었기 때문에. 확실한 것은 앨런 튜링이 이론상으로 중요한 기여를 했다는 점이다. [본문으로]
  2. 앨런 튜링이 독이 든 사과를 먹고 자살했다는 일화는 너무 유명해서 스포일러 축에도 못 낀다. 스티브 잡스는 애플 로고와 앨런 튜링 사이에 연관성이 없다고 해명했지만 사람들은 계속 그렇게 믿고 싶어 하는 눈치다. [본문으로]
  3. '한 입 베어 문' 애플의 사과로고는 앨런 튜링을 기린 것일까? <2014년 6월 10일자 한국경제> 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14061022407 [본문으로]
Posted by 칸나일파
이전버튼 1 이전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