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게임에서 플레이어는 대개 병사나 지휘관이 되어 임무를 수행한다. 그 임무의 내용이 제국주의 침략이든 인종청소이든 아니면 ‘인도적 개입’ 혹은 ‘정의로운 전쟁’이든 관계없이 말이다. 한편 현대전이 총력전의 양상을 띰에 따라, 전쟁에는 전투원보다 훨씬 더 많은 민간인 행위자가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고 있으며, 갈수록 많은 ‘부수적 피해’가 발생하고 있다.


“1차 세계대전 이후로 전쟁은 군인보다 민간인을 더 많이 죽였다. 1차 세계대전 때는 사망자의 90%가 군인이었고 민간인 사망자는 10%에 불과했다. 2차 세계대전 때는 군인과 민간인 사망자가 거의 반반이었다. 베트남전쟁에서는 사망자 중 70%가 민간인이었고, 최근의 이라크전쟁과 아프가니스탄전쟁에서는 민간이 사망자 비율이 80~85%에 달했다.

-하워드 진, 『역사를 기억하라』


2012년작 ‘스펙 옵스: 더 라인(Spec Ops: The Line)’이 흡사 영화 <지옥의 묵시록>을 연상케 하는 스토리라인으로 기존 전쟁게임의 틀을 벗어났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지만, 이 게임 역시 주인공이 군인이라는 점에서는 예외가 아니었다. 이 점에서 ‘디스 워 오브 마인(This War of Mine)’은 아주 흥미롭다. 여기서 플레이어는 군인이 아닌 민간인이 되어 전쟁의 현실에 내던져진다.


11비트 스튜디오가 2014년 11월 출시한 인디게임 ‘디스 워 오브 마인’


게임은 보스니아 내전 당시의 사라예보를 모델로 한 가상의 도시를 배경으로 진행된다. 플레이어는 전쟁통에 한데 모여 생사고락을 함께 하는 일단의 생존자들을 이끌고 하루하루를 버텨야 한다. 매일 새벽같이 일어나 은신처의 구멍 난 벽을 보수하고, 부서진 잔해를 모아 각종 도구와 몸 누일 데를 만들고, 음식물을 마련하다 보면 금세 날이 어두워진다. 밤이 되면 한 명이 밖에 나가 저격수를 피해 폐허가 된 도시를 헤집으며 물자를 수집하고, 나머지는 약탈에 대비해 불침번을 서며 동료들과 은신처를 지킨다.


수도와 가스를 비롯한 모든 자원의 공급이 끊긴 상태에서, 플레이어는 총을 든 적병과 싸우기에 앞서 굶주림과 추위라는 인류의 원초적인 적과 싸워야 한다. 식수를 마련하기 위해 빗물을 받고, 겨울에는 눈을 녹인다. 겨울철에 땔감은 식료품, 의약품과 함께 가장 구하기 힘든 자원 중 하나이다. 먹을 것은 언제나 모자라 하루에 한 끼나 제대로 먹으면 다행이고, 며칠을 굶다 덫에 걸린 쥐를 날로 먹어야 할 때도 있다.


죽음은 예고 없는 불청객이다. 밤에 버려진 건물을 뒤지다가 불한당의 총에 맞을 수도 있고, 수집을 마치고 새벽에 은신처로 돌아오다가 정부군이나 반군 저격수에게 당할 수도 있다. 병이나 상처를 제때 치료하지 못하면 시름시름 앓다가 결국 죽게 될 것이며, 하나둘 죽어나가는 동료들을 지켜본 생존자는 우울과 절망을 견디다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것이다. 우리네 인생이 그렇듯 이 게임에는 세이브/로드가 없다.



“현대전에서, 당신은 별 이유 없이 개처럼 죽게 될 것이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사람들은 보통 ‘재미’를 위해 게임을 한다. 이 게임의 재미는 어디에 있을까? 액션게임들이 주는 말초적 쾌락이나 멋진 그래픽이 선사하는 심미적 만족은 아닐 것 같다. 최후 생존이라는 목표 달성에 따른 성취감 정도는 있겠다. 하지만 솔직히 디스 워 오브 마인은 즐겁다기보다 우울하다. 시작부터 끝까지 플레이어를 기다리는 것은 어느 하나도 달갑지 않은 몇 가지 상황 중에 어쩔 수 없이 하나를 골라야 하는 윤리적 딜레마의 연속이다.


때로는 생존을 위해 양심을 버려야 한다. 플레이어는 곤경에 처한 외부인에게 도움의 손길을 건넬 수도 있고, 통조림 몇 병을 얻고자 무고한 이웃을 군인들에게 밀고할 수도 있다. 노부부의 집을 강도질하든, 병원에서 붕대와 약을 훔치든, 총칼로 중무장해 군부대를 습격하든 모든 것이 플레이어의 선택에 달렸다. 일반적인 법칙은 몸이 편할수록 마음은 불편해진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마침내 내전이 끝날 때까지 살아남아도 남는 것은 아픈 과거와 공허한 현재뿐이다. 전장에서의 용맹과 활약을 기리는 훈장도, 명예로운 개선 행진도 없다. 디스 워 오브 마인은 지금까지 내가 해본 가장 우울한 게임이었다. 우리가 <쉰들러 리스트>를 ‘재미있는 영화’라고 표현하지 않듯, 이 게임을 ‘재미있는 게임’이라고 부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자들에게 이 게임을 추천한다.


게임 플레이 화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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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니스트 볼크먼의 <전쟁과 과학, 그 야합의 역사>[각주:1]는 지난 수천 년의 인류 역사가 결정적 무기를 향한 인간의 끝없는 경쟁과 욕망의 역사였으며 거기서 전쟁과 과학이 어떤 상호관계를 맺었는지를 서술한 책이다. 이 책의 목차를 보고 바로 ‘시드 마이어의 문명(Sid Meier's Civilization)’을 떠올렸다. 이 글에서는 비디오게임 ‘문명’을 통해 전쟁과 과학, 그 야합의 역사를 조명하고자 한다. 게임에 관한 구체적인 정보는 2005년에 나온 ‘문명 4’를 기준으로 삼았다.


1991년 출시되어 여러 편의 속편을 낳은 ‘문명’은 턴제 전략 시뮬레이션계에 큰 획을 그은 게임이다. 플레이어는 기원전 4000년부터 중세와 근현대를 거쳐 가까운 미래까지 한 문명의 지도자가 되어 문명의 흥망성쇠를 결정한다. ‘문명’에는 정치체제와 종교, 문화, 도시계획, 외교 등 고려해야 할 다양한 요소가 있지만 핵심적인 것은 군사유닛의 운용과 테크트리, 즉 전쟁과 과학이다. 중요한 테크를 빨리 탈수록 다른 문명보다 이른 시기에 더 강력한 군사유닛을 뽑을 수 있기에 과학기술의 경쟁은 곧 군비경쟁이다.


1991년작 시드 마이어의 문명


역사상 최초의 군비경쟁은 금속을 무기 제조에 유용한 소재로 만들고자 하는 경쟁이었다. 청동기술을 연구하면 만들 수 있는 창병(공격력 4)과 도끼병(공격력 5)은 기본 유닛인 전사(공격력 2)의 두 배 이상 되는 공격력으로 보병들의 백병전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하지만 이러한 무기도 말이 끄는 전차 앞에서는 맥을 못 추었다. 특히 이집트 문명의 고유 유닛인 전투전차(공격력 5, 이동력 2)는 기존 유닛들의 두 배나 되는 기동력을 바탕으로 고대의 전쟁터를 지배했다.


그러나 이집트를 비롯한 전차 부대를 거느린 문명들은 어느 시대의 어느 곳에서라도 누군가는 반드시 좀 더 우월한 신무기를 개발하게 되어 있다는 역사의 진실을 간과하는 자만에 빠졌다. 그 신무기는 철이라 불리는 금속이었다. 철제기술을 연구한 다른 문명들이 검사(공격력 6)를 이끌고 쳐들어오기 시작했을 때 전차를 앞세운 문명들은 자신들의 결정적 무기가 더 이상 결정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전차 - 전략자원인 말을 확보하고 바퀴를 연구하면 생산 가능한 최초의 기병유닛


어떻게 전차가 개발되었으며, 어떻게 전차가 고대의 전쟁터를 지배했으며, 그리고 훗날 보다 우월한 과학기술에 의해 그 전차가 패배하게 되었는지 그 전 과정은 과학이 어떤 방식으로 전쟁에 영향을 미치는가를 전형적으로 드러내 보여준다. … 그 순환의 과정은 이런 식이다. ‘결정적인 무기’의 개발, 그 무기가 전쟁터의 절대 강자로 군림하는 시기, 맞수의 등장, 그리고 다시 더 크고 더 좋은 무기의 개발, 또 그에 맞서는 무기의 개발이 끝없이 반복되는 것이다.


철의 발견 이후에도 그러한 순환은 계속되었다. 무엇보다 공성유닛인 캐터펄트(턴당 8%씩 도시 방어력을 깎음, 최대 50%까지 스플래시 대미지)의 등장이 난공불락으로 보였던 두꺼운 성벽(도시 방어력 +50%) 안에 위치한 적을 손쉽게 공격할 수 있게 해주었다. 중세에는 장궁병(공격력 6, 도시방어 +25%)과 석궁병(공격력 6, 밀리유닛 상대 +50%)이 전쟁의 흐름을 바꾸어놓았고, 철갑으로 중무장한 기사(공격력 10, 이동력 2)가 전쟁터의 맹주로 위용을 떨쳤다.


새로운 기술의 발견은 이전에는 생각지도 못한 새로운 유형의 경이로운 무기를 탄생시켰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화약의 개발로 공성전뿐만 아니라 야전에서도 강력한 힘을 보여준 공성유닛 대포(공격력 12)와 소총병(공격력 14, 기병유닛 상대 +25%)이 중세 기사를 전쟁터에서 완전히 내쫓았다. 현대에는 기갑유닛인 탱크(공격력 28)와 현대전차(공격력 40)가 최강의 지상병기로 군림했고, 공중유닛인 전투기와 폭격기 그리고 헬리콥터가 등장해 전장의 개념을 한 차원 확장시켰다.


문명 테크트리의 일부분 - 이를테면 화약을 연구하면 머스킷총병을, 강선을 연구하면 소총병을 만들 수 있다.


이처럼 ‘위대한’ 정복자의 뒤에는 항상 제국의 강력한 군사력을 뒷받침하는 뛰어난 과학기술이 있었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왕의 가장 큰 업적도 그의 이름을 따서 만든 이집트의 도시 알렉산드리아에 무세이온이라는 왕실과학연구기관을 건립한 것이었다. 그는 과학을 제도화했으며 국가가 운영하는 연구소나 조병창, 조선소에 과학자들을 끌어들여 전쟁병기를 개발하도록 했다. 덕분에 무세이온은 1800년 후에야 찾아올 르네상스 때까지 세계 과학의 중심지로 남을 수 있었다.


군사기술의 혁신이라는 동기는 고금을 막론하고 과학의 발전에 주요한 추진력으로 작용했다. 설사 과학자들이 우주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자연의 신비를 밝히고자 하는 순수한 동기를 가지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재정을 지원하는 국가의 심산은 그렇지 않았다. 오늘날 미국 전체 연구개발 예산의 20%가 국방 연구개발 예산이고, 정부 연구개발 예산에 한정할 경우 그 비율은 50%를 초과한다. 더욱이 모든 과학자가 그런 순수한 마음으로 연구에 임한 것도 아니었다.


많은 과학자들이 열렬한 애국자로서 순수과학을 버리고 자신의 모든 역량을 군사기술의 발전에 바쳤고, 국가의 위기 상황에서는 과학의 실용성을 ‘불명예스럽고 저속한’ 것으로 여겼던 과학자들조차 예외가 아니었다. 로마의 침략으로부터 시라쿠사를 지키고자 했던 아르키메데스부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핵무기의 개발을 위해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미국의 과학자들까지 그러한 예는 수도 없이 많다. ‘문명’에서도 위대한 과학자와 기술자를 비롯하여 많은 위인들이 조국을 위해 자신의 한 몸을 기꺼이 희생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조국을 위해 제 한 몸을 기꺼이 바치는 위대한 기술자


우리가 역사로부터 배울 수 있는 또 하나의 진실은 과학의 비법은 아무리 단단히 감추어도 언젠가 외부로 퍼지는 것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문명’의 맨해튼 프로젝트를 통해서도 잘 드러난다. 한 플레이어가 맨해튼 프로젝트를 완성하면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플레이어가 핵무기를 생산할 수 있게 된다. 실제로 핵무기 개발은 통치자의 의지만 있다면 기술적 구현이 어렵지 않기 때문에 미국 이후로 여러 나라가 독자적으로 핵개발을 할 수 있었다. 이것이 현실에서 핵확산을 막기가 어려운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끝없는 군비경쟁과 전쟁과 과학의 쌍방간 야합의 역사는 과거에도 미래에도 필연적인 것일까? 현실에서든 게임에서든 지금 상황에서 상대 문명의 군사적 위협에 맞서기 위한 최소한의 군사력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러한 현재 상태가 언젠가 모종의 합의를 통해 다 같이 총을 내려놓을 수 있는 가능성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문명’에서도 군사적 정복과 지배가 게임에서 이기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그 밖에 문화적 승리와 외교적 승리, 그리고 가장 먼저 우주식민지 개척에 성공하면 성취되는 과학적 승리가 있다. 과학적 승리는 한 문명이 군사적 우위가 아니라 과학기술의 힘만으로 인류 역사에 위대한 족적을 남길 수 있음을 시사한다. 어쩌면 이것이 ‘문명’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가 아닐까.


  1. Ernest Volkman, Science Goes to War, 2002. (석기용 옮김, 전쟁과 과학, 그 야합의 역사, 2003)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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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에 첫 편이 출시되어 이후 심시티2000, 심시티3000, 심시티4 등 많은 속편을 낳은 심시티(SimCity)’ 시리즈는 가장 많은 판매 부수를 올린 비디오게임 중 하나로 기록되어 있다. 이 심시티 시리즈의 특징은 결말이 열린 게임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성취되면 게임이 종료되는 일정한 목표가 없이 끝없이 게임이 진행된다는 뜻이다. 이 글에서는 이와 같은 과정 지향적 게임들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그 전에 먼저 놀이와 게임에 대한 몇 가지 고전적인 저작들을 살펴보자.


1989년작 윌 라이트(Will Wright)의 심시티


요한 하위징아(Johan Huizinga)[각주:1]는 <호모 루덴스(Homo Ludens: 놀이하는 인간>에서 인간 사회의 본질이 놀이에 있다고 보았다. 그는 다양한 언어에서 놀이를 나타내는 단어들을 살펴봄으로써 놀이 개념을 파악하고자 했다. 그리스어에는 파이디아(paidia)와 아곤(agon)이라는 두 단어가 있다. 파이디아는 원래 어린아이의 놀이를 뜻하는 단어였으며, 아곤은 경기 혹은 경연을 가리킨다. 한편 라틴어는 놀이의 전 영역을 통칭하는 루두스(ludus)라는 단일한 단어만을 갖고 있다.


로제 카이와(Roger Caillois)[각주:2]와 장 피아제(Jean Piaget)[각주:3]는 규칙의 복잡하고 엄격한 정도에 따라 초기 아동이 하는 파이디아/놀이(play)와 보다 나이든 아이나 어른이 하는 루두스/게임(game)을 구분했다. 둘의 차이라면 카이와가 규칙이 덜 복잡한 게임과 더욱 복잡한 게임으로 구분한 반면에, 피아제는 사실상 규칙으로부터 자유로운 운동감각적 놀이 및 상징적 역할놀이와 규칙을 가진 게임으로 구분했다는 점이다.


놀이는 특정 시간과 공간 내에서 벌어지는 자발적 행동 혹은 몰입 행위로서, 자유롭게 받아들여진 규칙을 따르되 그 규칙의 적용은 아주 엄격하며, 놀이 그 자체에 목적이 있고 ‘일상생활’과는 다른 긴장, 즐거움, 의식(意識)을 수반한다. -요한 하위징아, <호모 루덴스>


한편 곤살로 프라스카(Gonzalo Frasca)[각주:4]에 따르면 규칙이 없는 놀이 혹은 게임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점에서 그의 견해는 모든 놀이에는 놀이가 벌어지는 장소와 시간에서 무엇이 통용되는지를 결정하는 규칙이 있다고 본 하위징아와 일치한다. 하지만 하위징아가 놀이(파이디아)와 경기(아곤)는 근본적으로 분리될 수 없다고 주장한 것과 달리, 프라스카는 게임의 승리 및 패배를 가르는 종료 조건의 유무에 따라 게임을 분류했다. 그러한 종료 조건을 루두스 규칙이라고 하며, 게임의 진행과 관련된 나머지 규칙을 파이디아 규칙이라고 한다.


모든 게임에는 파이디아 규칙이 있다. 예를 들어, 전래놀이인 강강술래에는 손을 잡고 원을 만들어 노래를 부르며 돈다는 파이디아 규칙이 있지만 루두스 규칙은 없다. 장기에는 졸(卒)이 앞이나 옆으로 한 칸씩 움직일 수 있다는 등의 파이디아 규칙과 상대방의 왕을 잡으면 이긴다는 루두스 규칙이 있다. 프라스카는 강강술래처럼 파이디아 규칙만 있는 게임을 ‘파이디아’, 장기처럼 파이디아 규칙과 루두스 규칙이 모두 있는 게임을 ‘루두스’라고 정의한다. 승리 및 패배 조건의 유무에 따른 프라스카의 범주 구분은 규칙의 복잡성처럼 모호한 기준에 따른 다른 학자들의 분류보다 훨씬 더 명확하다.


어쩌면 ‘승리 및 패배’라는 표현보다 ‘성공 및 실패’라는 표현이 적당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싱글플레이어 게임이나 협력게임에서는 다른 플레이어와의 경쟁에서 승리를 거두는 것이 아니라, 게임 속의 환경에 맞서 일정한 성공 요건을 성취하는 것이 게임의 목표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싱글플레이어 게임과 멀티플레이어 경쟁게임 및 협력게임 모두 게임의 목표가 있으면 루두스에 속한다. 이 점에서 루두스와 파이디아는 각각 목표의 달성을 지향하는 ‘결과 지향적’ 게임과 플레이 과정 자체를 즐기는 ‘과정 지향적’ 게임이라고 부를 수 있다.


심즈 - “심시티 제작자의 사람 시뮬레이터”


그렇다면 ‘덜 복잡한’ 규칙을 가진 놀이를 제외하고 제법 형식을 갖춘 복잡한 게임들 중에서도 게임의 목표가 없는 파이디아가 존재할까? 비디오게임의 주요 장르 중 하나를 차지하는 시뮬레이션 게임들 다수가 거기에 해당한다. 시뮬레이션 게임이란 현실의 다양한 상황들을 모사하는 게임을 말한다. 시뮬레이션 게임은 다시 전략 시뮬레이션, 건설 시뮬레이션, 경영 시뮬레이션, 연애 시뮬레이션, 비행 시뮬레이션, 운전 시뮬레이션 등 다양한 하위장르로 구분되기도 한다.


물론 많은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과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처럼 목표가 분명한 것들도 있다. 이때의 목표는 각각 상대 진영과 캐릭터의 ‘정복’이 될 것이다. 한편 심시티나 ‘심즈(Sims)’ 같은 시뮬레이션 게임들은 도시를 건설하고 한 가족의 삶을 가꾸는 과정 자체에서 즐거움을 제공한다. 이 밖에도 ‘심팜(SimFarm)’, ‘심앤트(SimAnt)’, ‘심콥터(SimCopter)’, ‘심타워(SimTower)’, ‘심어스(SimEarth)’ 등 게임의 제목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심(Sim)’이 바로 시뮬레이션(simlulation)이라는 단어에서 딴 것이다.


위 이름들에서 보듯이 시뮬레이션 게임에서 다루는 소재는 농장, 개미집, 헬리콥터, 건물, 행성까지 정말 다양하다. ‘마이크로소프트 플라이트 시뮬레이터(MSFS)’라는 비행 시뮬레이션 게임은 실제로 항공기 조종사 교육용으로 사용될 정도로 정확한 모사를 자랑한다. 전투기를 조종해 공중전을 벌이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한 공항에서 다른 공항까지 항공기를 몰고 가는 게 무슨 재미가 있을까 싶기도 하지만, 이 같은 가상현실 체험이 바로 시뮬레이션 게임의 묘미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온라인 롤플레잉 게임(MMORPG)들도 파이디아라고 볼 수 있다. 레벨업이나 퀘스트처럼 작은 목표들이 있기는 하지만 게임의 궁극적인 목표와 끝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을 잘 살린 ‘세컨드 라이프(Second Life)’ 같은 게임도 있다. 세컨드 라이프에는 레벨업도 퀘스트도 없다. 현실의 일상생활 전부를 가상으로 옮겨놓은 심즈의 온라인 버전인 셈이다. ‘마인크래프트(Minecraft)’처럼 플레이어의 자유도를 극대화한 오픈월드 혹은 샌드박스 게임들도 파이디아의 좋은 예이다.


마인크래프트 - 무엇이든 만들 수 있는 놀이터의 모래밭처럼 플레이어의 창조성을 극단적으로 발휘할 수 있는 샌드박스 게임의 하나


오늘날 많은 루두스(결과 지향적 게임)가 경쟁게임이고 파이디아(과정 지향적 게임)가 시뮬레이션 게임이라는 관찰이 일찍이 하위징아에게서도 비슷하게 발견된다는 점이 흥미롭다. 하위징아는 고등 형태의 놀이에는 두 가지 기본적 양상이 있는데, 하나는 어떤 것을 얻기 위한 ‘경쟁’이고 다른 하나는 어떤 것의 ‘재현’이라고 보았다.


프라스카는 위에서 언급한 파이디아들이 ‘피억압자의 게임’이 될 잠재성을 갖추고 있다고 말한다. 게임 디자이너가 미리 규정한 틀을 따르는 대신에 플레이어 스스로가 규칙을 만들어나가는 게임이 바로 파이디아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파이디아를 즐기는 플레이어는 아무 목표 없이 헤매는 것이 아니라 자기만의 루두스 규칙을 좇는다. 그것은 세계 최대의 도시 건설이 될 수도 있고, 그렇게 건설한 도시를 화산 폭발로 파괴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파이디아 규칙 역시 플레이어에 대한 암묵적 제약을 가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예컨대 심즈에서 플레이어의 캐릭터는 군인, 과학자, 범죄자, 사업가 같은 직업은 가질 수 있지만 시민단체 활동가가 될 수는 없고, 어린이와 청소년은 무조건 학교에 가야 한다. 한편으로 사용자가 직접 게임의 규칙를 고친 모드(mod: modification)를 제작하여 플레이하고 다른 플레이어들과 공유하는 문화가 게이머들 사이에 존재한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이 플레이어와 디자이너가 분리되지 않고 하나 되는 진정한 게임 해방으로 가는 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 Johan Huizinga, Homo Ludens: A Study of the Play Element in Culture, 1938. (이종인 옮김, 호모 루덴스 - 놀이하는 인간, 2013) [본문으로]
  2. Roger Caillois, Man, Play and Games, 2001. [본문으로]
  3. Jean Paiget, Play, Dreams and Imitation, in Children, 1951. [본문으로]
  4. Gonzalo Frasca, The Videogames of the Oppressed, 2004. (김겸섭 옮김, 억압받는 사람들을 위한 비디오게임, 2008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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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의자놀이를 한 번씩 해봤을 것이다. 게임의 규칙은 이렇다. 참가자들은 음악이 틀어진 동안 자유롭게 돌아다니다가 음악이 멈추면 의자를 하나씩 차지하고 앉는다. 이때 의자의 수는 참가자의 수보다 적고, 의자에 앉지 못한 사람은 탈락한다. 이제 의자의 수를 더 줄이고 남은 참가자들이 다시 게임을 진행한다.


이 게임은 전형적인 ‘경쟁 게임’이다. 경쟁 게임에서 플레이어들은 희소한 자원(돈이나 땅 그리고 많은 경우 목숨)을 놓고 경합을 벌인다. 여기서 희소한 자원은 의자이다. 누군가가 의자에 앉으면 다른 누군가는 필연적으로 그 의자에 앉지 못한다. 경쟁의 결과로 매번 탈락하는 사람이 생기고 이 과정을 반복하여 최후에 남는 사람이 승리한다. 게임이 끝나면 참가자들은 승자와 패자의 두 집단으로 구분된다.


실제로 우리가 즐기는 대다수의 게임과 스포츠는 경쟁 게임이다. 교육심리학자 알피 콘(Alfie Kohn)은 경쟁이 놀이와 동일시되는 것에 대한 반론을 펴며, 다음과 같은 의자놀이의 변형을 제시한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참가자보다 적은 수의 의자가 주어지지만, 한 의자에 꼭 한 사람만 앉을 필요는 없다. 모든 사람이 어떻게든 의자 위에 올라가기만 하면 된다. 게임이 진행될수록 의자의 수는 줄어들고 모두 앉기는 점점 어려워진다.


이 게임에는 성공과 실패가 있을 뿐 승리와 패배는 없다. 이 두 가지의 차이는 중요하다. 성공은 승리와 달리 참가자들 모두가 동시에 성취할 수 있다. 다 같이 이기거나 다 같이 지는 것이다. 이런 협력 게임에서는 누구도 적으로 돌릴 필요가 없으며, 패배의 두려움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 ‘협력 게임’은 플레이어들이 서로 싸우는(PvP) 것이 아니라, 함께 외부의 환경과 맞서 싸우는(PvE) 게임으로 정의할 수 있다. 다른 플레이어가 아니라 게임의 규칙과 대결하는 셈이다.


공지영의 ‘의자놀이’ - 2009년 정리해고로 시작된 쌍용차 사태에 관한 르포르타주


콘에 따르면 놀이의 본질은 경쟁, 즉 승자와 패자를 가르는 것이 아니라 즐거움 그 자체에 있다. 사람들이 경쟁 게임을 선호하는 것은 그것이 오늘날의 사회와 경제제도의 관점에서 유용하기에 “경쟁이 즐거운 것이라고 생각하게끔 우리가 사회화”된 결과라는 것이다. 그는 한걸음 더 나아가 “놀이의 순수한 즐거움을 얻으려면 스포츠와 같은 경쟁적 활동은 배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각주:1]


이런 급진적인 결론까지 옹호하지는 않더라도, 우리가 즐기는 게임이 왜 대부분 경쟁적인가는 깊이 생각해볼 만한 문제다. 많은 사람이 경쟁 게임이 협력 게임보다 더 재미있다고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 게임이 재미있기 위해서는 반드시 경쟁의 요소가 들어가야 하는 걸까? 이런 질문들에 직접 답하는 대신에 한번 반대의 질문을 던져보자. 우리가 즐기는 협력 게임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간혹 경쟁 게임에도 협력의 요소가 있다. 다대다로 싸우는 전략게임의 팀플레이나 축구, 농구와 같은 팀스포츠가 그러하며, 나를 제외한 모두가 적인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에서도 더 큰 적을 상대하기 위해 언젠가는 대적해야 할 상대와 일시적으로 손을 잡아야 할 때가 있다. 하지만 이 경우도 본질은 집단 내의 협력보다는 결국 집단 간의 경쟁에 있으므로 진정한 의미의 협력 게임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주로 혼자 하는 퍼즐이나 액션/어드벤처 장르의 비디오게임 중에는 멀티플레이어 협력 모드를 지원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대체로 여럿이 즐기는 전략게임이나 일인칭슈팅게임(FPS)에 ‘디펜스’와 같은 협력 모드가 있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사례들도 싱글플레이어 혹은 멀티플레이어 경쟁 게임이 주가 되며 협력 게임은 덤으로 딸려온 특별 모드나 유저들이 만든 변형 게임(mod) 수준인 경우가 많다. 순수하게 협력을 본위로 만들어진 비디오게임은 드물다.


‘리그 오브 레전드(LoL)’ - 어떤 의미에서 거의 모든 3인 이상 멀티플레이어 게임은 협력의 요소를 지니고 있지만, 이것을 진정한 의미의 협력 게임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한편 보드게임을 비롯한 아날로그 게임 중에는 협력 게임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보드게이머들 사이에 잘 알려진 예로는 팬데믹, 플래시 포인트, 하나비, 아컴 호러, 로빈슨 크루소, 스페이스 얼럿, 좀비사이드, 메이지 나이트 등이 있다. 이 게임들에서 플레이어들은 인류를 위협하는 전염병을 퇴치하거나, 화재를 진압하고 인명을 구하거나, 고대 악령의 부활을 막거나, 조난된 섬에서 탈출하는 등 공동의 목표 달성을 위해 힘을 모은다.


탁자에 둘러앉아 하는 역할놀이 즉, TRPG(tabletop role playing game)는 거의 모두가 협력 게임이다. TRPG의 플레이어들은 각자 하나씩 역할을 맡고 일행이 되어 던전과 같은 가상 세계를 탐험하고 주어진 임무 혹은 퀘스트를 완수한다. TRPG에도 규칙은 있지만 비디오게임이나 보드게임처럼 정교하게 알고리즘화된 규칙은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에 TRPG의 진행은 주로 대화를 통한 역할의 수행으로 이루어진다.


경쟁이 게임의 필수적인 요소가 아니라는 사실은 수많은 싱글플레이어 게임들의 사례를 보아도 알 수 있다. 플레이어가 주인공이 되어 주어진 시나리오를 클리어 하는 액션/어드벤처 게임이나 현실을 모사한 환경을 간접 체험할 수 있는 시뮬레이션 게임은 비디오게임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항상 인기를 끌어 왔다. 이런 게임들마저 ‘자신과의 경쟁’이라고 부르는 것은 수사의 남용일 것이다.


‘팬데믹’ - 전염병으로부터 세계를 구하라!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싱글플레이어 게임이나 협력 게임들은 대개 소재나 테마에 있어서 경쟁 게임들과 두드러지게 구분된다는 것이다. 협력 게임 중에는 전쟁보다는 모험, 살생보다는 생존, 상잔보다는 상생을 다루는 것이 많다. 그 과정에 싸움이 수반되더라도 상대는 대등한 위치에 있는 가상의 경쟁자보다는 괴물이나 재난, 위기상황과 같은 거대한 악(惡)이다. 요컨대 협력 게임은 대체로 공공선이나 바람직한 가치를 추구한다. 물론 이는 경쟁 게임이 구조상 어느 정도의 대칭성을 띄기 때문일 수도 있다.


협력 게임의 재미는 다른 플레이어를 밟고 올라가 승리의 왕관을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의 목표 달성을 위해 모두가 힘을 합치고 의견을 조율하는 데서 나온다. 그렇다고 협력 게임이 항상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진행되는 것은 아니다. 한 사람이 플레이를 지나치게 주도하는 경우 나머지는 게임에서 소외될 수 있다. 결정적인 잘못을 저질러 실패를 초래한 사람이 원성을 사기도 한다. TRPG에서는 자기 역할과 맞지 않는 말과 행동을 하는 것이 게임의 분위기를 완전히 망칠 수 있다.


‘던전 앤 드래곤(D&D)’ - 모든 TRPG의 효시이자 지금까지 가장 널리 즐겨지는 TRPG 중 하나


협력 게임이 경쟁 게임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하다거나, 항상 더 재미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협력 게임보다 경쟁 게임을 선호하는 사람에게 “그런 것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은 당신뿐이다.”라고 윽박지를 수는 없지 않은가? 다만 경쟁이 재미의 필수적인 요소는 아니라는 점, 협력 게임에는 거기서만 느낄 수 있는 고유한 재미가 있다는 점, 그리고 우리가 경쟁 게임을 선호하는 것은 어쩌면 타고난 본능이 아니라 학습된 것일 수 있다는 점은 잊지 말아야겠다.


사실 경쟁 게임이든 협력 게임이든 ‘결과 지향적’ 활동이라는 점에서는 같다. 하나는 타인에 대한 승리를, 다른 하나는 전원의 성공을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다를 뿐이다. 그럼 결과에 관계없이 게임을 플레이하는 과정만으로 즐거움을 얻을 수는 없는 걸까? 게임에서 지거나 목표 달성에 실패해도 재미를 느낄 수 있듯이 승리와 패배, 성공과 실패의 구분이 아예 없는 게임도 충분히 재미있을 수 있지 않을까? 다음 글에서는 이런 ‘과정 지향적’ 게임들에 대해 살펴보겠다.


  1. Alfie Kohn, No Contest: The Case Against Competition, 1992. (이영노 옮김, 『경쟁에 반대한다』, 산눈, 2009)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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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토이즈>를 보면 재밌는 장면이 나온다. 형으로부터 장난감 회사를 물려받은 전직 군 장성 릴랜드는 장난감을 개조해 무기를 만들려는 전쟁광이다. 그는 아케이드 게임장에서 탱크 시뮬레이션 게임을 하며 적의 병력은 쏘지 않고 “어딜 가나 끼어드는 빌어먹을 유엔” 트럭들만 골라 파괴한다. 적의 탱크를 쏘면 300점, 헬리콥터를 쏘면 500점을 얻고, 유엔 트럭을 쏘면 벌칙으로 무려 1000점이 감점되는데도 말이다.


이렇듯 플레이어들은 오로지 게임의 목표 달성을 위해서만 움직이는 자동인형이 아니라 각자의 가치관과 신념에 따라 행위를 결정하는 주체이다. 한편으로 게임은 고정된 텍스트가 아니며 플레이‘하기’를 통해 능동적으로 수용되는 상호작용적 매체이다. 같은 게임이라도 사람마다 그것을 다르게 즐기고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아래에서 소개할 게임은 플레이어의 양심적 선택에 따라 게임에서 얼마나 다른 다양한 결과가 초래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영화 토이즈


‘페이퍼스 플리즈(Papers, Please)’는 루카스 포프(Lucas Pope)가 1인 개발한 인디게임이다. 도스 시절을 연상시키는 도트 그래픽과 간소한 인터페이스가 특징이다. 배경은 1980년대 초반 아스토츠카라는 동구권풍의 가상의 독재국가다. 플레이어는 국경 검문소의 입국심사원이 되어 입국자들의 서류를 검사하고 입국 허가 또는 거부 여부를 결정한다. “서류를 제출하십시오.”라는 뜻의 게임 제목은 새 입국자가 창구에 도착할 때마다 플레이어의 캐릭터가 형식적으로 내뱉는 말이다.


게임 플레이는 어떻게 보면 다소 따분하다. 책상 앞에 앉아 한 줄로 들어오는 사람들의 입국서류를 보고 허가/거부 둘 중의 한 도장을 찍으면 된다. 입국 승인 요건은 그때그때 상부에서 하달된다. 처음에는 여권과 입국 허가증, 노동 허가증 정도만 검사하면 되지만, 갈수록 망명 허가증이나 예방접종 인증서 등 서류가 많아진다. 그 밖에 기재된 국적, 성별, 나이, 입국사유, 만료일자 등을 대조하여 위조된 서류가 아닌지도 판정해야 하고, 수상한 사람은 따로 대질심문을 하고 무기나 밀수품은 없는지 엑스레이도 찍어봐야 한다.


페이퍼스 플리즈의 트레일러 - 그래픽과 사운드가 이 작은 게임에 담긴 묵직함을 잘 드러낸다.


매일 정해진 시간 동안 심사한 사람의 수에 따라 성과급제로 임금을 받는다. 그 돈으로 집의 임대료와 난방비를 내고 식구를 먹여 살릴 식료품도 사야 한다. 추위와 굶주림이 계속되면 가족이 병에 걸리고 죽기까지 한다. 문제는 먹고 살 돈을 버느라 쉴 새 없이 서류를 들여다보기도 바쁜데, 플레이어의 내적 갈등을 일으키는 사건들이 계속 일어난다는 것이다. 실수든 고의든 심사를 잘못하면 처음 몇 번은 경고장을 받지만 그 다음부터는 임금이 삭감되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서 플레이어는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다.


한 여성이 자신을 쫓는 포주의 입국을 막아달라고 애원하기도 하고, 이웃 국가에서 전염병이 창궐해 해당 국가 출신인 사람의 입국은 무조건 거부해야 하는 상황도 발생한다. 때로는 반정부 비밀결사 요원들이 찾아와 임무를 맡기기도 하는데, 이런 사건들에 어떻게 대응하는지에 따라 수십 가지 엔딩이 있다. 비밀결사에 협조했다가 불온단체와 내통한 죄로 사형을 당할 수도 있고, 반대로 협조하지 않았는데 반체제 세력이 집권하면 배신자로 낙인 찍혀 ‘행방불명’될 수도 있다. 엔딩 중 하나는 가족들과 함께 다른 나라로 탈출하는 것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입국자들의 미리 여권을 압수해두어야 한다.


국경에서는 극단주의자들의 테러도 종종 일어난다.


페이퍼스 플리즈는 다양한 방식으로 플레이할 수 있다. 플레이어는 상부의 지침만을 충실히 따르는 순응주의자가 될 수도, 반정부 결사에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혁명가가 될 수도, 대의보다는 가족의 안위를 최우선으로 걱정하는 소시민이 될 수도 있다. 이 가운데 정답은 없다. 선택에 따른 다양한 결말이 있을 뿐이다. 어떤 플레이어는 한 가지 선택에 만족하여 게임을 다시 플레이하지 않을지도 모르고, 또 다른 플레이어는 모든 엔딩을 다 볼 때까지 반복해서 플레이할 수도 있다.


이 게임은 수많은 멀티 엔딩 게임들 중에서도 플레이어의 양심에 따른 선택에 상당히 큰 비중을 두고 있다. 사실 그걸 빼면 이 게임은 시체다. 갈등을 일으키는 결정들이 없다면 단순히 글자 읽기와 마우스 클릭을 반복하는 ‘일’이 뭐가 재밌겠는가? 액션이나 퍼즐, 시뮬레이션 같은 장르를 택하지 않고 사회주의체제 하의 단순노동에 걸맞은 ‘지루한’ 플레이 방식을 채용함으로써 복잡함은 버리고 게임의 본질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디스토피아 서류 스릴러’라는 부제가 이 게임의 장르적 특이성을 보여준다.


얼마 전에는 ‘나쁜’ 비디오게임이 플레이어를 더 도덕적으로 만든다는 내용의 연구 결과가 발표됐다. 게임 안에서 저지르는 행위들에 대한 죄책감을 느낌으로써 도덕적 감수성이 향상될 수 있다는 것이다.[각주:1] 물론 이와 상반되는 연구도 많고 앞으로 더 세밀한 탐구가 필요하겠지만, 게임이 플레이어의 폭력성을 증가시킨다는 세간의 주장과는 사뭇 다른 흥미로운 결과다.


플레이어들은 때로는 게임의 목표를 추구하고, 때로는 <토이즈>의 릴랜드 장군처럼 목표와 정반대되는 행동을 한다. 페이퍼스 플리즈처럼 게임에 단일한 목표가 없고 다양한 가능성이 열려 있는 경우도 있다. 어느 쪽이든 플레이어들은 게임에서 자신의 선택에 따른 피드백을 받고, 그에 따라 가상 및 현실 세계에서의 행동을 수정하거나 강화한다. 이처럼 게임은 플레이어가 가능한 여러 가지 행동들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도록 함으로써, 현실의 비슷한 상황들에 대한 고민을 깊게 만들고 나아가 현실 세계에 영향을 줄 수 있다. 그것이 어떤 방향의 영향일지는 게임 개발자와 플레이어 둘 모두에게 달렸다.

  1. Grizzard Matthew, Tamborini Ron, Lewis Robert J., Wang Lu, and Prabhu Sujay. Cyberpsychology, Behavior, and Social Networking. August 2014, 17(8): 499-504.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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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나비효과>의 주인공 에반은 잘못된 인생을 바로잡기 위해 과거 기억의 한 시점으로 돌아가는 초능력을 발휘한다. 그러나 그가 시간여행을 반복할 때마다 미래는 점점 더 큰 파국으로 치닫고 만다.


<나비효과>의 서사구조는 많은 액션/어드벤처 게임의 플레이 모습과 닮았다. 플레이어는 자신의 캐릭터가 죽거나 막다른 길에 다다랐을 때 앞의 ‘세이브 포인트’로 돌아가 다시 게임을 진행한다. 선형적 플롯을 가지지 않는 게임의 경우 앞선 시점으로 돌아가 게임을 플레이하면 <나비효과>에서처럼 뒤의 이야기가 아예 다른 결말로 이어지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이 과거를 추억하고 때로는 후회하면서 만약 그때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어떤 선택을 할지 상상한다. 하지만 그런 일은 적어도 아직까지 게임이나 영화에서나 가능하지 현실에서는 불가능하다. 이 점에서 곤살로 프라스카는 이러한 세이브-로드 기능이 게임을 ‘진지하게’ 인식할 수 없도록 만든다고 주장한다.[각주:1]


우리가 게임에서 무슨 짓을 하든 그것은 시시한 것으로 인식되는데, 그 이유는 언제나 다시 플레이할 수 있기 때문이다. … 플레이어는 실제의 위험을 무릅쓸 필요가 없다. … 문제는 ‘진지한’ 문화적 생산품에서는 본질적으로 그러한 일들이 실제 삶에서는 벌어질 수 없다는 데 근거한다는 점이다. 햄릿의 딜레마는 비디오게임에서는 ‘사느냐’와 ‘죽느냐’가 양자 모두가 가능하기 때문에 무의미해진다.[각주:2]


그와 상반되게 제프리 로프터스와 엘리자베스 로프터스는 게임의 즐거움이 후회를 최소화하는 데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한 수단은 ‘대안적 세계’의 생성이며, 대안적 세계를 탐험하고자 하는 욕망은 플레이를 추동하는 중요한 동기이다. 게임은 플레이어들이 실제 세계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것을 실험할 수 있는 기회와 가상적 공간을 제공한다.[각주:3]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세이브-로드와 리플레이에 의한 반복은 플레이어들이 게임에서 재미를 느끼고 게임에 몰입하도록 만드는 필수적인 요소이다.


영화 <나비효과>


이와 관련하여 조너선 블로(Jonathan Blow)의 2008년작 ‘브레이드(Braid)’라는 비디오게임을 소개하려고 한다. 브레이드는 언뜻 보기에는 수퍼마리오와 비슷한 인터페이스의 액션/어드벤처 게임 같지만, 고유한 플레이 방식과 독창적인 레벨 디자인으로 평단과 게이머들에게 극찬을 받았다. 미술과 음악을 빼고는 개발자가 사실상 한 명뿐인 인디게임이라는 점도 놀랍다.


다른 액션/어드벤처 게임들과의 결정적인 차이라면 브레이드에는 어떤 의미에서 ‘목숨’의 개념이 없다. 캐릭터가 불구덩이에 떨어지거나, 몬스터와 부딪히거나, 대포알에 맞는 순간 화면이 회색으로 변하며 게임의 시간이 멈춘다. 그러면 플레이어는 세이브-로드 기능으로 앞선 시점의 세이브 포인트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비디오테이프를 되감기 하듯이 시간을 거꾸로 돌려 캐릭터가 ‘죽기’ 전 시점으로 돌아간다. 이 되감기 기능은 캐릭터가 죽을 때가 아니라도 게임 중 아무 때나 사용할 수 있다.


게임은 6개의 ‘세계’로 나뉘어 있는데, 각 세계마다 특징적인 이름과 그에 걸맞은 게임 메커니즘이 있다. 예를 들어, 4번 세계인 ‘시간과 공간’에서는 캐릭터가 오른쪽으로 움직이면 시간이 앞으로 흐르고, 왼쪽으로 움직이면 뒤로 흐른다. 스테이지의 진행 순서도 특이한데, 2번 세계부터 6번 세계까지 차례로 마친 뒤에야 비로소 1번 세계가 활성화된다. 줄거리는 남성 캐릭터가 ‘위험에 빠진 처녀’를 구하는 전형적인 서사이지만, 마지막 스테이지인 1번 세계를 깨면 소름끼치는 반전이 기다리고 있다.


브레이드의 트레일러 - 실수로부터 교훈을 얻는 동시에 결과를 되돌릴 수 있다면?


게임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는 시간이며, 게임을 구성하는 각 세계에는 ‘용서’, ‘결정’, ‘망설임’ 등의 표제어가 붙어 있다. 제목인 ‘braid(꼬임, 땋음)’도 시간의 꼬임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모든 스테이지를 끝내면 나오는 에필로그 중에 “이제 우린 모두 개새끼들이야.(Now we are all sons of bitches.)”라는 인용문이 있는데, 이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케네스 베인브리지가 핵무기 실험 직후에 내뱉은 말이다. 그래서인지 게임의 서사가 모호해서 다양한 해석의 여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핵개발에 대한 뒤늦은 후회의 은유로 보는 시각이 보편적이다.


도시가 불타는 듯한 암울한 메인 화면도 핵전쟁을 연상케 한다.


한편 위에서 언급한 프라스카와 로프터스의 관점에서 보면, 브레이드는 단순히 핵개발뿐만 아니라 게임의 본질에 대한 통찰과 오늘날의 대중적 게임들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프라스카가 지적한 세이브-로드의 반복에 의한 진지함의 훼손을 브레이드는 되감기 기능과 게임 내 텍스트를 통해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동시에 되감기라는 색다른 방식으로 대안적 세계를 생성함으로써 로프터스가 말한 후회의 최소화와 그에 따른 즐거움 역시 놓치지 않았다.


브레이드는 게임을 단순히 말초적 쾌락을 추구하는 오락 거리가 아닌 하나의 ‘진지한’ 문화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 작품들 가운데 하나이다. 이 게임처럼 그 내용과 형식이 땋은 머리처럼 미학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경우는 흔치 않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에 게임의 메커니즘과 플레이어의 능동적 수용을 중시하는 ‘루돌로지’와 텍스트로서 게임의 완결된 서사를 중시하는 ‘내러톨로지’라는 두 입장 사이의 논쟁을 다루면서 더 자세히 살펴보겠다.


  1. James Newman, Videogames, 2007. (박근서 등 옮김, 커뮤니케이션북스, 2008.) [본문으로]
  2. Gonzalo Frasca, Ephemeral games: Is it barbaric to design videogames after Auschwitz?, 2000. 앞의 책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3. Geoffrey R. Loftus & Elizabeth L. Loftus, Mind at Play: the Psychology of Video Games, 1983. 앞의 책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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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굴업자, 선장, 고위관리, 상인, 토지 개척자, 제조업자, 건축업자. 여러분은 신세계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할 것인가? 가장 풍요로운 농장을 소유할 것인가? 가장 위대한 건축물을 건설할 것인가? 여러분의 목표는 오직 하나이다. 그것은 바로 최대의 부와 최고의 명성을 성취하는 것!


여러분은 20세기 초의 일본인 지주이다. 여러분과 경쟁자들은 기회의 땅 조선으로 앞 다투어 건너가 불하받은 토지에 쌀과 대마, 면화, 인삼을 재배한다. 수확된 쌀과 가공된 삼베, 면직물, 한약은 다시 선적하여 내국으로 수출한다. 보다 원활한 생산과 유통을 위해 여러분은 조선에 시장과 창고, 관청, 학교, 항구, 수공업 공장을 건설한다. 총독과 다양한 역할들의 특권을 활용해 수탈과 개발로 가장 많은 부와 명성을 얻은 사람이 승리한다.


이런 게임이 나온다면 어떨까? 순수하게 즐거운 기분으로 게임에 몰입할 수 있을까? 왠지 출시 전부터 온갖 논란에 휩싸일 것만 같다. 그런데 이런 게임이 정말로 있다. 20세기 일본을 16세기 에스파냐로, 조선을 푸에르토리코로, 쌀·대마·면화·인삼을 옥수수·인디고·설탕·담배·커피로 바꾸면 그렇다.


푸에르토리코


안드레아스 사이파스(Andreas Seyfarth)가 2002년에 선보인 보드게임 ‘푸에르토리코(Puerto Rico)’는 출시 직후부터 평단과 게이머들의 호평을 받으며 큰 인기를 끌었다. 그 뒤 보드게임 커뮤니티 보드게임긱에서 수년 간 순위 1위를 독차지했고, 지금까지 5위권 밖으로 밀려난 적이 없다. 한편 이 게임의 주제에 대한 논란은 그동안 별로 없었다. 따지고 보면 그다지 폭력적이지도 선정적이지도 않은 게임이라 그런 게 당연한 듯도 하다.


하지만 비판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세바스찬 아타이는 어느 게임사(史) 웹진에 실린 글 ‘푸에르토리코의 수사학’에서 이 게임을 “철저하게 유럽 중심적인 문화의 산물”이라고 평했다. 그것이 “서구의 억압적 실천을 축소·은폐하고, 비유럽인의 성취를 부정하며, 서구인을 진보의 주된 촉매로 묘사하는 자유주의적 역사관을 재생산한다”는 것이다.[각주:1]


“1493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서인도제도 동쪽 끝의 섬을 발견했다. 50년 뒤, 푸에르토리코는 번성하기 시작한다. 당신의 손에 의해!” -‘푸에르토리코’ 영문 1판 상자 뒷면


이 말을 이해하려면 먼저 푸에르토리코의 역사를 조금 알아야 할 것 같다. 1493년 콜럼버스는 이 섬에 상륙해 에스파냐 국왕의 영토임을 선언했다. 뒤이어 정착한 이민자들은 금광을 개발하고 현재 수도인 산후안을 개척했다. 푸에르토리코라는 이름이 생긴 것도 이때다. 스페인어로 ‘puerto rico’는 영어로 ‘rich port’, 즉 ‘부유한 항구’를 뜻한다.


1530년대부터 금광이 고갈되자 사탕수수와 담배 등을 재배하기 위한 대규모 농장이 건설되었고, 여기서 일할 아프리카인 노예가 대량으로 실려 왔다. 이때 콜럼버스의 ‘발견’ 당시 3만 명이 넘었던 선주민 인구는 질병과 과로, 학살로 이미 2천 명 아래로 줄어 있었다. 이후 푸에르토리코는 400여 년 동안 에스파냐의 식민 지배를 받았다. 현재 푸에르토리코의 인종 구성은 백인이 75%, 흑인이 12%이고, 미원주민은 0.5%에 불과하다.


알고 보면 푸에르토리코는 조선과 많은 면에서 비슷하다. 둘 다 일본과 에스파냐의 통치에서 벗어난 뒤 곧바로 미군정이 시작되었고 이후에도 미국에 종속된 신식민지 체제를 겪었다. (푸에르토리코는 1952년부터 국방·외교·통화를 제외한 내정을 이양 받아 미국의 완전한 주는 아니지만 자치령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냉전 시대에는 각각 동아시아와 중앙아메리카에서 공산진영에 맞서 최전선의 교두보 역할을 했다. 양국 모두 아직까지 미군이 주둔해 있다는 점도 같다.


비에케스 미해군기지에 반대하는 직접행동. 푸에르토리코의 비에케스 섬은 2003년까지 미해군의 사격훈련장으로 쓰였다. 수도 산후안에는 아직도 포트 뷰캐넌 미육군기지가 남아 있다.


다시 게임으로 돌아가자. ‘푸에르토리코’에서 플레이어의 목표는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아니다. 게임에서 이기기 위한 승점을 얻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생산물을 본토로 실어 보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건물을 짓는 것이다. 이 점은 게임의 핵심을 잘 보여준다. 수탈과 개발은 식민 지배의 본질이 아닌가. 이제 그 과정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자.


플레이어는 자신이 경영하는 농장과 건물에 사람을 배치한다. 사람이 없는 농장과 건물에서는 생산을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이 과정은 게임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흑갈색’ 목재 토큰으로 표현되는 이 사람들은 규칙서에 따르면 식민지 ‘이민자’를 상징한다. 배에 실려 온 이민자를 사탕수수 농장에 보내 일을 시킨다고? 솔직해지자. 이건 이민자가 아니라 노예이다.


채석장과 옥수수밭, 사탕수수밭 등에 배치된 문제의 ‘이민자’ 토큰들


이 문제는 보드게임긱 커뮤니티에서도 논란이 되었다. 물론 개발자와 제작사가 일부러 게임에 그런 은유를 심어놓지는 않았을 수도 있다. 어쩌면 그들에게 이것은 “그저 게임일 뿐”일 것이다. “그저 흑갈색 토큰이지,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는 말이 옳을지도 모른다. (자연목의 색을 그대로 쓸 수도 있는데 왜 굳이 게임 중 커피를 나타내는 토큰과 헷갈릴 수 있는 색깔을 칠했는지는 잘 납득이 가지 않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런 해명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이 게임의 수사가 몰역사적이라는 지적은 여전히 유효하다. 게임의 수사적 기능을 부정하고 외면한다고 해서 그것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케이티 샐런과 에릭 짐머만에 따르면 “게임은 문화적 학습이 일어나는 사회적 맥락”이며 “사회의 가치가 착근되고 전달되는 장소”이다.[각주:2] 이안 보고스트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부연했다.


비디오게임과 같은 절차적 매체는 대상에 내재된 절차에 관한 의견을 세움으로써 그것의 핵심에 다가선다. 우리가 비디오게임을 만드는 것은 곧 우리가 찬양하고, 우리가 무시하며, 우리가 문제 삼는 이런 과정들에 관한 주장을 하는 것이다. 우리가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은 곧 이런 과정들을 우리의 삶에서 심문하고, 미래의 경험으로 이월하는 것이다.[각주:3]


식민지라는 심각한 주제를 게임의 소재로 써서는 안 된다고 말할 생각은 없다. 나는 전쟁게임이나 유혈이 낭자하는 좀비학살 게임도 즐겨 한다. 다만 ‘게임은 그저 게임일 뿐’이라는 생각만은 경계하고 싶다. 적어도 게임의 수사가 현실의 어떤 면은 은폐하고 또 다른 면은 미화하고 있지는 않은지, 그리고 이것이 게임을 즐기는 사람에게 어떻게 해석될지는 고민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전쟁게임을 만들어 놓고 이 게임에서는 말이 잡힐 때 병사가 죽는 게 아니라 포로로 잡히는 거라고 말한다고 해서 그것이 더 평화적인 게임이 되지는 않는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민감한 소재를 애써 회피하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게임’보다는 현실을 불편함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게 해주는 게임일 것이다. 물론 그것이 일단 재미있다는 가정 하에 말이다.


  1. Sebastian Atay, The Rhetoric of Puerto Rico, Memory Insufficient, July 2013. [본문으로]
  2. Katie Salen & Eric Zimmerman, Rules of Play: Game Design Fundamentals, 2003. [본문으로]
  3. Ian Bogost, Persuasive Games, 2010.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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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을 한해를 가장 뜨겁게 달군 게임이 무엇일까? 아무래도 천만 명이 넘는 스마트폰 사용자가 직접 즐겼고 게임 마니아가 아니라도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봤을 모두의마블이 아닌가 싶다. 2013 한국 게임대상 지스타에서 모바일게임 부문 인기상을 받기도 한 이 게임은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1982년작 국산 보드게임 부루마불을 원형으로 삼고 있다.


어디 가서 보드게임을 좋아한다고 하면 부루마불 같은 거요?”라는 말을 들을 그 정도로 부루마불은 한국에서 보드게임의 대명사라 할 만하다. 그런데 부루마불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외국 보드게임 모노폴리를 베꼈고, 모노폴리 역시 다른 게임을 고스란히 베꼈다. 1930년대 미국에서는 모노폴리와 같은 형식의 게임들이 유행했는데 그 중 최초가 바로 엘리자베스 매기가 1902년에 만든 지주게임(The Landlord’s Game)’이었다.


원래 지주게임은 토지사유제의 부조리를 비판하고 헨리 조지의 토지공개념 사상을 알리고자 만들어진 교육용 게임이었다. 매기는 1935년 지주게임에 대한 특허를 파커브라더스사에 500달러에 팔았다. 당시 파커브라더스는 찰스 대로의 모노폴리를 유통하기 시작하면서 독점적 판매권을 확보하기 위해 관련 특허를 사들이고 있었다. 이후 모노폴리는 수십 가지 판본으로 만들어져 전 세계적으로 25천만 개가 넘게 팔렸다. 이 모노폴리의 원작이 세월을 거치며 어떤 풍파를 겪어 왔는지 살펴보겠다.


2013년 한해를 휩쓴 모두의마블

 

지주게임에는 완전히 다른 두 가지 규칙이 있었다. 하나는 오늘날의 지배적인 사업 방식에 기초하여 토지 독점자가 모든 것의 절대적 통제권을 가지게 되는 이 체제의 논리적 귀결을 보여줌으로써 토지 독점자가 세계의 군주라는 진실을 알리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이것이 바로 100년이 지난 지금 우리가 즐기는 유일한 규칙이다.


다른 하나는 이른바 단일세 규칙(Single Tax Rules)’으로 생필품에 대한 세금인 간접세가 면제되며, 철도·수도·전기 같은 공익사업이 공영화되고, 모든 지대는 개인의 금고가 아닌 국고로 납부되어 공공개발에 사용된다. 침범 시 감옥으로 보내지는 귀족 가문의 사유지는 정부에 몰수되어 무상대학부지로 사용된다. 마지막으로 노동 기회의 원천인 토지에 대한 접근권이 모든 사람에게 있기에그 필요성이 사라진 빈민 구제소는 폐지된다.


지주게임(1904)과 모노폴리(2008)의 게임판


모노폴리에서 각 플레이어의 목표는 자신을 제외한 다른 모든 사람을 파산시키는 것이다. 한편 지주게임에는 파산의 개념이 없었다. 대신에 비용을 지불할 현금도, 대출을 받을 능력도, 저당 잡히거나 매각할 토지도 없는 사람을 위한 빈만 구제소가 있어 돈이 없는 사람도 게임에서 낙오되지 않고 비굴하게나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앞서 말했다시피 지공주의 사상을 구현한 단일세 규칙에서는 빈민 구제소의 필요조차 사라졌다.


1933년에 만들어진 모노폴리 초판에도 모든 토지를 저당 잡히고 현금이 $100 미만인 사람에게 찬스, 보물상자, 세금 등에서 발생하는 모든 비용을 면제해주는 구빈제도가 선택규칙으로 있었다. 다만 이것은 은행에 내는 돈에만 해당되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지불해야 할 지대는 면제되지 않는다. 따라서 파산을 조금 늦출 순 있을지언정 피할 수는 없다. 애초 모노폴리는 다른 모든 사람을 파산시키고 최후의 독점자로 남는 것이 게임의 목적이 아닌가! 파커브라더스가 출판한 1939년판 모노폴리에서는 이런 구빈제도마저 자취를 감췄다.


이후 표준으로 자리 잡은 모노폴리 애틀랜틱시티 판에서는 세제에 있어서 약탈적 자본주의의 요소가 더욱 두드러졌다. 일률적으로 재산의 10%였던 재산세가 “200달러 또는 재산의 10%”로 바뀐 것이다. 즉 재산이 2000달러 미만일 때는 10%의 고정세율이 적용되고 그 이상일 때는 200달러의 고정액을 내는 것으로, 누진세는커녕 과세금액이 늘어날수록 세율이 줄어드는 역진세인 것이다. 2008년 개정판에서는 이조차 계산이 번거롭다는 이유로 200달러 고정의 인두세로 바뀌면서, 부자에게나 빈민에게나 똑같은 액수의 세금을 거두는 잔혹한 세금제도가 자리 잡게 되었다.


안티모노폴리


게임의 규칙이 아닌 제목과 관련된 일화도 흥미롭다. 1973년 샌프란시스코주립대 경제학 교수 랠프 안스팍은 안티모노폴리(Anti-monopoly)’라는 이름의 게임을 출판했다. 마치 독점이 바람직하다는 인상을 주는 주류 게임에 대항하여, 독점이 자유기업제도에 얼마나 해롭고 반독점법이 어떻게 이를 규제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그의 의도였다.


이에 모노폴리의 유통사인 파커브라더스는 그를 상표권 침해로 고소했다. 장기간 진행된 공판에서 안스팍은 모노폴리가 매기의 지주게임을 표절했다는 사실을 밝혀냈고 법원도 이 사실을 인정했다. 1979년 항소심은 독점을 뜻하는 모노폴리(monopoly)’가 일반명사이므로 상표권 침해가 아니라는 판결을 내렸고, 대법원이 상고를 기각함으로써 판결이 확정되었다. 하지만 뒤이은 법 개정으로 파커브라더스가 다시 상표권을 가지게 되었고, 결국 양측은 1984년에 합의에 도달해 안티모노폴리라는 이름을 다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분쟁이 진행되는 동안 이 게임은 안티(Anti)’라는 이름으로 유통되어야 했다.


이후 안스팍은 한 좌익 게임이 거대 기업에 의해 어떻게 무자비한 자본주의의 상징으로 탈바꿈되었는지”, “원작자가 파커브라더스에 의해 어떻게 이용되고 배신당하고 버려졌는지그리고 이 사기가 어떻게 뇌물과 위증과 매수에 의해 은폐되었는지에 대한 진실을 책으로 썼다.


추억의 부루마불


모노폴리가 부루마불을 거쳐 모두의마블이 되면서 규칙은 더욱 단순해지고 게임 시간은 크게 짧아졌다. 한자리에 앉아 얼굴을 맞보고 느긋하게 유희를 즐기는 것이 아니라 지하철과 버스를 타고 바삐 오가며 틈틈이 여가를 소비하는 현대 도시인의 삶에 게임이 적응한 것일 수도 있겠다. 놀면서까지 머리를 쓰기에는 일상이 너무 각박하지 않은가.


게이머의 입장에서 모두의마블의 등장과 인기는 호재인 동시에 악재이다. 보드게임이 모바일 기반으로 제작되어 많은 사람이 즐길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기쁘지만, 게이머들에게 오랜토록 사랑받는 게임들은 점차 사라지고 모두의마블처럼 전략적 마케팅으로 시장에서 반짝했다가 금세 묻히는 게임들이 게임계를 지배해가는 것 같아 안타깝다. 반독점 게임이었던 지주게임이 모노폴리로 대체되어 게임 시장을 독점한 역설처럼, 놀이하는 인간들의 안식처도 현실의 억압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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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을 통해 평화를 만드는 게 가능할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을 대신하여 한 가지 게임을 소개하고자 한다.[각주:1]


세계평화게임(World Peace Game)’은 미국의 공립 초등학교 교사 존 헌터(John Hunter)가 만든 대화형 게임이다. 헌터는 1978년에 이 게임의 원형을 처음 만들었고 지금까지 세계를 돌아다니며 게임을 주최하고 있다. 그의 활동은 <세계평화와 4학년의 업적(World Peace and Other 4th-Grade Achievements)>이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 영화를 통해 널리 알려졌다. 헌터는 2012년에 타임지가 선정한 교육운동가 12인에 선정되기도 했다.


세계평화게임을 하는 존 헌터와 학생들

 

세계평화게임은 가로·세로·높이 4피트 크기의 4층짜리 아크릴 구조에서 진행되며, 각 층은 외우주와 대기, 지표, 해저를 상징한다. 거기에 경제력과 군사력이 서로 다른 4개 국가의 영토와 영공, ··공군, 인공위성, 잠수함, 해저광산 등이 있다. 40여 명의 학생이 각국의 수상, 국무장관, 국방장관, 재무장관, 감사원장 등을 맡아 내각을 구성하고, 역할 중에는 유엔이나 세계은행, 무기상인도 있다.


게임의 목표는 이 가상세계에서 일어나는 민족 갈등, 화학물질 누출, 핵 확산, 물 분쟁, 분리·독립 운동, 기근, 동물의 멸종, 지구온난화와 같은 위기상황을 함께 해결하고, 각국의 경제수준을 높이는 것이다. 학생들은 게임을 통해 권력과 파괴, 전쟁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이해하고 장기적 계획과 전략을 세우는 법을 배운다.


대화형(interactive)’ 게임이기에 엄밀하게 짜이고 문서화된 규칙은 없다. 게임을 주도하는 것은 학생들이며, 교사는 지켜보면서 상황을 정리하고 촉진하는 역할만 한다. 헌터는 처음 교편을 잡았을 때 교사가 수업을 통제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결코 그래서는 안 된다는 믿음이 생겼다고 한다. 그는 학생들의 집단지성이 자신보다 훨씬 더 훌륭하다고 인정한다. 헌터는 게임에서 실제로 일어난 몇 가지 흥미로운 사례를 소개한다.


사례 1:


한 학생이 가장 가난한 나라의 국방장관을 맡고 있었다. 그 나라의 이웃에는 돈도 많고 기름도 풍부한 나라가 있었다. 그런데 그 학생이 갑자기 수상의 명령도 어기고 인접국의 유전지역을 공격했다. 학생은 그곳을 포위해 총 한 발 쏘지 않고 지역을 확보했다. 인접국은 연료공급이 차단되어 어떠한 군사행동도 취할 수 없었다. 다른 아이들은 화를 냈다.


며칠 뒤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다. 인접한 강대국이 전 세계를 점령하기 위해 무력도발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학생은 사태의 추이를 누구보다 먼저 파악하고, 대규모 전쟁을 피하기 위해 소규모 전쟁을 감행하는 냉철한 판단을 내렸던 것이다. 학생들은 게임을 멈추고 그의 판단이 옳았는지 조건에 따라 옳고 그름을 따져보는 토론의 시간을 가졌다.


사례 2:


플라스틱 말로 표시되는 병사들이 전쟁에서 사망하면, 군사령관이 병사들의 가상의 부모에게 편지를 쓰는 시간을 가진다. 한 번은 학생의 제안으로 수업을 참관하던 학부모가 직접 편지를 읽게 되었다. 편지의 세 번째 줄을 읽으면서 학부모는 울음을 터뜨렸다. 전투에서 병사를 잃었다면 전쟁에서 승리해도 기쁘지 않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게 되었다. 어떤 의미에서 모두가 전쟁에서 졌다는 사실을 말이다.


사례 3:


방과 후에 틈틈이 7주 동안 진행된 게임에서 세계은행의 재정정책 때문에 한 나라가 시작할 때보다 더 가난해졌다. (게임의 목표는 위기상황을 해결하고 각국의 경제수준을 높이는 것이다.) 게임을 마칠 시간이 1분도 채 안 남았고 교실은 혼란에 빠졌다. 소리를 지르거나 삿대질을 하는 학생도 있었고, 서류뭉치를 흔들거나 교실을 뛰어다니는 학생도 있었다.


그때 한 학생이 종을 울리며 이렇게 말했다. “세계은행이 모든 자금을 끌어 모아서 모든 나라가 가난해졌습니다. 지금 세계은행에는 6000억 달러가 있습니다. 이 돈을 가난한 나라에 기부하려고 합니다. 만약 그 나라가 이걸 수용하면 국가의 자산가치가 올라가고, 그럼 우리는 게임을 이기게 됩니다.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시간이 3초 정도 남았을 때였다. 모두 그 나라의 수상만 바라보고 있었다. “.” 게임은 이긴 것으로 끝났다.


교육용 게임은 많다. 재밌는 것이 드물 뿐.


게임은 교과서와 다르다. 게임에서 학습자는 평화란 무엇인가라든지 평화를 어떻게 만드는가와 같이 주어진 문제에 대한 주어진 답을 저축하듯이 암기하지 않는다. 문제를 만드는 것도 그에 대한 답을 구성하는 것도 플레이어 자신과 동료들이다. 이는 게임의 본질이 바로 플레이어의 ‘능동적 참여’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게임의 재미라는 요소가 바로 이러한 참여를 유도한다. 여기서 우리는 맨 앞의 질문에 대한 모종의 답을 상상할 수 있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헌터의 말을 인용하며 글을 마친다.

 

매 게임이 다릅니다. 어떤 게임에서는 사회문제가 중요하고, 어떤 게임에서는 경제문제가 중요합니다. 어떤 게임에서는 전쟁문제가 대두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부정하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게 인류의 현실이니까요. 학생들은 무엇이 옳은 길인지 자기들만의 방법으로 스스로 찾아냅니다. 게임을 통해 저도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만약 학생들이 이 게임을 통해 비판적이고 창조적인 사고방식을 배우고 세상을 이롭게 할 동력을 얻게 된다면, 우리 모두를 구원할지도 모릅니다. 게임을 통해 배울 수만 있다면 말이죠.


*세계평화게임과 이를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 영화 <세계평화와 4학년의 업적>에 대한 더 자세한 정보는 공식 페이지(theworldpeacegame.com)에서 얻을 수 있다.


  1. 이 글은 존 헌터의 TED 강연 영상을 바탕으로 쓰였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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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을 만하면 떠오르는 게 비디오게임의 폭력성 논란이다. 폭력을 소재로 한 게임이 그것을 플레이하는 사람의 폭력적 행위를 유발하는가? 솔직히 잘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인기 있는 게임의 대부분이 때리고 부수고 죽이거나 돈을 많이 버는 것이 목적인, 즉 폭력적이거나 자본주의적인 게임이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나는 종종 이런 게임들을 즐겨도 괜찮은 건지 고민에 빠지곤 한다.


게다가 그중 다수는 현실의 구체적 부조리를 철저히 왜곡하고 은폐한다. 전쟁과 자본증식에 따르는 민간인의 희생이나 피착취계급의 고통은 게임에서 비본질적인 요소로 간주되어 추상화되거나 삭제된다. 작가나 플레이어의 의도와 관계없이 현상의 멋지고 그럴듯한 일면만이 재현되고 강조된다. 마틴 월러스(Martin Wallace)는 19세기 영국 콘월 지방의 광업을 다룬 보드게임 ‘티너스 트레일(Tinners' Trail)’의 작가 후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무리 복잡한 규칙을 갖추었더라도 게임은 현실의 추상화이다. 이 게임도 예외가 아니어서 많은 ‘역사’를 빼버려야 했다. 대표적인 예로는 다이너마이트의 사용과 갱내 승강기[각주:1]의 발명, 광산 폐쇄에 따른 대량의 실업이 있다.


그렇다고 이런 매체를 규제하거나 검열하는 게 해답일까? 전쟁을 미화하는 영화가 싫다고 전쟁을 소재로 한 영화를 모조리 금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소위 음란물을 규제한다고 성기 노출이나 섹스의 묘사를 일괄적으로 금지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더군다나 현행의 사전 검열 제도는 목적의 정당성을 떠나 표현의 자유를 침해함으로써 수단의 정당성을 결여한 방법이다. 그럼 대안은 무엇일까?


비디오게임에 국한된 이야기지만, 게임도 영화나 만화처럼 국가의 심의와 검열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잠시 화제를 돌려 내가 요즘 즐겨 하는 보드게임[각주:2]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보드게임 역시 어떤 면에서는 비디오게임과 크게 다르지 않아서 전쟁과 돈벌이를 소재로 한 것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드게임은 비디오게임에 비해 대체로 덜 폭력적이고 덜 자본주의적이다. 보드게임이 비교적 ‘점잖은’ 사람들의 취미이기 때문인지, 얼굴을 맞대고 모여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하는 놀이이기 때문인지 이유는 잘 알 수 없지만 말이다. 한번 예시를 들어보자.


독점을 뜻하는 ‘모노폴리(Monopoly)’라는 게임을 들어봤을 것이다. 아마 한국에서 안 해본 사람이 드물 ‘부루마불’의 원조이자 모든 현대 보드게임의 시조격인 게임이다. 하지만 ‘모노폴리’의 전신이 토지사유제를 비판하는 정치적 목적의 게임이었음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리지 매기(Lizzie Magie)는 자본주의적 독점의 폐해와 헨리 조지의 토지공개념 사상을 알리고자 ‘지주 게임(The Landlord’s Game)’을 만들었다. 결국 원작자의 의도와 무관하게 게임이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둬 보드게임 시장을 독점하다시피 한 것은 아이러니다.


물론 이것은 아주 예외적인 경우에 속하고, 오늘날 상용화된 게임의 대다수가 지주 게임처럼 대놓고 ‘이념적’이지는 않다. 그럼 실제로 요즘 보드게이머들 사이에 인기 있는 게임들을 살펴보자. 다음에 소개할 것은 2014년 현재 보드게임긱(boardgamegeek.com) 커뮤니티에서 한 손 안에 꼽히는 순위를 달리고 있는 게임들이다.


황혼의 투쟁 - 지도만 봐도 게임의 방대한 스케일이 느껴지지 않는가?


‘황혼의 투쟁(Twilight Struggle)’은 20세기 중후반 미소 냉전을 배경으로 한다. 탱크나 보병, 전투기 등이 직접 등장하지는 않지만, 정치공작과 쿠데타 기도 등을 통한 양 초강대국의 패권 다툼을 다루고 있다. 그런데 게임이 진행되는 와중에 미소 간의 갈등이 지나치게 고조되어 핵전쟁이 일어나면 게임은 즉시 종료된다. 흥미로운 점은 이유 여하 간에 핵전쟁의 원인을 제공한 쪽이 무조건 패배한다는 사실이다. 작가는 자신이 가장 많이 영향받은 게임 중 하나인 크리스 크로포드(Chris Crawford)의 ‘힘의 균형(Balance of Power)’에 나오는 유명한 문구를 빌려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핵전쟁을 촉발했습니다. 하늘에 나뒹구는 시체 조각들과 버섯 구름 따위의 애니메이션은 제공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실패를 장려하지 않습니다.


‘쓰루 디 에이지스(Through the Ages)’는 특유의 중독성으로 악명(?) 높은 비디오게임 ‘시드 마이어의 문명(Sid Meier's Civilization)’의 보드게임 판이라고 할 만하다. 역사적으로 문명의 발전에서 문화, 정치, 과학 등과 더불어 군사가 빼놓을 수 없는 요소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비디오게임 문명에서 군사의 운용이 게임 플레이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데 반하여, 이 게임에서 침략과 전쟁은 카드 한 장으로 간략하게 표현된다.


작가는 아예 “쓰루 디 에이지스는 침략에 관한 게임이 아니”며 “무력을 통해 게임에서 승리하기는 어렵다”고 밝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사력은 게임에서 여전히 중요한 요소인데, 실제로 전쟁이 일어나지 않더라도 전쟁의 위협이 있는 한 이를 소홀히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마저도 마음에 들지 않는 이들을 배려해서 작가는 게임에서 침략과 전쟁의 요소를 완전히 배제한 ‘평화적인 변형규칙’까지 마련해놓았다.


마지막으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게임인 ‘아그리콜라(Agricola)’는 경제학적 의미의 상품도 없고 화폐도 없는 전(前)자본주의적인 자급자족적 농촌생활을 소재로 한다. 분쟁이나 권모술수의 요소가 없음은 물론이다. 보기 드물게 그야말로 평화적이고 전원적인 테마의 게임이다. 척박한 환경에서 먹고 살기가 워낙 팍팍해서 어떤 의미에서는 그다지 평화적이지만도 않지만 말이다.


아그리콜라 - 게임이 끝나고 알차게 가꿔진 농장을 보면 마음이 뿌듯하다.


그 밖에 처음부터 플레이어 간의 경쟁이 아니라 협력과 공생을 목표로 하는 게임도 있다. 일례로 ‘팬데믹(Pandemic)’에서는 플레이어들이 질병 전문가가 되어 치명적인 전염병으로부터 세계를 구한다. ‘플래시 포인트(Flash Point)’에서는 소방관이 되어 화재를 진압하고 사람들을 구출한다. 최근에는 독일의 어린이 과학잡지 게오리노(GEOlino)가 세계 최초의 ‘녹는’ 보드게임 ‘멜트다운(Meltdown)’을 개발했다. 플레이어들이 북극곰 가족이 되어 얼음이 녹기 전에 안전한 곳으로 가는 게 목적인 협력게임이다.


어쩌면 방금 소개한 게임들에 반영된 시각도 ‘진정한 평화’와는 다소 거리가 있을지 모른다. 그래도 나는 이만하면 진일보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어쨌든 내가 보드게임에서 발견한 것은 ‘작은 희망’이다. 이렇게 말하면 너무 거창할지 모르지만 취미와 문화가 우리의 평화를 옹호하고, 신념과 재미가 상호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양립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했다고나 할까? 이런 평화적인 놀이 문화가 자리 잡기 위해서는 문화 생산자와 소비자 모두의 자발적이고 의식적인 노력이 동반되어야 할 것이다.


취미를 가진 사람의 대개가 그러하듯 나 역시 언젠가는 취미의 소비자가 되는 데 그치지 않고 생산자가 되어 정말 나만의 게임을 만들고픈 욕심이 있다. 여기에 내가 생각하는 평화의 관점까지 담을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그래서 틈틈이 게임을 만들고 있는데 아직 구색을 갖춘 것은 별로 없다. 솔직히 ‘오적(五賊)’이나 한강의 기적 같은 제목의 게임이 출판될 수나 있을지 의문이지만, 언젠가 이 게임들이 빛을 볼 수 있길 바란다.


  1. 1919년 레반트 광산에서 노후한 갱내 승강기(man engine)가 붕괴되어 광부 31명이 목숨을 잃는 사고가 발생했다. 그 밖에도 1846년 이스트휠로즈에서 침수로 39명이 익사하는 등 콘월 지역에서만 여러 번의 광산 사고가 있었다. 20세기 초까지 미국에서만 매년 천 명 이상이 광산 사고로 사망했다. [본문으로]
  2. 보드게임이란 비디오게임과 달리 앉은 자리에서 놀이판과 말, 주사위, 카드 등 물리적인 도구를 주로 사용하여 진행되는 놀이를 말한다. 넓게 생각하면 명절에 하는 화투나 윷놀이도 보드게임의 일종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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