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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09.05 보드게임에서 발견한 평화

잊을 만하면 떠오르는 게 비디오게임의 폭력성 논란이다. 폭력을 소재로 한 게임이 그것을 플레이하는 사람의 폭력적 행위를 유발하는가? 솔직히 잘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인기 있는 게임의 대부분이 때리고 부수고 죽이거나 돈을 많이 버는 것이 목적인, 즉 폭력적이거나 자본주의적인 게임이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나는 종종 이런 게임들을 즐겨도 괜찮은 건지 고민에 빠지곤 한다.


게다가 그중 다수는 현실의 구체적 부조리를 철저히 왜곡하고 은폐한다. 전쟁과 자본증식에 따르는 민간인의 희생이나 피착취계급의 고통은 게임에서 비본질적인 요소로 간주되어 추상화되거나 삭제된다. 작가나 플레이어의 의도와 관계없이 현상의 멋지고 그럴듯한 일면만이 재현되고 강조된다. 마틴 월러스(Martin Wallace)는 19세기 영국 콘월 지방의 광업을 다룬 보드게임 ‘티너스 트레일(Tinners' Trail)’의 작가 후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무리 복잡한 규칙을 갖추었더라도 게임은 현실의 추상화이다. 이 게임도 예외가 아니어서 많은 ‘역사’를 빼버려야 했다. 대표적인 예로는 다이너마이트의 사용과 갱내 승강기[각주:1]의 발명, 광산 폐쇄에 따른 대량의 실업이 있다.


그렇다고 이런 매체를 규제하거나 검열하는 게 해답일까? 전쟁을 미화하는 영화가 싫다고 전쟁을 소재로 한 영화를 모조리 금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소위 음란물을 규제한다고 성기 노출이나 섹스의 묘사를 일괄적으로 금지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더군다나 현행의 사전 검열 제도는 목적의 정당성을 떠나 표현의 자유를 침해함으로써 수단의 정당성을 결여한 방법이다. 그럼 대안은 무엇일까?


비디오게임에 국한된 이야기지만, 게임도 영화나 만화처럼 국가의 심의와 검열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잠시 화제를 돌려 내가 요즘 즐겨 하는 보드게임[각주:2]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보드게임 역시 어떤 면에서는 비디오게임과 크게 다르지 않아서 전쟁과 돈벌이를 소재로 한 것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드게임은 비디오게임에 비해 대체로 덜 폭력적이고 덜 자본주의적이다. 보드게임이 비교적 ‘점잖은’ 사람들의 취미이기 때문인지, 얼굴을 맞대고 모여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하는 놀이이기 때문인지 이유는 잘 알 수 없지만 말이다. 한번 예시를 들어보자.


독점을 뜻하는 ‘모노폴리(Monopoly)’라는 게임을 들어봤을 것이다. 아마 한국에서 안 해본 사람이 드물 ‘부루마불’의 원조이자 모든 현대 보드게임의 시조격인 게임이다. 하지만 ‘모노폴리’의 전신이 토지사유제를 비판하는 정치적 목적의 게임이었음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리지 매기(Lizzie Magie)는 자본주의적 독점의 폐해와 헨리 조지의 토지공개념 사상을 알리고자 ‘지주 게임(The Landlord’s Game)’을 만들었다. 결국 원작자의 의도와 무관하게 게임이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둬 보드게임 시장을 독점하다시피 한 것은 아이러니다.


물론 이것은 아주 예외적인 경우에 속하고, 오늘날 상용화된 게임의 대다수가 지주 게임처럼 대놓고 ‘이념적’이지는 않다. 그럼 실제로 요즘 보드게이머들 사이에 인기 있는 게임들을 살펴보자. 다음에 소개할 것은 2014년 현재 보드게임긱(boardgamegeek.com) 커뮤니티에서 한 손 안에 꼽히는 순위를 달리고 있는 게임들이다.


황혼의 투쟁 - 지도만 봐도 게임의 방대한 스케일이 느껴지지 않는가?


‘황혼의 투쟁(Twilight Struggle)’은 20세기 중후반 미소 냉전을 배경으로 한다. 탱크나 보병, 전투기 등이 직접 등장하지는 않지만, 정치공작과 쿠데타 기도 등을 통한 양 초강대국의 패권 다툼을 다루고 있다. 그런데 게임이 진행되는 와중에 미소 간의 갈등이 지나치게 고조되어 핵전쟁이 일어나면 게임은 즉시 종료된다. 흥미로운 점은 이유 여하 간에 핵전쟁의 원인을 제공한 쪽이 무조건 패배한다는 사실이다. 작가는 자신이 가장 많이 영향받은 게임 중 하나인 크리스 크로포드(Chris Crawford)의 ‘힘의 균형(Balance of Power)’에 나오는 유명한 문구를 빌려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핵전쟁을 촉발했습니다. 하늘에 나뒹구는 시체 조각들과 버섯 구름 따위의 애니메이션은 제공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실패를 장려하지 않습니다.


‘쓰루 디 에이지스(Through the Ages)’는 특유의 중독성으로 악명(?) 높은 비디오게임 ‘시드 마이어의 문명(Sid Meier's Civilization)’의 보드게임 판이라고 할 만하다. 역사적으로 문명의 발전에서 문화, 정치, 과학 등과 더불어 군사가 빼놓을 수 없는 요소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비디오게임 문명에서 군사의 운용이 게임 플레이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데 반하여, 이 게임에서 침략과 전쟁은 카드 한 장으로 간략하게 표현된다.


작가는 아예 “쓰루 디 에이지스는 침략에 관한 게임이 아니”며 “무력을 통해 게임에서 승리하기는 어렵다”고 밝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사력은 게임에서 여전히 중요한 요소인데, 실제로 전쟁이 일어나지 않더라도 전쟁의 위협이 있는 한 이를 소홀히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마저도 마음에 들지 않는 이들을 배려해서 작가는 게임에서 침략과 전쟁의 요소를 완전히 배제한 ‘평화적인 변형규칙’까지 마련해놓았다.


마지막으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게임인 ‘아그리콜라(Agricola)’는 경제학적 의미의 상품도 없고 화폐도 없는 전(前)자본주의적인 자급자족적 농촌생활을 소재로 한다. 분쟁이나 권모술수의 요소가 없음은 물론이다. 보기 드물게 그야말로 평화적이고 전원적인 테마의 게임이다. 척박한 환경에서 먹고 살기가 워낙 팍팍해서 어떤 의미에서는 그다지 평화적이지만도 않지만 말이다.


아그리콜라 - 게임이 끝나고 알차게 가꿔진 농장을 보면 마음이 뿌듯하다.


그 밖에 처음부터 플레이어 간의 경쟁이 아니라 협력과 공생을 목표로 하는 게임도 있다. 일례로 ‘팬데믹(Pandemic)’에서는 플레이어들이 질병 전문가가 되어 치명적인 전염병으로부터 세계를 구한다. ‘플래시 포인트(Flash Point)’에서는 소방관이 되어 화재를 진압하고 사람들을 구출한다. 최근에는 독일의 어린이 과학잡지 게오리노(GEOlino)가 세계 최초의 ‘녹는’ 보드게임 ‘멜트다운(Meltdown)’을 개발했다. 플레이어들이 북극곰 가족이 되어 얼음이 녹기 전에 안전한 곳으로 가는 게 목적인 협력게임이다.


어쩌면 방금 소개한 게임들에 반영된 시각도 ‘진정한 평화’와는 다소 거리가 있을지 모른다. 그래도 나는 이만하면 진일보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어쨌든 내가 보드게임에서 발견한 것은 ‘작은 희망’이다. 이렇게 말하면 너무 거창할지 모르지만 취미와 문화가 우리의 평화를 옹호하고, 신념과 재미가 상호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양립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했다고나 할까? 이런 평화적인 놀이 문화가 자리 잡기 위해서는 문화 생산자와 소비자 모두의 자발적이고 의식적인 노력이 동반되어야 할 것이다.


취미를 가진 사람의 대개가 그러하듯 나 역시 언젠가는 취미의 소비자가 되는 데 그치지 않고 생산자가 되어 정말 나만의 게임을 만들고픈 욕심이 있다. 여기에 내가 생각하는 평화의 관점까지 담을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그래서 틈틈이 게임을 만들고 있는데 아직 구색을 갖춘 것은 별로 없다. 솔직히 ‘오적(五賊)’이나 한강의 기적 같은 제목의 게임이 출판될 수나 있을지 의문이지만, 언젠가 이 게임들이 빛을 볼 수 있길 바란다.


  1. 1919년 레반트 광산에서 노후한 갱내 승강기(man engine)가 붕괴되어 광부 31명이 목숨을 잃는 사고가 발생했다. 그 밖에도 1846년 이스트휠로즈에서 침수로 39명이 익사하는 등 콘월 지역에서만 여러 번의 광산 사고가 있었다. 20세기 초까지 미국에서만 매년 천 명 이상이 광산 사고로 사망했다. [본문으로]
  2. 보드게임이란 비디오게임과 달리 앉은 자리에서 놀이판과 말, 주사위, 카드 등 물리적인 도구를 주로 사용하여 진행되는 놀이를 말한다. 넓게 생각하면 명절에 하는 화투나 윷놀이도 보드게임의 일종이다. [본문으로]
Posted by 人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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