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해 보겠습니다.

 

 

고통 없이 죽는다면

 

멸종이란 말은 그 자체로 어딘가 매력적이다. 죽음만이라도 평등할 수 있다면, 그래서 고통의 토양 자체를 없앨 수 있다면. 어쩌다 운이 좋으면 리셋이 될지도 모른다는 착각. 버티기 힘든 불안한 삶에 멸종은 마지막으로 꿈꿀 수 있는 행복한 파멸이다. 가장 완벽한 디스토피아적 유토피아.

멸종이란 단어 자체에 매혹을 느낀다면 <EBS 다큐10+ 지구대멸종> 시리즈를 보자. 그 중에도 제3[백악기의 소행성 충돌]을 꼭 챙겨보길. <지구대멸종> 시리즈는 지구 역사에 존재했던 5번의 대멸종을 다루는데 그 양상을 매우 구체적으로 묘사한다. CG기술 발달로 멸종의 순간은 초단위로 생생하게 재현된다. 그 중에서도 공룡이 사라졌던 백악기 대멸종에 대한 묘사는 멸종 판타지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반경 10km가 넘는 거대한 운석이 총알보다 20배 빠른 속도로 날아와 지구와 충돌한다. 숫자를 동원한 각종 비유가 파멸의 크기를 가늠하게 해준다. 멕시코만을 강타한 충돌로 48km 깊이의 구덩이가 발생하고 수소폭탄 1억 개에 해당하는 에너지가 발생한다. 반경 160km 안에 있는 물이 모두 증기로 변한다. 바위는 부서지는 과정을 건너뛰고 곧바로 기화된다. 음속보다 빠른 충격파가 북미 대륙으로 퍼져나간다. 인류역사상 경험한 적 없는 진도 13의 강진이 발생한다. 시속 960km에 달하는 쓰나미가 동심원 형태로 지구 전역으로 퍼져 나간다. 음속과 맞먹는 속도다. 파도 높이는 300미터에 이른다. 나래이션이 정점을 찍는다.

고통 없이 일찍 죽는 것이 오히려 운이 좋을 상황이다.”

 

충돌 지점 반경 400km안의 모든 생명체는 죽음을 인지하기 전에 사라졌다. 죽음의 순간을 계획할 수 있다면 가장 매혹적인 선택이 아닐런지.

 

삶을 산다는 것, 살아갈 뿐이라는 것

 

차라리 전쟁이나 나버려라. 그냥 다 망해버렸으면 좋겠다는 자조가 넘쳐난다. 넘쳐나는 말은 관용어가 되면 그 다음부터 의미가 변형된다. 망했다는 말이 일상이 되면 정말 망했음을 표현할 말이 빈약해진다. 망했다는 말로는 망했음을 표현할 수 없는 세상에서는 더 처절하게 망했음을 표현할 말들이 필요하다. 멸종이나 멸망은 이런 맥락에서 망했다는 말보다 더 망했음을 표현한다. 그런데 멸종에 대한 환상을 산산조각내는 소설, 망했는데도 계속 살아보라는 소설이 있다. 황정은 <계속해 보겠습니다>.

 

살려는 의욕이 제로에 가까운 엄마 애자가 있다. 이름 그대로 사랑을 위해 태어났던 종족, 그리고 사랑이 사라졌을 때 삶도 사라진 종족. 애자는 남편 김금주가 공장 톱니바퀴에 말려들어 죽고 난 후 멸망 상태에 돌입했다.

 

애초 반대하던 결혼이었고 이쪽엔 제사 지낼 아들내미 하나 없으므로, 라는 명목으로 사고 합의금을 친가 쪽에서 받아갔고, 애자도 생활에 별 열의가 없어서 애자와 나나와 내겐 금전적인 여유가 없었다. 아버지와 살던 집의 계약이 끝나 집을 비워줘야 할 때가 되었는데 애자는 짐도 꾸리지 않고 나날을 생각에 잠겨 보내고 있었다.

 

죽고 나면 그뿐, 이라면서 세계엔 원한이 가득하다고 애자는 말한다.

 

아빠는 죽었고 엄마는 죽은 듯 산다. 따라서 자매 소라와 나나는 선택의 여지없이 서로 의지하며 살아야 한다. 둘 사이 끼어든 또 다른 존재. 옆 집 사는 나기와 나기 엄마 순자. 요양원에 맡겨진 애자를 빼고 나면 이들 넷은 두 집이지만 한 식구처럼 유사가족을 형성하고 산다. 두 집은 지하에 나란히 붙어 있고 화장실을 공유한다. 소라와 나나는 순자의 도시락을 먹으며 성장하고 나기는 그 둘에게 연인인지 가족인지 혹은 그 사이 무엇인지 규정하기 어려운 관계 속에 위치한다.

 

주로 소라와 나나 이야기가 중심인 소설 속에서 삶은 예상대로 고통의 연속이다. 산재 그리고 계속 이어지는 인재. 삶도, 사람도 다 괴로울 뿐인 세상이다. 그리하여 무언가를 싫어할 에너지조차 남아 있지 않은 상태. 삶은 무욕하며 단지 살아낼 뿐인 시간의 집합체다.

 

나는 사람과 접촉하는 게 싫었다. 닿는 것은 싫다. 닿아도 괜찮은 것은 나나와 나기뿐, 나나와 나기뿐이고, 나나와 나기는 그것을 잘 알지. 그것을 잘 아는 나기에게 섹스를 한 지도 일년이.....라고 말해봤자.

 

나는 나나. 나나는 나. 좋아하는 것보다도 싫어하는 것보다도 좋아하지 않는 것이 잔뜩 있습니다.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결국은 비등한 에너지의 소요. 이것저것을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좋아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나기의 삶도 고통스럽기는 매한가지다. 고등학교에서 나기는 소위 왕따였고 동성애자였는데 사랑했던 사람은 자신을 괴롭히는 무리의 중심에 있었다. 나기는 끊임없이 배신당하는 관계 속에서도 사랑을 놓지 못하고 자기혐오를 키우며 성장했다.

 

자신들에게 맞고 있는 몸이기 때문에 혐오했을 것이고 때릴수록 맞고 있는 그 몸에 관한 혐오는 불어나 더욱 때렸을 것이다. 맞아도 맞아도 상황은 끝나지 않을 것처럼 여겨졌다.

너는 개입하지 않았다. 보태지도 않고 말리지도 않았다. 너는 삼분의 일쯤 타다 남은 소파에 앉아 잡지를 읽었다. 나는 너를 보았다. 맞아가면서도 언제나 보는 것처럼 너를 보았다. 이런 순간에도 나를 바라보지 않는 너를 열망하고 원망했다.

 

특별히 살아갈 이유도, 살지 말아야 할 이유도 없었던 소라와 나나와 나기는 한 공간에서 만나 서로를 지탱시켜주는 힘이 된다. 꼬맹이 때부터 서로 아빠가 없다는 사실에 안도할 만큼 셋은 너무 일찍 성장했다. 이들에게 순자의 존재는 각별하다. 순자는 소라와 나나를 만난 순간부터 세 개의 도시락을 쌌다. 도시락은 상징적이다. 근본적으로 인생은 혼자라는 진리를 체득했지만 적어도 부족연맹체 같은 유대감 속에서 안도했고 덕분에 삶은 지속되었다.

 

나나와 나는 소중하게 그것을 먹었다. 성장기였으므로 그 밥을 먹고 뼈가 자랐을 것이다. 뼈에도 나이테라는 것이 있다면 나기네 밥을 먹고 자란 시절의 테가 분명 있을 것이다.

 

봐 이 공간에 셋뿐인데 이렇게 다르잖아. 간장을 좋아하냐 좋아하지 않냐, 하다못해 그런 질문에도 답이 다르잖아. 다 달라. 사소하게도 다르고 결정적일 때도 다르지. 말하자면 나는 간장에 무덤덤한 부족, 소라는 간장을 좋아하는 부족, 나나는 간장을 싫어하는 부족.

 

갈등은 동생 나나가 임신을 하면서 시작된다. 소라는 애가 싫다. 애를 만드는 게 싫다. 나나가 애자와 같은 엄마가 된다는 사실이 싫다. 가족을 늘리는 게 싫다. 관계가 늘어나는 게 싫다. 세대가 이어지고 그 세대로 감정이 전달된다는 게 싫다.

 

아기를 낳는다는 것은 엄마가 된다는 것이고 엄마가 된다는 것은 애자가 되는 것. 회로가 그렇게 꼬여 있다. 생각이 아니고 심정의 영역에서. 그러므로 애초에 아기는 만들지 않는 게 좋다. 아기를 낳지 않는다면 엄마는 없지. 엄마가 없다면 애자도 없어. 더는 없어. 애자는 없는 게 좋다. 애자는 가엾지. 사랑스러울 정도로 가엾지만, 그래도 없는 게 좋아. 없는 세상이 좋아. 나는 어디까지나 소라. 소라로 일생을 끝낼 작정이다. 멸종이야. 소라, 라는 이름의 부족으로.

 

무감한 사람은 괴물이 된다

 

멸종이야 소라.

소라는 진짜 멸종을 꿈꾸지는 못하지만 자기 대에서 관계를 소멸시키려 한다. 그것이 소라에게는 작은 멸종이다. 그런데 나나가 그 기본 전제를 깨려 한다. 나나는 건조한대로 사랑을 시도하고 애를 낳으려 한다. 많은 것을 바라지 않지만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가족을 만드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사랑에 관해서라면 그 정도의 감정이 적당하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이윽고 괜찮아지는 정도. 헤어지더라도 배신을 당하더라도 어느 한쪽이 불시에 사라지더라도 이윽고 괜찮아, 라고 할 수 있는 정도. 그 정도가 좋습니다. 아기가 생기더라도 아기에게든 모세씨에게든 사랑의 정도는 그 정도, 라고 결심 해두었습니다. 애자와 같은 형태의 전심전력, 그것을 나나는 경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새롭게 우리를 만드는 일은 생각보다 고통스럽다. 모세는 성역할 구분이 분명한 보수적 환경에서 자랐고 나나는, 이를테면 요강을 쓰는 사람은 모세 아버지인데 왜 항상 모세 어머니가 요강을 비워야 하는지에 대해 납득하지 못한다. 그 질문을 던졌을 때 무엇이 문제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모세도 납득할 수 없다. 모세 어머니가 아무렇지도 않게 사주를 위해 날짜에 맞춰 수술하고 애를 낳아야 한다는 말도 마찬가지. 요컨대 나나에게 새롭게 다가오는 관계는 폭력적이었다. 남의 감정이나 고통 같은 것은 생각하지 않는 예의 없는 관계는 그 자체로 폭력이다. 나나 자신도 그런 폭력에 둔감할 때가 있었다. 나나에게 무감한 사람은 괴물이 된다고 가르쳐 준 것은 나기다.

 

그 시절에 나나는 작은 동물을 괴롭히며 놀았습니다. 강아지, 고양이, 햄스터, 드물게 기니피그. 꼬리를 밟아본다거나 발바닥을 찔러본다거나 가슴을 눌러본다거나, 괴롭혀서 즐겁다거나 괴롭다거나 도대체 뭘 느끼는 것도 없으면서 멍하게 괴롭혔습니다.

 

아파?

오라버니는 물었습니다.

고개를 끄덕이자 기억해둬, 라고 오라버니는 말했습니다.

이걸 잊어버리면 남의 고통 같은 것은 생각하지 않는 괴물이 되는거야.

 

나나는 헤어지기로 결심한다. 혼자서 애를 키워보려 한다. 이별을 통보받은 모세는 나나를 찾아온다. 흥분한 나머지 나나를 힘으로 제압하고 어째서 헤어지려는 것이냐, 애는 어떻게 하려고 하느냐 따진다. 어깨를 제압당하고 목을 졸린 채 나나는 혼미한 정신상태에서 손을 휘둘러 모세의 빰을 할퀸다. 그리고 때마침 소라가 나타난 덕분에 모세의 손아귀에서 풀려난다. 눈물을 흘리며 언니를 외치는 나나.

멸종은 멸종해가는 과정 그 자체

 

지구 나이는 45억 살 정도 된다. 대략 6억 년 전에 맨눈으로 볼 수 있는 크기의 생물들이 나타났다. 23천만 년 전에 공룡이 등장했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200만 년 전에 등장했으며 현생 인류는 20만 년 전에 나타났다. 급격하게 종이 줄어드는 대멸종은 지금까지 다섯 번 있었다. 가장 심각했던 페름기 대멸종 때는 90%가 넘는 종이 사라졌다. 공룡 멸종으로 유명한 백악기 말 멸종 때는 공룡 100%, 조류 95%, 포유류 90%가 사라졌다. 덩치가 클수록 많이 죽었는데 육지에서 체중이 25kg을 넘는 종은 모두 사라졌다. 지금까지 지구상에 존재했던 생명체 중 99%는 멸종했으며 평균 생존기간은 500만 년이다. 숫자는 때로 그 어떤 설명보다 간명하고 직관적이며 압도적이다.

멸종은 보편적 현상이다. 모든 종은 언젠가 사라진다. 단순하고 명쾌하다. 하지만 멸종의 국면에 대해서 우리는 생각보다 아는 게 별로 없다. 마치 달력 페이지를 넘기듯 한 시대에서 다른 시대로 훅 넘어간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달력을 찢어 버리면 뭐가 됐든 새 페이지가 열린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멸종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우리 몸이 쇠락 국면을 거쳐 죽어가는 것처럼 수많은 멸종이 말해주는 바, 멸종은 멸종해가는 과정 그 자체다. 그리고 그 과정은 짧아도 수천 년, 길게는 수십만 년도 더 걸린다. 우리에게 멸종은 순간 사라짐이라기보다는 지속되는 매드맥스 와도 같다. 거부할 수 없는 재해가 닥쳐 인간이 멸종 국면에 들어서면 어떻게 될까? 모든 능력과 자원을 동원하여 최후의 일인이 사라질 때까지 멸종은 고통스럽게 오랜 동안 지속될 것이다. 멸종 국면에 이르러도 죽음은 결코 평등하지 않다. 지구의 역사가 숫자로 말해주는 진실이다.

 

나는 예전엔 이런 뉴스를 들으면 지구가 망하나보다, 그렇게 생각하고 별다른 감상이 없었거든. 그런데 요즘엔 그렇게 생각할 수가 없어. 아기가 태어났는데 세상이 그렇게 끝나버리면 너무 억울하잖아. 모처럼 낳았고 모처럼 태어났는데 그냥, 세계가 끝나버린다면.

 

나는 말했다.

공룡이 사라졌잖아.

.

멸종했잖아.

멸종했지.

멸종이라서 한순간에 사라져버린 것 같지만 실은 천만년이 걸렸대.

그랬대?

천만년에 걸쳐 서서히 사라진 거야.

꽤 기네.

길지.

......

그렇게 금방 망하지 않아.

세계는, 하고 덧붙이자 나나가 말했다.

그렇게 길게 망해가면 고통스럽지 않을까.

단번에 망하는 게 좋아?

아니.

그럼 길게 망해가자.

망해야 돼?

그렇게 금방 망하지는 않겠다는 얘기야.

 

다시 멸종을 생각한다. 멸종이라는 진통제로 현실에 닥친 고통을 잊어보려 하지만 그렇게 고통에 둔감해지고 나도 남는 것은 여전히, 그냥 다시 현실이다. 그러니 서로의 고통을 외면하려 하기보다는 같이 아파하는 마음을 놓지 않도록. 그래서 금방 망하지는 않을 테니 뭐라도 꿈꿔볼 수 있는 힘을 계속 지켜낼 수 있도록.

 

Posted by 칸나일파

전쟁게임에서 플레이어는 대개 병사나 지휘관이 되어 임무를 수행한다. 그 임무의 내용이 제국주의 침략이든 인종청소이든 아니면 ‘인도적 개입’ 혹은 ‘정의로운 전쟁’이든 관계없이 말이다. 한편 현대전이 총력전의 양상을 띰에 따라, 전쟁에는 전투원보다 훨씬 더 많은 민간인 행위자가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고 있으며, 갈수록 많은 ‘부수적 피해’가 발생하고 있다.


“1차 세계대전 이후로 전쟁은 군인보다 민간인을 더 많이 죽였다. 1차 세계대전 때는 사망자의 90%가 군인이었고 민간인 사망자는 10%에 불과했다. 2차 세계대전 때는 군인과 민간인 사망자가 거의 반반이었다. 베트남전쟁에서는 사망자 중 70%가 민간인이었고, 최근의 이라크전쟁과 아프가니스탄전쟁에서는 민간이 사망자 비율이 80~85%에 달했다.

-하워드 진, 『역사를 기억하라』


2012년작 ‘스펙 옵스: 더 라인(Spec Ops: The Line)’이 흡사 영화 <지옥의 묵시록>을 연상케 하는 스토리라인으로 기존 전쟁게임의 틀을 벗어났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지만, 이 게임 역시 주인공이 군인이라는 점에서는 예외가 아니었다. 이 점에서 ‘디스 워 오브 마인(This War of Mine)’은 아주 흥미롭다. 여기서 플레이어는 군인이 아닌 민간인이 되어 전쟁의 현실에 내던져진다.


11비트 스튜디오가 2014년 11월 출시한 인디게임 ‘디스 워 오브 마인’


게임은 보스니아 내전 당시의 사라예보를 모델로 한 가상의 도시를 배경으로 진행된다. 플레이어는 전쟁통에 한데 모여 생사고락을 함께 하는 일단의 생존자들을 이끌고 하루하루를 버텨야 한다. 매일 새벽같이 일어나 은신처의 구멍 난 벽을 보수하고, 부서진 잔해를 모아 각종 도구와 몸 누일 데를 만들고, 음식물을 마련하다 보면 금세 날이 어두워진다. 밤이 되면 한 명이 밖에 나가 저격수를 피해 폐허가 된 도시를 헤집으며 물자를 수집하고, 나머지는 약탈에 대비해 불침번을 서며 동료들과 은신처를 지킨다.


수도와 가스를 비롯한 모든 자원의 공급이 끊긴 상태에서, 플레이어는 총을 든 적병과 싸우기에 앞서 굶주림과 추위라는 인류의 원초적인 적과 싸워야 한다. 식수를 마련하기 위해 빗물을 받고, 겨울에는 눈을 녹인다. 겨울철에 땔감은 식료품, 의약품과 함께 가장 구하기 힘든 자원 중 하나이다. 먹을 것은 언제나 모자라 하루에 한 끼나 제대로 먹으면 다행이고, 며칠을 굶다 덫에 걸린 쥐를 날로 먹어야 할 때도 있다.


죽음은 예고 없는 불청객이다. 밤에 버려진 건물을 뒤지다가 불한당의 총에 맞을 수도 있고, 수집을 마치고 새벽에 은신처로 돌아오다가 정부군이나 반군 저격수에게 당할 수도 있다. 병이나 상처를 제때 치료하지 못하면 시름시름 앓다가 결국 죽게 될 것이며, 하나둘 죽어나가는 동료들을 지켜본 생존자는 우울과 절망을 견디다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것이다. 우리네 인생이 그렇듯 이 게임에는 세이브/로드가 없다.



“현대전에서, 당신은 별 이유 없이 개처럼 죽게 될 것이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사람들은 보통 ‘재미’를 위해 게임을 한다. 이 게임의 재미는 어디에 있을까? 액션게임들이 주는 말초적 쾌락이나 멋진 그래픽이 선사하는 심미적 만족은 아닐 것 같다. 최후 생존이라는 목표 달성에 따른 성취감 정도는 있겠다. 하지만 솔직히 디스 워 오브 마인은 즐겁다기보다 우울하다. 시작부터 끝까지 플레이어를 기다리는 것은 어느 하나도 달갑지 않은 몇 가지 상황 중에 어쩔 수 없이 하나를 골라야 하는 윤리적 딜레마의 연속이다.


때로는 생존을 위해 양심을 버려야 한다. 플레이어는 곤경에 처한 외부인에게 도움의 손길을 건넬 수도 있고, 통조림 몇 병을 얻고자 무고한 이웃을 군인들에게 밀고할 수도 있다. 노부부의 집을 강도질하든, 병원에서 붕대와 약을 훔치든, 총칼로 중무장해 군부대를 습격하든 모든 것이 플레이어의 선택에 달렸다. 일반적인 법칙은 몸이 편할수록 마음은 불편해진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마침내 내전이 끝날 때까지 살아남아도 남는 것은 아픈 과거와 공허한 현재뿐이다. 전장에서의 용맹과 활약을 기리는 훈장도, 명예로운 개선 행진도 없다. 디스 워 오브 마인은 지금까지 내가 해본 가장 우울한 게임이었다. 우리가 <쉰들러 리스트>를 ‘재미있는 영화’라고 표현하지 않듯, 이 게임을 ‘재미있는 게임’이라고 부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자들에게 이 게임을 추천한다.


게임 플레이 화면



Posted by 人鬪

결핍 혹은 새로운 세계의 구축


<화성의 인류학자>는 뇌신경과 의사인 올리버 색스가 임상경험을 바탕으로 쓴 사례모음이다. 이 책에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이유로 뇌신경학적 질병에 걸린 환자 7명이 등장한다. 나는 우연히 동네 헌책방에서 이 책을 접했고 소제목을 읽는 순간 책 속에 푹 빠졌다. 몇몇 제목은 다음과 같다. 색맹이 된 화가, 투렛증후군 외과의사, 자폐증을 가진 천재 소년, 화성의 인류학자. 

마음에 담아 두고 싶은 구절들이 너무 많아서 이 곳 저 곳에 밑줄을 긋고 귀퉁이를 접었더니 책이 너덜너덜해지고 말았다. 평소 책읽기 습관과 거리가 먼 방식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를 테면 다음과 같은 구절들 말이다. 


환자에게 어떤 병에 걸렸느냐고 묻기보다는 병에게 어떤 사람을 덮쳤느냐고 물어야 한다. 


의학계의 전통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일종의 ‘사례’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나름의 세계관을 구축한 독특한 인간이기도 하다.


때로는 딱딱하게 정립된 ‘기준’이 아니라 변화된 상황과 욕구에 따라 새로운 조직과 질서를 탄생시키는 유기체의 능력이라는 관점에서 ‘건강’과 ‘질병’의 개념 자체를 재정립해야 하지 않을까 싶을 만큼 감동을 받은 적도 있었다.


뇌신경학에 있어 역사적으로 축적된 다양한 이론, 가설, 실험, 오류에 대한 이야기는 물론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까지 쉼 없이 이야기가 꼬리를 물며 계속된다. 그런데 흐름이 깨지거나 산만해지지 않는다. 수십 년을 한 분야에 전념한 전문가답게 관련 지식이 풍부한 이유도 있지만 병과 환자를 대하는 태도가 중심을 명확히 잡아주기 때문이다.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책이었다거나 또는 그 반대로 감정이 과잉되어 있는 병상일기 같은 글이었다면 굳이 이 책을 소재로 글을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탐구를 멈추지 않는 이 뇌신경학자에게서 받은 감동의 핵심은 병을 대하는 고유한 태도에 있다. 저자가 언급한 환자들은 대부분 원인을 명확히 알 수 없는 뇌신경질환을 앓고 있다. 가벼운 틱장애에서부터 심각한 뇌손상까지 그 정도가 매우 다양하다. 어떤 환자는 색을 잃어버려 세상이 온통 흑백으로만 보이고 어떤 환자는 아무 이유 없이 항상 자신이 행복하다고 느낀다. 세상은 그들에게서 어떤 결핍을 본다. 환자들은 대단히 비정상적이다. 그런데 저자는 그들에게서 새로운 세계가 구축되는 과정을 본다. 


점자를 읽을 때 계속 한 손가락만 쓰면 대뇌피질에서 해당 손가락이 차지하는 부분이 상당히 비대해진다. 그리고 어렸을 때부터 청력을 잃어 수화를 쓰게 되면 청각피질이 시각 정보 처리에 동원되는 등 대뇌의 구조가 대폭 달라진다. 


하지만 그로 인해 스티븐이 작아지거나 재능이 하찮아지는 것은 아니다. 역설적이지만 한계는 장점으로 작용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스티븐은 세계를 아무 편견 없이 똑바로 바라볼 줄 아는 소중한 눈을 가지고 있다. 그는 편협하고 특이하며 독특한 자폐증 환자다. 하지만 그 덕분에 대부분의 사람들과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표현하고 관찰할 수 있다. 


자연의 풍요로움은 건강과 질병의 측면, 인간과 인간이 만든 조직들이 인생의 도전과 변화를 맞닥뜨렸을 때 어떤 식으로 끊임없이 적응하고 스스로 재건하는지의 측면에서 연구해야 하는 대상이다. 이런 관점에서 결함, 장애, 질병은 역설적인 역할을 한다. 평상시에는 보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상상조차 못했던 잠재적인 능력, 성장, 진화, 삶의 형태가 이로 인해 발현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책의 주제는 질병의 역설적인 측면과 숨겨져 있는 ‘창의력’이다.


저자는 이전 지식이 축적되어 온 과학적 방법을 충분히 존중하면서도 새로운 관점에 입각한 시도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호스피스와 의사와 학자로서 필요한 태도를 모두 가지고 있다. 무엇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을까? 그가 휴머니스트이기 때문이 아니다. 또 다른 세계의 구축이라는 완전히 새로운 관점으로 질병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환자는 무언가 결핍된 존재이기 이전에 새로운 세계를 구축해가는 개척자다.(환자라는 표현 말고 다른 표현을 쓰고 싶지만 더 적절한 표현이 떠오르질 않는다.) 그의 몸은 새로운 세계관을 구현하는 지도다. 지도 위에는 끊임없이 새로운 지형이 그려진다. 


삶이 깨어나는 시간


흥미로웠다. 과학적인 태도를 가진 덕분에 가장 인간적인 면모를 지닐 수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관련 정보를 뒤지던 중 저자가 쓴 또 다른 책 <소생(awakenings)>이 영화로 만들어졌고 1991년에 <사랑의 기적>이란 제목으로 국내 개봉도 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영화는 로빈 윌리엄스(말콤 세이어)가 새로운 직장을 찾으면서 시작된다. 연구를 목적으로 원인불명의 뇌신경질환 환자들이 머무르는 요양병원에 취직한다. 그는 의사가 아니라 의학자로 근무하고 싶어하지만 의사가 모자란 병원에서는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세이어 박사를 곧바로 진료에 투입한다. 

병원의 일상은 정지되어 있다. 환자들은 이해 불가능한 특이한 행동을 반복하거나 혹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병원 풍경은 정물화에 가깝다. 병원 밖에서는 계절이 흐르지만 안에서는 시간의 흐름이 느껴지질 않는다. 의료진은 무언가 개선되리라는 생각이 없다. 그저 때 맞춰 밥을 주고 환자를 재우며 관리할 뿐이다.  

외부 자극에 전혀 변화가 없던 환자들이 특정한 자극에만 반응한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아내게 되면서 변화가 시작된다. 떨어지는 물체에만 반응하는 사람, 선이 그어진 바닥에서만 걸음을 옮기는 사람, 특정한 장르의 음악에만 몸을 움직이는 사람 등등. 세이어는 그들을 자극할 수 있는 온갖 실험을 시도한다. 사람들이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하면서 병원도 활기를 찾는다. 관조하던 의료진도 차츰 변화에 동참하기 시작하다. 사람들은 정물화의 캔버스를 찢고 나와 변화무쌍한 장면들을 연출한다. 여기에서 결정적 국면 전환이 시작된다. 

파킨슨병을 치료하는 엘-도파(L-DOPA)라는 신약이 개발되자 세이어는 병원과 환자 가족을 설득해 환자들에게 임상실험을 시작한다. 이 실험의 중심에 레너드(로버트 드 니로)가 있다. 레너드는 어릴 때 원인 모를 마비가 시작되었다. 손가락부터 시작된 마비는 이내 온 몸으로 퍼졌고 혼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얼굴에는 표정이 사라졌고 시선은 정지했으며 말은 주인을 잃었다. 그런 레너드에게 투약이 시작되었다. 가족 동의서를 구하러 간 세이어에게 레너드 엄마가 묻는다. "레너드가 파킨슨병도 아닌데 이 약으로 뭘 할 수 있죠?" 세이어가 대답한다. "전혀 다른 병을 위해 만들어진 약이어서 확신할 수가 없습니다." 다시 묻는다. "그럼 뭘 원하시는데요?" 다시 대답한다. "그를 다시 데려오기를 원합니다. 이 세상으로요." 슬픈 얼굴이 묻는다. "이렇게 세월이 흘렀는데 이곳이든 그곳이든 어떤 차이가 있죠?" 애정어린 얼굴이 답한다. "당신이 여기 있잖아요." 

레너드는 30년 만에 기적적으로 되돌아왔다. 여전히 그의 시간은 유년에 머물렀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레너드는 빠르게 적응했다. 모두가 기뻐했다. 레너드는 어릴 적 친구들과 놀던 동네를 다시 찾아갔고 처음 보는 사람에게 사랑을 느끼기도 했다. 제목(awakenings) 그대로 레너드는 긴 잠에서 깨어났다. 여기저기서 투자가 쇄도했고 투약은 전 환자에게 확대되었다. 그리고 기적의 밤, 환자들은 스스로 침대에서 일어나 걷고, 말하고, 춤을 추었다. 병원은 지난 시간을 회상하는 환자들의 활기로 유래없이 소란스러웠다. 환자들은 자유로운 출입을 요구하며 집단 행동을 벌이기도 했다. 밀폐된 사회는 급격히 새로운 양상으로 조직되었고 그 중심에 레너드가 있었다. 세이어의 실험은 성공하는 듯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레너드에게서 발작적인 마비증세가 다시 시작되었다. 원인을 알 수 없었다.레너드는 집단적인 저항을 주도하다가 이내 세이어에게 자신을 꼭 고쳐달라며 울부짖는 처지가 되었다. 그의 몸은 다시 자신의 통제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고통스런 온갖 번뇌가 몸의 언어로 구현되었다. 그렇게 기적의 시간이 왔다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세이어가 그 시간에 대해 말한다. 


그해 여름은 특별했습니다. 재탄생과 순수 그리고 기적의 계절이었습니다. 15명의 환자들과 관리인인 우리들에게 말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기적의 내용을 바꿔야만 합니다. 과학이라는 이름 뒤에 숨어 약 때문에 실패했다고도, 단순히 병이 재발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환자들이 잃어버린 세월을 따라잡는데 실패했다고 말할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뭘 잘못 했는지도 모른다는 게 진실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뭘 잘 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아는 건 약을 통한 해결의 길이 막혀도 또 다른 깨어남이 발생하리라는 것, 인간의 정신은 어떤 약보다도 강하다는 것입니다.


과학은 언제나 최악으로 치닫는가?


“농경 이전의 수렵과 채집 시대에 인간의 기대 수명은 20~30살 사이였다. 1870년경에 이르러서야 비로서 인간의 기대수명은 40살이 되었다. 1915년에는 50살, 1930년에는 60살, 1955년에는 70살 그리고 오늘날에는 거의 80살에 이른다.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멋진 인도주의적 변천의 원인은 무엇인가? 질병의 세균 이론, 공중 보건 대책, 의약 및 의학 기술 등이다. 과학이 인류에게 선사한 가장 고귀한 선물, 그것이 바로 생명이다...그러나 과학이 도덕적으로 해이한 기술자들이나 권력을 가진 부패한 미친 정치인들에게 너무 막강한 힘을 부여했다고 쉽게 단정짓고, 그렇기 때문에 과학은 제거되어야 한다고 결정할 수는 없다. 의학과 농업의 진보는 인류 역사에서 발발한 많은 전쟁으로 죽어간 사람보다 훨씬 더 많은 생명을 구했다.”

칼 세이건, <악령이 출몰하는 세상>, 김영사, 19~21쪽


여전히 이런 글은 사실여부를 떠나, 글이 옹호하고자 하는 입장 때문에 선뜻 지지의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수학과학이 더 이상 발전하지 않고 여기서 멈췄으면 하고 바라던 때가 있었다. 전쟁은 수학과학의 발전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모든 인류를 먹여 살리고도 남을 생산력이 있지만 여전히 수많은 사람이 굶어죽고 있다. 황우석 사태는 맹목적인 과학에 대한 맹신이 불러온 코메디였다. 수명을 다한 원전은 여전히 가동 중이다. 수학과학이 발전하는 만큼 파국의 사이즈만 커지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 때문에 모든 게 덧없이 느껴졌다. 

뇌신경학이나 정신분석학도 예외는 아니다. 뇌신경학이나 정신분석학이 이름지은 수 많은 병적 증상들은 현실을 위장하기 위한 수단으로 고안된 경우가 많다. 산업사회는 과도한 노동을 합리화시키려고 만성피로와 같이 딱히 병이라 부르기 힘든 증상에 신경쇠약이란 이름을 붙였다. 그러면서도 성차별은 강화하려는 목적으로 여성에게는 히스테리란 이름을 붙였다. 1, 2차세계대전을 겪으며 전쟁과 군대로 인한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이 늘자 스트레스란 개념을 만들어냈고, 그 정도가 심해지자 트라우마라는 말이 등장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1950~60년대 스트레스란 개념을 담은 보고서를 가장 많이 만들어낸 집단은 군대다. 1970년대에 스트레스 연구인력 중 1/3이 미국의 군부기관과 관련이 있었다는 통계가 있다.


그런데도 다시 과학의 힘에 기대고 관심을 가지고 무언가 역할을 하려고 고민하게 된 것은 몸이 아프면서다. 인공암벽타기를 취미로 1년 넘게 배우다가 손목과 어깨 인대가 심하게 찢어졌다. 좀 나을만하니 이번에는 농구를 하다가 전방십자인대가 파열되어 이식 수술을 받았다. 지금도 재활훈련 중이다.

병원은 흡사 실험실의 이미지를 닮아 있다. 차갑고, 무섭고, 낯설다. 어려운 용어들로 가득한 처방전, 좀처럼 인간미를 느끼기 어려운 병원이란 시스템 속에서 유일한 구원은 환자친화적인 의사의 존재다. 이를테면 여전히 과학이란 선의를 가진 존재없이는 그 용처가 의심스럽고 통제가 불가능한 무엇이다. 어쨌거나 부정하기 힘든 사실은 내 몸이 과학의 힘에 기대 회복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가장 따뜻한 논리, 가장 치밀한 감성


가설은 자주 빗나가고 실험은 항상 성공하지 않으며 과학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지도 않는다. 새로운 도전은 오히려 더 나쁜 결말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이어 온 이야기가 주는 감동은 일관되게 휴머니즘이 아닌, 휴머니즘이 근거하는 태도에 있다. 세이어의 휴머니즘은 신파가 아니라 과학적 태도로부터 나온다. 더 근본적으로 과학적 태도는 논리가 아니라 의지로부터 출발한다. 

 

책 제목이자 마지막 7번째 에피소드이기도 한 <화성의 인류학자>는 세 살 때 자폐증 진단을 받은 생물학자 템플 이야기다. 

템플은 성장과정을 거치며 학습을 통해 사회생활도 가능했는데 어떤 상황이 주어지면 마치 함수처럼 그에 적합한 반응을 찾아내었다. 하지만 템플은 정상적인 생활과 그에 따르는 정상적인 기쁨(사랑, 우정, 취미생활, 인간적인 만남)이 자신이 결코 닿을 수 없는 세계임을 깨달았다. 세상은 때로 템플을 속이고 이용했다. 템플은 사람에게서 위로를 얻지 않고 직접 고안해서 만든 포옹기계로 스스로를 위로한다. 그리고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사육환경이 가축에게 미치는 영향을 연구한다. 템플은 대량사육시스템, 특히 대량 살상 시스템이 가진 비인간성에 분노하고 시스템 개선에 주력하고 있다. 템플의 주장을 듣고 있노라면 템플에게 가해지는 비정상이란 공격이 너무도 부질없이 느껴진다. 그러나 사람들은 좀처럼 편견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달리 자폐증 진단을 받은 사람들도 끊임없는 노력으로 사회적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어떤 분야에서는 오히려 더 탁월한 업무 능력을 보이기도 한다. 가령 템플은 다른 사람에게 잘 보여야할 이유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다. 템플에게는 인과관계에 충실한 과학이란 언어가 이해하기 쉬웠다. 이것이 과학의 세계로 들어서는 출입구가 돼주었다.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성인 자폐증 환자에 대해서는 좀처럼 언급하지 않는다. 자폐아가 나이를 먹으면 갑자기 사라져버리기라도 하는 걸까? 일부 청소년 자폐증 환자들은 황폐했던 세 살 무렵과 달리 상당한 수준의 언어 능력과 약간의 사회적 기술을 갖추고, 놀라운 지적 능력을 발휘한다. 밑바닥에는 심각한 자폐성 특징이 끈질기게 남아 있다 하더라도 겉으로는 통상적인 인생을 충분히 즐기는 것처럼 보이는 자율적인 인간으로 성장한다. 아스퍼거는 캐너보다 훨씬 분명하게 이런 가능성을 예견했다. 따라서 '고도의 능력'을 갖춘 자폐증 환자들은 아스퍼거 증후군 환자라고 불린다. 


한 동안 손에 놓고 있던 수학과학에 대해 다시 손을 내밀어보기로 한다. 수학과학 공부를 다시 하겠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삶의 태도로서 한 동안 버려두었던 것을 다시 만지작거리기로 했다는 의미다. 지적 호기심과 따뜻한 시선이 결합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다시 긍정해보기로 한다. 과학은 편견을 강화시키기도 하지만 편견을 깨기도 한다. 과학적 태도를 지워버리는 것이 현명한 것일까? 그게 가능하기나 할까? 과학에 대한 맹신이나 불신이 오히려 편견과 불합리를 키운다면 그에 맞서기 위해 무엇이 필요할까? <화성의 인류학자>가 우리에게 던진 질문이다. 


Posted by 칸나일파

25년 전쯤 초등학교에서 베이직(Basic)이란 컴퓨터 언어를 가르치는 게 반짝 유행했었다. 나도 잠깐 그 유행에 합류해 난생 처음 컴퓨터를 만져보았다. 막연히 정보통신 시대가 온다, 곧 컴퓨터가 세상을 지배한다 어쩐다 했으나 대부분 그걸 배워서 어디다 써먹어야 할지 모르던 때다. 게다가 집에는 컴퓨터도 없었다. 당시에는 상당한 고가였던 탓에 컴퓨터를 가진 애들이 별로 없었다. 그나마도 대부분 값비싼 골동품처럼 모셔져 있었다. 언제 올지 모르는 미래는 대다수 사람에게 실질적인 미래가 아니다. 그래서인지 그 어떤 긴장감도 불러일으키지 않는 방과 후 수업이 좋았다. 지적인 느낌을 물씬 풍기는 예쁜 선생님을 보는 것도 좋았고 부팅될 때나 5.25인치 디스켓을 읽을 때마다 나는 끼르륵 끼르륵 소리도 듣기 좋았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스무 살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내 컴퓨터를 가질 수 있었다. 전화선으로 pc통신을 하던 시절이었고 인터넷이 상용화되니 마니 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니 70~80년 전에 컴퓨터 같은 것을 고안한 사람을 천재라고 부르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것이 말 그대로 computer, 즉 단지 계산을 빨리 해주는 정도의 기계라 해도 말이다. 앨런 튜링은 컴퓨터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컴퓨터의 아버지도 아니고 할아버지쯤으로 불릴만한 인물이다.[각주:1] 그런데 영국 비밀정보기관 밑에서 일했던 전력이 오랜 동안 베일에 가려져 있던 탓에 할아버지 대접을 받지 못했다. 게다가 동성애를 불법으로 간주했던 어두운 시대 상황 때문에 전반적으로 저평가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순수학문 성향이 강한 수학의 관점에서 기계 개발에 몰두했던 튜링에게 높은 점수를 주기 애매한 부분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그는 엄청 똑똑했다.

 

<이미테이션 게임>은 단순한 천재 서사인가?


<굿 윌 헌팅>, <박사가 사랑한 수식>, <뷰티풀 마인드>에 이어 <이미테이션 게임>까지 몇 안 되는 작품이지만 수학자 영화는 나름대로 경향성을 갖고 있다. 괴팍하고 영리한 수학자가 있다. 그 수학자는 남자다. 집중력은 뛰어나지만 사회성은 극도로 떨어져 자의반 타의반 혼자 지내는 시간이 대부분이다. 그들은 왕따거나 은둔자다. 세상과의 불화가 심할수록 주인공의 천재성은 더욱 빛이 나고 극적인 반전이 주는 카타르시스도 커진다. 그를 초라하게 만드는 것도 수학이지만 끝내 그를 위대하게 만드는 것도 수학이다.  

<이미테이션 게임>도 상당 부분 전형적인 천재 서사를 따라간다. 튜링은 학창시절 내내 왕따였다. 어머니조차 튜링을 별난 사람(odd duck)이라고 말한다. 사회생활 역시 마찬가지로 동료들과 관계는 계속 겉돌기만 한다. 하지만 멘토가 등장하고 동료들이 튜링의 천재성을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국면이 바뀌고 튜링은 엄청난 성취를 이뤄낸다. 전 영화들과 차이라면 자살로 마무리된다는 정도인데[각주:2] 이 비극적인 결말조차 튜링의 천재성을 더욱 도드라지게 만든다.

셜록에서 튜링으로 이어지는 필모그래피 덕에 컴버배치에게서는 의심할 수 없는 어떤 천재성마저 느껴질 정도다. 바닥에서 무언가를 골똘히 조사하고 있는 컴버배치가 등장하는 순간 사람들은 셜록 비슷한 천재의 등장을 직감한다. 다만 대화를 나눌 때 상대를 정면으로 응시하지 못하는 이 천재에게 무엇이 부족한지도 동시에 알게되겠지만 말이다.

결핵으로 사망한 튜링의 고등학교 친구이자 첫사랑 크리스토퍼와 관계 역시 마찬가지다. 크리스토퍼는 튜링의 유일한 숨구멍이다. 반에서 1, 2등 하는 애들끼리 수학 문제를 풀며 사랑을 나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의 귀족적 동성애를 떠올리게 한다. 튜링이 게이였다는 사실도 희귀성에 희귀성을 더하는 기능을 한다. 섹스 없이 수학이란 언어로 소통하는 멘토 조안과 관계 역시 같은 맥락을 강화한다.


때로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아무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을 해내거든.


크리스토퍼가 튜링에게 전했고, 튜링이 다시 조안에게 전한 이 말은 세상으로부터 이해받지 못하는 천재들의 자기위로다. 전반적인 설정이 천재 서사를 강화한다. 천재 서사에서 관객이 보이는 반응의 최대치는 다른 삶에 대한 연민이다. 관객은 영화 속 주인공이 나와 다르지만 틀린 것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는데 만족한다. 그런데 어찌 보면 신기한 일이다.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암호해독을 다룬 영화인 데다 주인공이 게이라는 점까지 고려하면 첩보영화, 반전영화, 퀴어영화 등 복합적 요소가 결합된 텍스트이고 사회성이 강한 영화인데 한결같이 천재 서사로만 읽어내는 분위기가 말이다.


전쟁이란 시스템 속에서 갈등하는 기능적 지식인


<이미테이션 게임>을 읽어내는 또 다른 중요한 축은 강력하게 설정된 진영논리 속에서 허우적대는 개인이다선악구도는 비교적 선명하게 설정되어 있다. 2차 세계대전에 대한 관점이 대체로 그렇듯 나치라는 절대악의 설정은 가치판단을 쉽게 만든다. 하지만 선악구도가 분명하게 설정된 경우조차 전쟁에서 승리가 기쁘게 느껴지는 경우는 별로 없다. 전쟁과 같은 거대한 시스템 속에서는 무엇이든 왜곡된다. 가치중립적이라고 믿는 지식을 통해 지식인은 전쟁의 일부로 기능한다. 이런 시선으로 바라보면 천재가 아닌 전혀 다른 서사가 드러난다. 거대한 시스템 속에서 갈등하는 기능적 지식인은 지금 우리 주변에도 아주 흔하다.  


자네 대체 왜 정부 쪽 일을 하려 하는가?

오 하고 싶지 않는데요.

자네 그 망할 평화주의자라도 되나?

저는 폭력에 대해서는 불가지론자입니다. 

자네도 알고 있겠지. 런던에서 100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히틀러라는 망할 놈이 유럽 전체를 삼키려 하고 있다는 것을?

정치는 제 전공이 아닌데요. 


튜링에게 중요한 건 독일이 만든 '에니그마'라는 암호생성 기계와 벌이는 게임에서 승리하는 것이다. 모두가 퍼즐풀이에 열중하고 있을 때 튜링은 에니그마를 능가할 기계를 설계하고, 직접 제작하고, 오류를 수정하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그 기계에 '크리스토퍼'라는 이름을 붙인다. 

이 상황을 이해못하는 동료나 군 입장에서 튜링은 불편하고 짜증스런 존재다. 소련의 스파이로 의심받기도 한다. 하지만 규칙을 배워가며 응용하고 뒤틀기도 한다. 정치적 거래를 하기도 하고 내부규율을 어기기도 한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튜링은 전쟁의 일부로 기능하게 된다. 암호해독에 성공한 후에도 전쟁을 단축시키기 위한 전략짜기에 고심하고 전반적인 상황을 호전시키기 위해 어쩔 수 없는 희생을 감내하기도 한다. 그는 점점 더 자주 갈등한다. 


천재 서사만으로 영화를 보면 이 모든 상황은 형해화되고 개인은 탈역사화 된다. 외골수 천재가 이룩해낸 성취라는 서사는 전쟁이라는 거대한 흐름의 향방이 몇몇 천재 사이에 벌어지는 경쟁의 결과에 따라 달라지며 역사도 이와 같은 식으로 흘러간다는 영웅주의를 강화한다. 그러나 전쟁은 몇몇 영웅들에 의해 좌지우지 되었다기 보다 오히려 이해불가능한 다양한 상황과 갈팡질팡 고뇌하는 수 많은 개인들을 만들어냈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전쟁을 빨리 끝내고 싶지 않느냐, 너는 어느 편이냐, 영국을 위하지 않느냐는 등 튜링이 공격을 받는 상황은 충분히 예상 가능하고 또 그래서 누구라도 그 상황에서 처할 수밖에 없는 근본적 물음들을 던지게 한다. 


앨런 튜링은 어떤 이데올로기도 받아들인 적 없다는 식으로 자신을 이해한다. 하지만 폭력에 대해 그가 보여주는 성찰은 단순하지만 날카롭다. 


사람들이 왜 폭력을 좋아하는지 알아요?

그건 바로 기분이 좋아지기 때문이죠. 

하지만 그 쾌감을 제거하고 나면 폭력의 결과는 공허하죠. 


단순히 천재가 하는 말이 아니다. 이것은 전쟁 한가운데 놓인 인간의 말이다. 동시에 튜링은 가상 세계와 현실 세계, 인간다운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영화 속 현실과 실제 현실의 경계를 뒤흔든다. 

  

튜링이란 존재 자체가 복합적 텍스트


영화 제목이기도 한 <이미테이션 게임>은 앨런 튜링이 인공지능에 관한 이론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도입한 일종의 테스트다. 그래서 튜링 테스트라고도 부른다. 요약하자면 셋이 하는 게임이다. 한 명은 질문을 던진다. 이에 답하는 응답자 중 하나는 인간이고 하나는 기계다. 튜링은“진정한 인공지능 컴퓨터는 사람이 5분간 질문을 할 수 있고, 이럴 경우 질문하는 사람이 30% 이상 확률로 컴퓨터를 인간으로 착각하는 수준”이라고 예시했다. 이 단순한 게임을 통해 튜링은 지능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수학적 혹은 기계적인 답을 내려고 시도한다. 최소한 인간에게 인간처럼 보인다면 그것은 인간에 준하는 지능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물론 이 테스트를 제대로 통과하는 기계를 만들기는 여전히 쉽지 않은 일이다. 게다가 제법 많은 질문에 답을 하는 기계조차 인간이 엄청난 양의 데이터를 입력해야 하니 이것이 지능인가 아닌가 논란이 될 수밖에 없다.[각주:3] 하지만 당신이 <공각기동대>나 <블레이드 러너>같은 영화를 보며 철학적으로 심각해지는 상황을 생각해보라. 이 사람은 이미 한참 전에 그런 고민의 시초를 던진 것이다. 게다가 뇌과학의 발달은 철학적으로 제기되던 숱한 문제들, 물질을 초월한 개념으로 인식되는 많은 것들이 실은 물질의 화학작용에 의한 것임을 밝혀냈다. 만약 이 화학작용이 인간의 의식을 결정하는 것이라면 대체 인간다운 것은 무엇인가?

지적호기심, 수학적 합리성이 튜링을 규정한다. 그는 연인들의 밀당이나 썸을 이해하지 못한다. 튜링의 언어는 컴퓨터 프로그래밍 언어를 닮아 있고 합리적 의사소통과정은 순서도(플로우 차트) 전개와 비슷하다. 감정표현조차 논리로 섭렵하여 사회화하는 캐릭터는 우리 주변에도 제법 있다. 튜링이 많은 경우 사교에 서툰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새로운 멤버를 뽑는 시험장에 유일한 여성인 조안이 나타났을 때, 잘못왔다며 제지하는 사람보다 그녀를 동일하게, 합리적인 한 명의 사람으로 받아들이는 튜링이 훨씬 인간적이다. 

이미테이션에는 모조, 모방이란 뜻이 있다. 어쩌면 튜링에게는 그가 처한 현실이 더 모방에 가깝게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어디에도 진실을 말할 수 없는 수 많은 기밀 속에서 살았던 튜링에게는 차라리 '크리스토퍼'가 진정한 본질에 가까웠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일까? 전쟁 이후 튜링의 삶은 허깨비를 쫓듯 공허했다. 튜링은 우울증에 시달렸고 더욱 진화된 ‘크리스토퍼’를 만드는 일만이 그를 살아있게 했다. 튜링은 동성애로 인해 화학적 거세형을 받고 약물 복용 후유증에 시달렸다. 그리고 우울증과 겹쳐지며 끝내 자살에 이르게 된다.

사람들은 인간 혹은 인간성에 대해 말할 때 나름대로 정해진 답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삶 속에서 발현되는 양상은 제각각이다. 동성애와 기계에 대한 사랑이라는 조합은 다소 생뚱맞게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사이버 가수의 등장, 게임 캐릭터에 대한 환타지, 각종 돌(doll)을 이용한 자위행위 등. 비현실의 현실 속에서 더 자주 위로를 얻는 우리의 삶은 튜링의 삶과 얼마나 다른가? 그래서인지 자주 마음이 시려 왔고 나는 천재가 보이기 보다는 우리 삶 속의 수 많은 튜링들이 보였다.  



  1. 무엇을 최초의 컴퓨터로 보느냐는 중요할 수도,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는 질문이다. 이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의견이 있다.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시도들이 있었기 때문에. 확실한 것은 앨런 튜링이 이론상으로 중요한 기여를 했다는 점이다. [본문으로]
  2. 앨런 튜링이 독이 든 사과를 먹고 자살했다는 일화는 너무 유명해서 스포일러 축에도 못 낀다. 스티브 잡스는 애플 로고와 앨런 튜링 사이에 연관성이 없다고 해명했지만 사람들은 계속 그렇게 믿고 싶어 하는 눈치다. [본문으로]
  3. '한 입 베어 문' 애플의 사과로고는 앨런 튜링을 기린 것일까? <2014년 6월 10일자 한국경제> 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14061022407 [본문으로]
Posted by 칸나일파

객관보다 먼저 존재하는 의지

 

<매드 사이언스 북>은 실험이 과학적 방법론으로서 확고한 지위를 획득한 이후에 벌어진 온갖 실험에 대한 이야기다. 과학지식이란 방대한 지도에서 미지의 영역을 몰아내겠다는 집념과 열정이 가득한 책이다. 동시에 그에 뒤지지 않는 광기도 살벌하다. mad(미친)와 science(과학)이란 조합은 열정과 광기 사이 간극을 효과적으로 표현한다. 소재 자체도 흥미롭지만 살짝 살짝 곁들이는 과학전문기자의 농담도 유쾌하다. 물론 어떤 농담은 여전히 낯설지만. 과학전문기자가 진득하게 한 분야에 전념할 수 있는 현실은 부럽기만 하다.

<매드 사이언스 북>에는 오늘날 기준으로는 용납하기 힘든 실험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 병원균의 실체를 확인하게 위해 자신을 대상으로 임상실험을 하는가 하면, 단두대에서 잘린 사람 머리를 몰래 훔쳐와 전기를 흘려보내기도 한다. 그 중에 영혼의 무게를 재려한 사람도 등장한다.

던컨 맥두걸은 실험을 통해 영혼의 무게가 21그램이라고 결론 내렸다. 뉴스 타임즈 1907년 3월 11일자 신문에는 “의사는 영혼에 무게가 있다고 믿는다.”는 기사가 실렸다. 물론 실험은 조잡하고 신빙성이 없었다. 고작 6명을 대상으로 사망 전후 무게를 측정해 낸 결론이었다. 표본 자체가 너무 작은데다 그 6명마저 결과는 제각각이었다. 오히려 관전 포인트는 실험의 결과라기보다는 동기에 있다. 그는 영혼에도 무게가 있다고 믿었다. 모든 실천 앞에는 의지가 먼저 존재한다. 객관은 가장 극단적인 주관 속에서 태어난다.

 

영혼의 무게는 21그램

 

서양철학에서 영혼이란 개념은 꽤나 오랜 전통을 갖고 있다. 피타고라스는 윤회설을 믿었다. 플라톤에게 영혼은 보편적 진리를 인식할 수 있는 능력과도 같다. 따라서 육체보다 우월한 영혼은 불멸의 존재다. 이런 사고방식은 자연스럽게 종교에 흡수되어 내세라는 개념으로 이어진다. 영혼은 죽은 후에도 살아 남는다. 영혼을 실체(무게)가 있는 무엇으로 이해하다보니 데카르트는 육체와 영혼을 연결시켜주는 송과선이란 기관이 있다는 주장으로까지 이어진다. 능력자들이 내지른 헛발질은 믿음의 산물이다.

영혼의 무게를 재는 실험은 별 다른 신뢰를 얻지 못했지만 동기만큼은 강렬한 인상을 남긴 것이 분명하다. 21그램이란 기업이 있는가 하면 <21그램>란 제목의 영화도 있다. 이 영화에 실험과 연관된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단지 모티브로 따 왔을 뿐이다. 복잡한 심경 속에 죽음을 앞 둔 한 사람의 독백 속에 21그램이 등장한다.

 

사람이 죽는 순간에 21그램이 줄어든다고 한다. 누구나 다...

21그램은 얼마 만큼일까? 얼마나 잃는 걸까? 언제 잃을 것일까?

21그램. 5센트 5개의 무게. 벌새 한 마리 무게. 초콜릿 하나.

21그램은 얼마나 나갈까?

 

어떤 사람을 분석한다고 치자. 수다스럽다, 다정하다, 관능적이다 등등. 정성적 분석이다. 이 분석을 이렇게 대체해보자. 하루 평균 2시간 동안 수다를 떨고 15명에게 카톡을 보내며 3명에게 페로몬을 뿌려댄다. 정량적 분석이다. 수학과 과학은 대체로 어떤 성질을 정량화시키는 과정에서 발전한다. 온도만 해도 그렇다. 따뜻하다, 미지근하다, 차갑다는 등의 표현은 주관적이다. 여기에 숫자를 부여하면 객관성이 확보된다. “너 나 얼마만큼 사랑해. 1부터 100까지 숫자로 말해봐.” 이것이 수학의 마인드다. 이미 실패가 예정되어 있더라도 어떻게든 삶을 객관화시키고 싶은 인간의 욕망. 21그램은 불가사의한 삶을 계량화하고 싶어 하는 인간의 덧없는 욕망을 상징한다.

 

담배연기 무게는 몇 그램?

 

나는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한 번도 피워본 적이 없다. 담배냄새를 미친 듯이 싫어한다. 어릴 적에는 담배를 피우는 아빠를 집 밖으로 쫓아내기 일쑤였고, 대학생 때는 학생회실에서 담배 피우는 회의를 처음으로 금지시킨 장본인이다. 그런가하면 베란다를 타고 올라오는 담배연기를 참지 못해 아래층 집집마다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우지 말아 달라.”는 쪽지를 붙여두기도 했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담배 피는 모습이 너무 멋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사람이 있었다. 그 모습은 아무 설명 없이도, 충분히 매력적이어서 삶이란 담배피우는 모습으로 형상화되는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게 했다.

<스모크>는 소설가 폴 오스터가 공동으로 대본을 써서 주목받았던 영화로 그의 소설 [오기 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모티브로 한 영화다. 제목처럼 담배 피는 장면, 특히 담배연기가 날아가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오기의 담배 가게는 사람들이 만나고 헤어지는 상징적인 장소다. 담배연기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 영화는 어쩐지 멋있게 담배 피는 사람을 연상시킨다.

영화 배경은 뉴욕 브룩클린이다. 여기에 주인공이 여럿 등장한다. 먼저 부인을 잃고 혼자 사는 소설가 폴. 한때는 잘 나갔지만 부인이 죽은 뒤로는 폐인 모드다. 줄담배만 펴댄다. 교통사고 직전 우연히 폴을 구해준 청년 라시드는 묘하게 폴 옆을 맴돌며 접근한다. 그런데 폴은 이 청년 덕에 조금씩 기운을 되찾고 다시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그리고 의문투성이 라시드는 어릴 적 생이별을 했던 아버지를 찾아가 결국 다시 가족을 이루게 된다.

한 편 담배 가게 주인 오기는 매일같이 같은 시각에 자기 가게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다. 그 사진을 인화해 사진첩에 모아 둔다. 이 담배 가게에 폴이 소개한 라시드가 점원으로 근무하면서 관계는 얽히고 설킨다. 오기는 쿠바산 시가담배를 밀수하려다 낭패를 보지만 이렇게 저렇게 만회해서 목돈을 만드는데 성공한다. 그런데 집나갔던 옛 애인 루비가 찾아온다. 루비는 둘 사이 딸이 있다며 마약에 찌든 딸을 보러 가야 한다고 하지만 오기는 돈 때문에 루비가 돌아왔다고 생각한다. 딸은 오기를 받아들이지 않지만 오기는 루비에게 어렵게 구한 목돈을 건네준다.

 

이 영화에 인상적인 장면이 두 군데 있다. 하나, 폴이 담배연기 무게를 어떻게 재는지 설명하는 장면. 영국에 담배를 들여 온 월터 롤리 경은 담배연기 무게를 잴 수 있는지 엘리자베스 여왕과 내기를 해서 이긴다. 흡연 전후에 담배 무게(재와 꽁초)를 측정해서 그 차이를 계산했다. 이 방법은 아주 간단하지만 실험이 가진 강력한 힘을 보여준다. 삶과 죽음 사이에 발생한 차이 21그램처럼. 삶 역시 이렇게라도 측정 가능한 것이라면 얼마나 간명하겠는가.

둘, 아내를 잃은 후 폐인처럼 지내던 폴은 담배 가게 오기랑 친해진다. 어느 날 폴은 오기의 희한한 사진집을 구경하게 된다. 매일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찍은 사진뿐인 사진집. 오기는 매일 자신의 담배 가게 건너편에서 가게 쪽을 바라보며 사진을 찍는다. 사진 중앙에는 담배 가게가 자리 잡고 있으며 길거리 풍경은 늘 비슷비슷하다. 폴은 왜 이런 걸 찍느냐며 이해 못할 표정을 짓다가 우연히 사진에 찍힌(지금은 죽고 없는) 자기 부인을 발견하고 오열한다. 오기의 쓸데없던 취미는 잠들어 있던 폴의 기억을 끄집어낸다. 무색무취했던 거리 풍경은 구체적인 시공간과 함께 되살아난다.

 

<스모크>처럼 흩어지는 삶이라 해도

 

<스모크>에는 삶과 죽음, 만남과 이별이 복잡하게 교차한다. 인생은 어디로 흩어질지 모르는 담배연기처럼 예측하기 어렵다. 한 사람의 우연한 행동이 또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고, 무겁게 가라앉은 것 같던 담배연기가 순식간에 흩어지듯 사람사이 만남도 그 의미를 헤아릴 길이 없다.

공리주의로 유명한 벤담은 쾌락계산법(Felicific calculus)으로 괘락의 총량을 계산할 수 있다고 했다. 검색창에 행복지수란 단어를 집어넣으면 삶을 계량화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를 접할 수 있다. 삶이 목적의식적으로 배치된 노력의 총합이라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리고 그런 이들에게 수학이란 도구는 얼마나 고마운 것이겠는가!

영혼의 무게를 재고, 담배연기의 무게를 측정하고,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사진을 찍는 행위는 무정형의 실체를 포착하고자 하는 노력이다. 더러는 성공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실패할 것이 분명한. 삶은 대체로 정량화되지 않는다. 영화에 유난히 담배 연기가 많이 나오는 이유가 있다. 그렇다면 이런 노력들은 언제나 무의미한가? 아니 그렇지 않다. 오기의 사진 속에서 사랑하는 이의 흔적을 발견해낸 폴처럼. 삶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가끔 의도치 않게 소소한 선물을 선사한다. 그러니 열심히 시도할 일이다. 다만 거기에 정답이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그 노력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면 된다. 우리가 수학에서 얻을 게 있다면 그것은 삶에 대한 답이 아니다. 답을 찾고자 하는 노력 자체가 삶을 아름답게 한다.

마지막에 나오는 영화 속 영화 [오기 렌의 크리스마스]를 해마다 한 번쯤 다시 보기로 한다. 꼭 직접 보라고 줄거리는 이야기 하지 않는다. 마음까지 추워지는 추운 겨울, 마침 연말연시나 삶과 사람에 대해 확신이 서지 않는 그런 때에. 당신도 누군가에게 좋은 선물 같은 존재였으리라. 그러니 모든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그래도 인생이다.

Posted by 칸나일파

 

위에서 아래로 떨어진다, 낙하한다, 추락한다.

 

일반적으로 사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떨어진다, 낙하한다, 추락한다. 이 동사들은 부정적인 상황에서 자주 쓰인다. 매력이 떨어진다, 지위가 추락한다 등등. 떨어지면 보통은 아프다. 언어보다 몸이 먼저 안다. 그리고 개념은 언어로 완성된다. 보통은 떨어진다는 말과 함께 위와 아래라는 방향성을 동시에 인지한다. 그런데 위에 있는데 떨어지지 않는 것들도 있다.

실험이나 관찰이라는 개념이 없던 시절에 인류는 자연현상이 신 자체거나 신의 행위라고 생각했다. 설명이 체계적으로 발달하면서 종교가 된다. 여기에 초보적인 인과관계와 관찰이 더해지면서 상상훈련을 하기 시작하고 논리를 덧댄다. 자연철학의 탄생이다.

인류가 처음 생각한 지구와 우주는 어떤 모습일까? 상상훈련을 해보자. 나는 처음으로 지구와 우주의 구조를 생각하는 호모 사피엔스다. 세상에 대한 인식은 내가 서 있는 여기를 중심으로 동심원 모양으로 퍼져나간다. 이동수단이 발달하면서 동심원은 점점 커질 것이다. 그러나 이동수단의 발달은 더디다. 지금 동심원의 크기는 크지 않다. 세상의 끝은 내 인식이 닿는 한계보다 조금 더 멀리 있는 정도다. 보통은 내가 가보지 못한 강이나 산 너머. 그곳에는 어떤 절대적인 두려움이 존재한다. 그 존재는 말에서 말로 전해져 올 뿐이다.

아직 지구가 둥글다는 것은 상상조차 힘들다. 그리고 머리 위로 해와 달이 뜨고 진다. 온갖 별들이 움직인다. 이들의 움직임을 이해하려면 꽤 많은 시간이 흘러야 한다. 그런데 왜 높은 곳에 있는 별은 떨어지지 않는 것일까?

 

별은 우리 머리 위에 있는데 왜 떨어지지 않는가?

 

그리스식 세계관은 실험보다는 상상훈련에 기초해 있고 이것을 고상하게 말해 자연철학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 토대에는 수학이란 고도의 논리학과 형이상학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스 자연철학은 밑도 끝도 없는 주장도 부지기수지만 근대 과학이 이룩한 수많은 업적 중에는 그리스 자연철학에 뿌리를 둔 것도 매우 많다. 그리스 철학은 사고의 원형을 모아 둔 잡다한 만물백화점이었다.

떨어진다는 단순한 현상 하나만 놓고 봐도 질문이 산더미다. 왜 어떤 것은 떨어지고 어떤 것은 떨어지지 않는 것일까? 사물을 떨어지게 만드는 원인은 무엇인가? 모든 사물은 똑같은 속도로 떨어지는가? 이 숱한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은 생각보다 험난하다. 천재들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무거운 물체가 가벼운 물체보다 빨리 떨어진다고 했다. 중력에 대한 학습이 없으면 이렇게 생각하기 쉽다. 확실히 돌은 깃털보다 빨리 떨어진다. 그런가하면 세상은 물, , , 공기 4원소로 구성되어 있는데 돌이 빨리 떨어지는 이유는 돌이 흙으로 구성되어 있어 본래 자기가 속한 곳으로 돌아가려는 속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역학이론은 갈릴레이에 이를 때까지 2천 년간 서양세계를 지배했다.

영화 <아고라>에 보면 그리스의 시대정신이 저물어가는 황혼녘에 한 시대의 몰락을 함께했던 수학자 히파티아가 등장한다. 영화는 히파티아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서 제자들과 토론을 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어째서 별은 떨어지지 않는가? 별은 달아나지도 떨어지지도 않으며 이상적인 형태의 경로를 따라 동서로 움직인다. 바로 원이야. 원으로 움직이는 한 별은 절대로 떨어지지 않아.”라고 말한다. 별들의 운동에 수학적인 질서가 숨어 있다고 믿었던 그리스인들은 원이 가장 이상적인 도형이기 때문에 별들이 원운동을 한다고 생각했다. 토론은 이어진다.

 

그런데 지구에서는 어떨까? 물체는 떨어지면서 원이 아닌 직선을 그린다. 대체 지구 내부 무슨 조화가 사람이든 사물이든 노예든 상관없이 전부 아래로 잡아당길까?”

무거워서겠죠. 아니 중량 때문에?”

근본 원인을 말해야지 궁금해본 적 없나? 여러분의 발바닥이 만물을 지탱하고 끌어당기는 우주의 중심을 향하고 있는 까닭? 중심이 없다면 우주는 모양도 실체도, 끝도 없는 혼돈일 거야. 그렇게 세상이 아수라장이라면 아니 태어남만 못해.”

 

현대인들은 물체가 떨어지는 현상이 중력(gravity)에 의한 잡아당김이란 걸 잘 안다. 떨어진다는 건 관찰자인 인간의 관점이고 객관적 사실은 지구가 물체를 지구 중심방향으로 잡아당기는 것이다. 뉴턴이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며 중력을 알아냈다는 일화는 사후적으로 지어낸 이야기이다.

어쨌거나 중력의 발견은 세상을 인식하는 새로운 눈을 달아준 격이었다.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이, 티코 브라헤, 케플러, 헬리, 뉴턴 등등에 이르기까지 이 익숙한 이름들이 등장하는 시기를 과학혁명이라 부른다. 과학혁명은 근대를 여는 핵심 키워드 중 하나다.

 

<낙하한다>

 

성석제 소설 <내 인생의 마지막 4.5>에는 별의 회전운동 원리를 설명하는 대목이 나온다. 돌을 세게 던져 초속 7.9km가 되면 돌은 땅에 떨어지지 않고 지구를 빙빙 돌게 된다. 조금 더 세게 던져서 11.2km가 되면 돌은 지구를 벗어나게 되고 16.7km를 넘으면 태양계를 벗어날 수 있다.

이 설명은 뉴턴의 사고실험과 일치한다. 뉴턴은 아주 높은 산에서 대포를 쏘는 상상을 했다. 너무 약하게 쏘면 포탄은 중력에 의해 다시 지구로 떨어질 것이다. 너무 강하게 쏘면 포탄은 지구 중력을 벗어나 우주로 날아갈 것이다. 정확히 그 중간 정도의 힘으로 쏘면 포탄은 지구 주위를 빙글빙글 돌게 될 것이다. 결국 떨어지는 것도 떨어지지 않는 것도 모두 중력 때문인 것이다.

 

황정은 소설 <낙하한다>는 이렇게 시작된다.

 

떨어지고 있다.

삼년은 지났을 것이다.

 

그리고 소설은 이렇게 끝난다.

 

조금도 빨라지지 않았다. 좀 전과 같은 속도로 떨어진다.

삼년 전과 같은 속도로 떨어진다.

농담이 아니다.

떨어지고 있다.

상승하고 있다.

 

구체적인 시공간은 나오지 않는다. 왜 떨어지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이야기랄 것도 별로 없다. 단지 떨어지면서 시작했고 여전히 떨어지면서 끝이 난다. 그런데 더 정확히는 떨어지는 게 아니라 부유하고 있는 것이다. 무중력 공간 속에서.

영화 <그래비티>는 무중력 상태가 불러오는 공포를 너무나 생생하게 시각적으로 재현했다. 그것은 떨어지는 것보다 훨씬 업그레이드 된 우주적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외롭고, 막막하며, 무엇보다 출구가 없다. 이 소설은 그런 소설이다. 외롭고, 막막하며, 출구가 없다. 소설은 시작도 끝도 없는 우주적 공포를 재현한다.

출구 없는 무중력 공간에서 떨어지는 것인지 상승하는 것인지조차 알 수 없을 때 우리는 차라리 무언가에 부딪치고 싶다는 상상을 하게 된다. 어떻게든 이 상황이 바뀌기를 바라며.

 

외롭고 두려운 것도 관성이 되었다.

관성적으로 외롭고 두렵다.

외롭고 두렵고 무엇보다도 지루하다.

떨어지고 떨어지고 떨어진다.

어디든 충돌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삼년째 떨어지고 있으니 슬슬 어딘가 충돌해도 좋을 것이다. 부서지더라도 충돌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출구 없는 우주를 부유하는 시대의 소설

 

소설은 의도와 무관하게 시대적 상황 속에 놓여 있다. 이 소설은 20년 전에만 나왔어도 아무런 공감대를 불러일으키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 20년 전이라면 이런 소설이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이 소설은 우주적 외로움을 공감할 수 있는 시대에만 나올 수 있다. 우주적 외로움과 공포가 뭔지, 왜 맥락 없이 주인공은 무중력 공간에 떨어져 있는 것인지 공감할 수 있을 때 나올 수 있는 소설이다. 나쁜 놈도 없다우리는 그저 재난에 처한 심정이 되어음 그냥 재난에 처한 심정이 된다뭘 어쩌자는 게 아니라<낙하한다>는 그런 소설이다입구도 출구도 없는 고통과 외로움에 대해 말하는 소설이다.

일정한 거처도 안정적인 수입도 뚜렷한 탈출구도 없는 수많은 이들의 고단한 삶이 떠올랐고 무엇보다 세월호가 떠올랐다. 오늘날 재난은 어느 날 사기를 당해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그런 종류의 재난이 아니다. 실수 따위와는 무관하게 공기처럼 존재한다. 그리하여 재난 자체가 일상이 되고, 재난이 관성이 되는. 눈보라 맞으며 광고판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어도, 어느 날 아파트 관리인이 비인간적 처우를 하소연하며 스스로 목숨을 던져도 집값 걱정을 하는, 이 세상이 재난이다. 재난은 이제 시스템 그 자체이다. 재난은 무중력 상태 우주처럼 도처에 압도적으로 펼쳐져 있다

내가 속한 좌표를 알 수 없고, 그리하여 앞으로 가는 것인지 뒤로 가는 것인지 심지어 떨어지는 것인지 상승하는 것인지도 알 수 없는 우주적 공포. 출구가 있다면, 방향이 있다면 누군가는 주장을 할 것이다. 저리로 가자고. 하지만 누구도 자신 있게 출구를 말하지 않는다. <낙하한다>는 방향감각을 상실한 시대의 소설이다.

낙하하는(상승하는) 내내 주인공 는 공상을 한다. 그러나 그 공상도 완결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단지 에피소드 몇 개에 불과하다. 그 에피소드 속에 방이 등장한다. 그 방에는 개수대가 있는데 개수구멍이 없다. 문도 없다. 시계도 없다. 한마디로 진공 상태다. 구체적인 시공간이 없다. 내부와 외부가 없다. 공상조차 시작도 끝도 없는 지옥이다. 그런데 주인공이 끊임없이 되뇌이는 문장이 하나 있다.

 

세 개의 점이 하나의 직선 위에 있지 않고 면을 이루는 평면은 하나 존재하고 유일하다.

 

이 문장은 고등학교 2학년이 공간도형을 배울 때 제일 처음에 등장하는 간단한 수학 명제다. 공간에 세 점을 찍어보라. 그 세 점을 지나는 평면은 유일하게 하나 존재한다. 세 점이 한 직선에 있을 때는 예외다. 카메라 삼각대나 향을 피우는 향로가 다리가 세 개인 이유다. 어떤 지형에서도 다리가 뜨지 않는다. 반면 다리가 네 개면 이야기가 다르다. 바닥이 고르지 않은 상태에서 세 다리를 고정하면 하나가 뜬다. 네 점을 지나는 평면은 없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책걸상을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수학 공식처럼 분명할수록 거짓말처럼 들리는 시대다. 위아래조차 분간할 수 없는 곳인데 하물며. 주인공은 이 문장이 애매하다고 말한다. ‘하나라는 단어가 두 번 들어간 것도 맘에 들지 않는다. 그런데 계속 되뇌인다. 계속 되뇌이다보면 외로운 것도 애매해질지 모른다고.

주인공 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장면은 지하철역이다. 지하철역에서 만난 아주머니가 출구를 물어보고 대답해주는 장면, 그게 전부다. 그런데 아주머니가 건넨 마지막 말은 이것이었다. 동시에 주인공이 기억하는 마지막 말이기도 하다.

 

친절하게 대답해줘서 고마워요.

 

친절, 대답, 고마움. 우주적 공포 속에서 기억해낸 세 단어. 진공상태에서는 음파도 반사되지 않는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그래서 대답이란 우리에게 방향감각을 일깨워주는 말. 현실에서 출구는 이렇게 간단한 것이지만, 그렇지만

Posted by 칸나일파

 요즘 꼬박꼬박 챙겨보는 드라마는 <미생>, <나쁜 녀석들>, <라이어게임> 세 편이다. 심지어 <미생>은 거의 하지 않던 본방사수를 하고 있다. 하지만 오늘은 <라이어게임> 이야기를 해 볼 생각이다. <라이어게임>2005년부터 연재되기 시작한 일본만화다. 2007년 드라마와 영화로 제작되었고 2009년에는 드라마 <라이어게임2>가 제작되었다. 올해 한국에서 드라마로 리메이크 되었다. 정확히는 일본만화의 판권을 산 것이라 일본드라마의 리메이크로 볼 수는 없다. tvN에서 방영되었고 12회로 끝났으나 시즌2가 나올 듯하다. 여기에서는 tvN에서 방영된 한국판 <라이어게임>만을 다룬다.

원래 이 드라마를 소재로 글을 쓸 생각이 없었다. 글을 써볼까 생각이 들었을 때도 아주 내키지는 않았다. 애초 내가 구상했던 글쓰기는 퓨전요리에 가깝다. 줄거리에는 수학 이야기가 거의 등장하지 않지만 수학적 관점에서 작품을 재해석하는 게 기본 컨셉이다. 그런데 이 드라마에는 수학 이야기가 아주 많이 나온다. 조금 과장을 보태자면 처음부터 끝까지 수학이야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드라마를 보며 저절로 떠오르는 생각이 너무 많아 글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라이어게임>은 매단계마다 게임을 통해 승패를 가르고, 사람들을 줄여나가며 최종우승자 1인을 뽑는 과정을 그린 드라마다. 단계마다 진행되는 게임은 우연이 아니라 수학적 계산에 기초해 승패가 갈린다. 물론 어느 정도 운도 따라줘야 하는 고도의 심리게임이기도 하다. 게다가 등장인물들은 여러 사건으로 얽히고설켜 있어 심리게임은 한층 복잡한 고차방정식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그 운조차도 수학적 계산에 의해 확률이 올라가고 내려간다. 재밌는 것은 상대의 심리를 읽어내는 근거도 수학이 제공해 준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 흥미를 유발하는 요소가 역으로 큰 장애가 되기도 한다. 시청률이 내 예상보다 낮게 나온 것도 이 때문인 듯하다. 줄거리 자체는 아주 흡인력이 높은데 막상 게임에 들어가면 규칙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수학을 전공한 내가 이 정도니 보통 시청자가 한 번에 게임 규칙을 이해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드라마에서는 매게임마다 규칙을 자세히 설명해주지만 어려운 건 여전하다. 그래도 기꺼이 리플레이를 반복해가며 볼 생각이 있다면 꼭 보시라. 그걸 만회해줄 만큼 충분히 재밌다. 게임 규칙을 이해했을 때 순간의 깨달음이 주는 기쁨은 덤이다. 야바위보다는 한층 우아하다. 그리하여 나에겐 필승법이 있어.’라고 한 번쯤 외쳐보게 되는 것이다.

 

수학으로 상대의 마음을 읽는다?

 

수학을 잘 하면 게임을 잘할까? 꼭 그런 건 아니다. 더러 확률을 높여줄 수는 있다. 고스톱을 많이 쳐 본 사람은 안다. 상대가 먹은 패, 바닥에 깔린 패를 잘 분석하면 확률적으로 승률을 높일 수는 있다. 그래도 운이 따라 주지 않으면 말짱 허사다. 그리고 인간이 하는 모든 게임은 심리전이기도 하다. 수학이 강심장을 만들어주지는 못한다. 그런데 수학이 상대의 심리를 읽는데 도움을 준다면 어떨까? 수학의 한 분야인 확률이론(probability theory)은 원래 게임에서 유래했다.

 

주사위 게임에서 상금은 64만 원이다. 3번을 먼저 이기는 사람이 상금을 모두 가져가기로 했는데 2:1인 상황에서 더는 게임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상금을 어떻게 나누어 가져야 하는가?”

 

파스칼(1623~1662)의 친구였던 메레가 던진 질문이다. 파스칼은 확률이란 용어를 아직 쓰지 않았지만 이 사례는 확률의 역사를 언급할 때 가장 자주 등장한다. 확률이론은 비교적 늦게 발달한 수학이론이다. 도형을 연구하는 기하학(Geometry)과 수와 식을 연구하는 대수학(Algebra)은 문명시대와 함께 시작되었다. 함수와 그래프를 연구하는 해석학(Analysis)은 대략 17세기 정도 시작되었으며 확률계산과 자료분석을 주로 하는 통계학(Statistics)은 그 뒤를 이어 가장 늦게 시작되었다.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수학이론 중에 게임이론이란 것이 있다. 특히 경제학에서 많이 활용되는 응용수학의 한 분야로 단일한 이론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게임과 관련된 이론 체계 전반을 지칭하는 용어다.[각주:1] 게임이론은 다양한 상황에서 인간이 어떻게 의사결정을 하는 것이 합리적인가를 수학적 관점에서 접근한다. 아주 간단한 예로 유명한 죄수의 딜레마가 있다. (쉽게 이해하고 싶은 사람은 무한도전 392회를 보시라.) 이해하기 쉬우니 1분만 뇌를 사용해보자.

 

사건 용의자 두 명이 체포되어 서로 다른 취조실에 격리되어 있다. 당연히 둘은 의사소통을 할 수 없다. 이들에게 주어진 조건은 다음과 같다.

 

1. 둘 중 하나가 배신하여 죄를 자백하면 자백한 사람은 즉시 풀어주고 나머지 한 명이 10년을 복역해야 한다.

2. 둘 모두 서로를 배신하여 죄를 자백하면 둘 모두 5년을 복역한다.

3. 둘 모두 죄를 자백하지 않으면 둘 모두 6개월을 복역한다.

 

자 이제 상상훈련을 해보자. 당신이 체포된 사람 중 하나라고 해보자. 상대가 침묵하는 경우 당신은 자백을 하는 게 유리하다. 상대가 자백을 하는 경우에도 당신은 자백을 하는 게 유리하다. 결국 당신은 자백을 선택하게 된다. 마찬가지 이유로 상대도 자백을 선택하게 된다. 둘 모두 침묵을 지키면 6개월을 복역하면 그만인데, 결론은 둘 모두 자백을 하고 5년을 복역하는 쪽으로 났다. 각자가 가장 합리적이라고 생각하고 행동했는데 결과는 서로 침묵하고 6개월을 복역하는 것보다 나쁜 쪽으로 기울었다.

여기에서 전제는 개별 행위자들이 항상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사고한다는 것이다. 개별 행위자들 사이에는 어떤 감정도 개입하지 않는다. 즉 신뢰든 불신이든 측정불가능한 요소는 배제한다. 이런 전제를 깔면 둘 사이 의사소통을 허용해도 결과는 똑같다. 뭔가 끔찍하지 않은가?

 

라이어게임 줄거리

 

<라이어게임>으로 돌아가보자.

남다정은 신뢰의 강자다. 어떤 상황에서도 무조건 일단 상대를 믿고 본다. 당연히 사기를 당하기도 제일 쉬운 캐릭터다. 아버지는 빚에 쫓겨 집을 나갔고 그 빚은 고스란히 자신에게 넘어왔다. 다니던 학교를 중단하고 알바를 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해도 이자조차 갚기 버거운 상황. 집에는 사채업자들이 들끓고 삶은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도 잘 웃고 남을 잘 돕고 쉽게 믿는다. 아마 주위에 이런 친구가 있었다면 성질나고 짜증나서 보고 싶지 않은 그런 사람이다.

하우진은 천재다. 명문대 최연소 심리학과 교수였으나 어쩐 일인지 범죄에 연루되어 감옥에 갇혔다가 출소한다. 행동, 몸짓, 얼굴표정 등 작은 변화를 놓치지 않고 거의 정확하게 읽어내 상대 심리를 파악한다. 이런 능력을 십분 발휘해 경찰을 돕기도 한다. 드라마는 그 누구도 믿지 말라.’는 하우진의 대사로 시작한다. 또 매게임마다 내뱉는 내겐 필승법이 있어.’라는 대사의 중독성이란.

강도형은 냉혈한이다. 좀처럼 자기감정을 들키는 법이 없으며 상대의 감정을 들었다 놓았다 한다. 영리한데 차갑다. 경제적 이해에 밝으며 거대한 게임을 기획하고 조종할 줄 아는 사람이다. 차가운 카리스마 뒤로 숨겨진 상처가 얼핏 얼핏 보이지만 어느 쪽이 진짜이고 어느 쪽이 가짜인지 구별하기 어렵다. 연기하는 자신을 연기하고 가면을 쓴 자신을 다시 가면으로 만드는 사람이다.

라이어게임이라는 TV쇼는 이 셋을 포함한 40명으로 시작한다. 단계를 거칠 때마다 생존자는 줄어들고 상금 규모는 점점 올라간다. 최종 우승자에게는 100억이라는 엄청난 상금이 걸려있지만 중간에 탈락하면 거꾸로 지금까지 받은 상금을 내놓아야 한다. 중간에 그 상금을 쓰기라도 하면 빚더미에 앉게 된다. 이렇게 시작된 게임은 사람이 줄어들수록 더욱 고도의 심리전 양상을 띠게 되고 그저 게임으로 즐기기엔 살벌한 기운마저 감돈다. 게다가 이 게임의 참가자는 애초에 기획된 각본에 따라 선별되었다. 드라마가 진행되면서 이 참가자들을 둘러싼 과거의 실체가 조금씩 드러나는데 긴장감이 상당하다. 그리고 라이어게임이라는 TV쇼는 점점 가상과 현실의 구분이 모호한 스릴러물이 되어간다.

 

당신은 게임 안에 있는가, 밖에 있는가

 

게임 참가자들은 상대를 이기기 위해 여러 가지 거짓말을 동원한다. 상대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건 안 된다. 게임 내에서 체결한 계약은 게임 내에서 유효하며 반드시 지켜야 한다. 때에 따라 돈을 동원하기도 하고 계약과 배신이 밥 먹듯 이루어진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되는가 하면 내 팀 안에 적의 내통자가 암약하기도 한다. 조금 머리가 아프기는 하지만 포기하지 말고 드라마 설명대로 한 번 따라해 보는 것도 재밌다. 그런 성의가 없다면 게임장면을 자주 건너뛰게 될지도 모른다. 고백하자면 나도 몇 번 건너뛰기를 눌렀다. 그래도 전체 이야기를 이해하는데 크게 지장은 없다.

개별 참가자들의 행동에는 기본적인 전제가 깔려 있다. 각자가 자신에게 가장 이익이 극대화되는 방향으로 움직인다는. 매게임에는 제법 간단치 않은 수학적 계산이 등장한다. 게임이론과 비슷한 상황도 자주 벌어진다. 참가자들은 자신에게 가장 유리한 상황이라고 머리를 굴리지만 오히려 더 나쁜 결과를 만들어내는 경우가 다반사다. 모든 인간이 수학적 계산에 따라 움직인다면 세상은 언제나 예측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게임판을 흔드는 가장 강력한 존재는 역설적으로 가장 게임을 못할 것 같은 남다정이다. 기본적인 게임이론의 전제를 무시하기 때문이다. 남다정은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심지어 남다정은 중간 생존자들에게 모두 똑같은 선택을 하면 승패가 갈릴 일이 없으니 최종상금을 골고루 나눠갖자는 제안을 한다. 누가 보더라도 말도 안 되는 제안이다. 애초에 게임의 전제를 무시하는 발상이다. 그런데도 남다정의 제안은 묘한 울림을 갖는다. 게임 참가자들의 사연이 처절하면 처절할수록. 자본주의 경쟁 사회에서 패배한 낙오자들은 서로를 부둥켜안고 가자는 제안에 조금씩 흔들린다.

여기에서 하우진과 강도형의 복잡한 셈법이 개입한다. 하우진은 남의 말을 믿지 말라면서도 정작 자신은 절대적 믿음을 갈망하며 남다정을 돕고, 강도형은 사람들의 관계를 적절히 이간질하며 효과적으로 자신의 승리를 향해 나아간다. 게임은 남다정을 사이에 두고 하우진과 강도형이라는 이질적인 천재들이 벌이는 처절한 사투의 양상이 되어간다. 결론은 생략하겠다. 당신이 예상한 그림을 그려보라.

 

라이어게임에서 우리는 선의를 믿어야 하는가

아니라면 수학을 믿어야 하는가?

 

물론 판은 남다정 생각대로 굴러가지 않는다. 그렇게 세상이 간단한 것이라면 인간은 진즉에 유토피아를 건설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남다정의 선의는 당연히 배신당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남다정의 생각을 박살내는 건 단 한 명의 배신자면 충분하다. 잠깐 또 머리를 써보자.[각주:2]

 

A, B 두 도시가 있다. 인구는 무한히 많다. 정보는 앞사람이 뒷사람에게 말해주는 방식으로 일자형으로 전달된다. 앞사람은 뒷사람에게 자기가 들은 내용을 그대로 전달하거나 반대로 전달하거나 둘 중 하나다. A도시 사람들은 매우 정직한 편이라 확률적으로 99%는 들은 내용을 그대로 전달하고, 1%만 반대로 전달한다. 반면 B도시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거짓이 만연해서 확률적으로 60%가 들은 내용을 그대로 전달하고, 40%는 반대로 전달한다. 최초 전달자는 올바른 정보를 갖고 있다. 자 두 도시에서 어떤 정보가 무수히 많은 사람을 거쳐 전달된다고 하자. 단계를 거칠수록 전달되는 정보의 진위여부는 어떻게 될까?

 

수학적으로 두 도시에서 올바른 정보와 거짓 정보가 전달될 확률은 똑같이 1/2로 수렴해간다. 아 슬프다. 이론적으로 100명 가운데 단 한 명꼴로 거짓말을 해도 결국 수많은 단계를 거치면 원정보가 그대로 전달될 확률과 거짓이 전달될 확률은 반반이란 이야기다. 많은 사람을 거치고 나면 A도시나 B도시는 모두 절반의 거짓말로 채워진다. 온 세상에 고담시 천지다. 악플러들은 A도시의 선의를 비웃는다. 수학은 당신에게 디스토피아를 선물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인간의 선의를 믿는다는 게 무슨 의미인가? 남다정의 선의는 단 한 명의 배신으로 쉽사리 망가진다. 단 한 명이라도 배신자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상황은 파국으로 치닫는다. 왜냐하면 단 한 명만 거짓을 말하더라도 내게 전달된 정보가 진실인지 거짓인지 알아낼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내게 전달된 진실이 거짓에 거짓을 더한 결과일 수도 있다.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는 것이다. 신뢰는 바닥부터 무너진다.

 

똑같은 수학적 사실을 두고 세상은 무슨 말을 하는가?

 

수학/과학법칙을 흔히 진리라고 부른다. 이것은 조건 없이 참이라는 말이다. 수학이론은 항상 매우 가치중립적인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런데 그 동일한 결과를 써먹는 사람에 따라 결론은 완전 판이하다.

맬더스라는 유명한 고전경제학자가 있다. 맬더스는 인구론이란 책에서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하는데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는 이론을 전개한다. 쉽게 말해 식량은 100, 101, 102, 103, 104, ... 이렇게 일정한 양이 증가하는데 인구는 1, 2, 4, 8, 16, 32, ... 이렇게 일정한 비율로 증가한다는 의미다. 그럼 어떻게 되겠는가? 당장엔 식량이 훨씬 많아도 시간이 흐르면 인구가 식량을 추월한다. 맬더스는 이 이론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른다. 시간이 흐르면 인구에 비해 식량이 모자라는 현상이 일어나는데 이것은 자연의 법칙이다. 따라서 인간이 굶주리고 죽는 것은 사회나 경제제도의 문제가 아니다. 그냥 자연법칙이다. 따라서 죄책감을 느끼지 마라. 그렇게 자연스럽게 세상은 다시 균형을 잡아간다.

맬더스는 19세기 중반 영국 산업혁명 시기에 자본가 입장을 대변한 고전경제학자다. 1842년에 도입된 광산법은 10세 이하 아동노동을 법적으로 금지시켰다.[각주:3] 이 말은 거꾸로 당시에 10세 이하의 아동노동이 횡행했다는 이야기다. 19세기 런던 노동계급의 평균수명은 20세를 넘지 못했다.[각주:4] 맬더스는 이런 잔혹한 체계를 정당화하기 위해 수학을 끌어들인 것이다.

맬더스 인구이론은 19세기 영국에서 몇 십 년간 잘 들어맞다가 용도폐기 된다. 일단 출산율이 일정하다는 가정 자체가 맞지 않았고 식량증가나 인구증가 패턴도 예상과 맞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견강부회식 이론은 엄청나게 많았고 앞으로도 많을 것이다. 슬프게도 이 이론들이 자신을 정당화하는데 수학을 동원한다.

게임이론 역시 다양한 방식으로 이용된다. 어떤 사람은 개별적 인간의 합리적 행동만으로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으니 중재자의 역할로서 정부 역할을 강조한다. 어떤 사람은 합리적 행동에 따라 산출되는 결과물을 어느 정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맬더스처럼 삐뚤어지면 그건 자연의 법칙이니 냅둬야 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개별행위자로서 국가가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가면 환경을 해치고, 자원을 남획하며, 분쟁 지역에 무기를 판매하는 등의 행위도 모두 정당화될 수 있다.

남다정이 많아지면 세상은 좋아지는가? 선의는 언제나 선한 결과를 만드는가? 그렇지 않다면 이 세상이 조금 더 좋아지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수학에는 도덕이 개입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수학을 사용하는 사람은 도덕을 개입시킨다. 특히 통계학과 경제학이란 학문에 두드러지는 특성이다. 사람에겐 어떤 의지가 먼저 있고 그 의지를 위해 지식을 동원하는 경우가 숱하다. 경제학은 진리가 아니다. 사람의 문제에 고정된 진리라 없다. 그러니 무조건 믿지 말라. 당신의 선의조차도. 다만 그 선의가 어떻게 선한 결과로 이어질지 부단히 고민해야 한다. 아아 이 한마디로 끝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겐 필승법이 있어."

  1. 보통 1921년 시행된 보렐의 연구를 그 시작으로 보지만 수학자 존 폰 노이만과 경제학자 오스카 모건슈테른이 1944년 쓴〈게임과 경제행동 이론〉을 제대로 된 최초의 이론서로 본다. 이 책은 수학적 이론은 물론 경제학·정치학·군사과학·작전연구·사업·법·운동·생물학 및 기타 다른 분야에 응용되어 이 분야의 전세계적인 급속한 발전을 촉진했다. 게임 이론은 전략적 사고에 대한 평범한 대화를 폭넓고 세련되게 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중에서 [본문으로]
  2. 이 문제는 이화여대에서 기출한 2008학년도 수리논술 기출문제와 맥락이 같다. [본문으로]
  3. 조은, 이정옥, 조주현 지음, <근대가족의 변모와 여성문제>, 서울대학교출판부 [본문으로]
  4. 한겨레 기사 5월 22일자 기사. http://i-soccer.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588520.html [본문으로]
Posted by 칸나일파

어니스트 볼크먼의 <전쟁과 과학, 그 야합의 역사>[각주:1]는 지난 수천 년의 인류 역사가 결정적 무기를 향한 인간의 끝없는 경쟁과 욕망의 역사였으며 거기서 전쟁과 과학이 어떤 상호관계를 맺었는지를 서술한 책이다. 이 책의 목차를 보고 바로 ‘시드 마이어의 문명(Sid Meier's Civilization)’을 떠올렸다. 이 글에서는 비디오게임 ‘문명’을 통해 전쟁과 과학, 그 야합의 역사를 조명하고자 한다. 게임에 관한 구체적인 정보는 2005년에 나온 ‘문명 4’를 기준으로 삼았다.


1991년 출시되어 여러 편의 속편을 낳은 ‘문명’은 턴제 전략 시뮬레이션계에 큰 획을 그은 게임이다. 플레이어는 기원전 4000년부터 중세와 근현대를 거쳐 가까운 미래까지 한 문명의 지도자가 되어 문명의 흥망성쇠를 결정한다. ‘문명’에는 정치체제와 종교, 문화, 도시계획, 외교 등 고려해야 할 다양한 요소가 있지만 핵심적인 것은 군사유닛의 운용과 테크트리, 즉 전쟁과 과학이다. 중요한 테크를 빨리 탈수록 다른 문명보다 이른 시기에 더 강력한 군사유닛을 뽑을 수 있기에 과학기술의 경쟁은 곧 군비경쟁이다.


1991년작 시드 마이어의 문명


역사상 최초의 군비경쟁은 금속을 무기 제조에 유용한 소재로 만들고자 하는 경쟁이었다. 청동기술을 연구하면 만들 수 있는 창병(공격력 4)과 도끼병(공격력 5)은 기본 유닛인 전사(공격력 2)의 두 배 이상 되는 공격력으로 보병들의 백병전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하지만 이러한 무기도 말이 끄는 전차 앞에서는 맥을 못 추었다. 특히 이집트 문명의 고유 유닛인 전투전차(공격력 5, 이동력 2)는 기존 유닛들의 두 배나 되는 기동력을 바탕으로 고대의 전쟁터를 지배했다.


그러나 이집트를 비롯한 전차 부대를 거느린 문명들은 어느 시대의 어느 곳에서라도 누군가는 반드시 좀 더 우월한 신무기를 개발하게 되어 있다는 역사의 진실을 간과하는 자만에 빠졌다. 그 신무기는 철이라 불리는 금속이었다. 철제기술을 연구한 다른 문명들이 검사(공격력 6)를 이끌고 쳐들어오기 시작했을 때 전차를 앞세운 문명들은 자신들의 결정적 무기가 더 이상 결정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전차 - 전략자원인 말을 확보하고 바퀴를 연구하면 생산 가능한 최초의 기병유닛


어떻게 전차가 개발되었으며, 어떻게 전차가 고대의 전쟁터를 지배했으며, 그리고 훗날 보다 우월한 과학기술에 의해 그 전차가 패배하게 되었는지 그 전 과정은 과학이 어떤 방식으로 전쟁에 영향을 미치는가를 전형적으로 드러내 보여준다. … 그 순환의 과정은 이런 식이다. ‘결정적인 무기’의 개발, 그 무기가 전쟁터의 절대 강자로 군림하는 시기, 맞수의 등장, 그리고 다시 더 크고 더 좋은 무기의 개발, 또 그에 맞서는 무기의 개발이 끝없이 반복되는 것이다.


철의 발견 이후에도 그러한 순환은 계속되었다. 무엇보다 공성유닛인 캐터펄트(턴당 8%씩 도시 방어력을 깎음, 최대 50%까지 스플래시 대미지)의 등장이 난공불락으로 보였던 두꺼운 성벽(도시 방어력 +50%) 안에 위치한 적을 손쉽게 공격할 수 있게 해주었다. 중세에는 장궁병(공격력 6, 도시방어 +25%)과 석궁병(공격력 6, 밀리유닛 상대 +50%)이 전쟁의 흐름을 바꾸어놓았고, 철갑으로 중무장한 기사(공격력 10, 이동력 2)가 전쟁터의 맹주로 위용을 떨쳤다.


새로운 기술의 발견은 이전에는 생각지도 못한 새로운 유형의 경이로운 무기를 탄생시켰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화약의 개발로 공성전뿐만 아니라 야전에서도 강력한 힘을 보여준 공성유닛 대포(공격력 12)와 소총병(공격력 14, 기병유닛 상대 +25%)이 중세 기사를 전쟁터에서 완전히 내쫓았다. 현대에는 기갑유닛인 탱크(공격력 28)와 현대전차(공격력 40)가 최강의 지상병기로 군림했고, 공중유닛인 전투기와 폭격기 그리고 헬리콥터가 등장해 전장의 개념을 한 차원 확장시켰다.


문명 테크트리의 일부분 - 이를테면 화약을 연구하면 머스킷총병을, 강선을 연구하면 소총병을 만들 수 있다.


이처럼 ‘위대한’ 정복자의 뒤에는 항상 제국의 강력한 군사력을 뒷받침하는 뛰어난 과학기술이 있었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왕의 가장 큰 업적도 그의 이름을 따서 만든 이집트의 도시 알렉산드리아에 무세이온이라는 왕실과학연구기관을 건립한 것이었다. 그는 과학을 제도화했으며 국가가 운영하는 연구소나 조병창, 조선소에 과학자들을 끌어들여 전쟁병기를 개발하도록 했다. 덕분에 무세이온은 1800년 후에야 찾아올 르네상스 때까지 세계 과학의 중심지로 남을 수 있었다.


군사기술의 혁신이라는 동기는 고금을 막론하고 과학의 발전에 주요한 추진력으로 작용했다. 설사 과학자들이 우주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자연의 신비를 밝히고자 하는 순수한 동기를 가지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재정을 지원하는 국가의 심산은 그렇지 않았다. 오늘날 미국 전체 연구개발 예산의 20%가 국방 연구개발 예산이고, 정부 연구개발 예산에 한정할 경우 그 비율은 50%를 초과한다. 더욱이 모든 과학자가 그런 순수한 마음으로 연구에 임한 것도 아니었다.


많은 과학자들이 열렬한 애국자로서 순수과학을 버리고 자신의 모든 역량을 군사기술의 발전에 바쳤고, 국가의 위기 상황에서는 과학의 실용성을 ‘불명예스럽고 저속한’ 것으로 여겼던 과학자들조차 예외가 아니었다. 로마의 침략으로부터 시라쿠사를 지키고자 했던 아르키메데스부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핵무기의 개발을 위해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미국의 과학자들까지 그러한 예는 수도 없이 많다. ‘문명’에서도 위대한 과학자와 기술자를 비롯하여 많은 위인들이 조국을 위해 자신의 한 몸을 기꺼이 희생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조국을 위해 제 한 몸을 기꺼이 바치는 위대한 기술자


우리가 역사로부터 배울 수 있는 또 하나의 진실은 과학의 비법은 아무리 단단히 감추어도 언젠가 외부로 퍼지는 것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문명’의 맨해튼 프로젝트를 통해서도 잘 드러난다. 한 플레이어가 맨해튼 프로젝트를 완성하면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플레이어가 핵무기를 생산할 수 있게 된다. 실제로 핵무기 개발은 통치자의 의지만 있다면 기술적 구현이 어렵지 않기 때문에 미국 이후로 여러 나라가 독자적으로 핵개발을 할 수 있었다. 이것이 현실에서 핵확산을 막기가 어려운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끝없는 군비경쟁과 전쟁과 과학의 쌍방간 야합의 역사는 과거에도 미래에도 필연적인 것일까? 현실에서든 게임에서든 지금 상황에서 상대 문명의 군사적 위협에 맞서기 위한 최소한의 군사력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러한 현재 상태가 언젠가 모종의 합의를 통해 다 같이 총을 내려놓을 수 있는 가능성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문명’에서도 군사적 정복과 지배가 게임에서 이기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그 밖에 문화적 승리와 외교적 승리, 그리고 가장 먼저 우주식민지 개척에 성공하면 성취되는 과학적 승리가 있다. 과학적 승리는 한 문명이 군사적 우위가 아니라 과학기술의 힘만으로 인류 역사에 위대한 족적을 남길 수 있음을 시사한다. 어쩌면 이것이 ‘문명’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가 아닐까.


  1. Ernest Volkman, Science Goes to War, 2002. (석기용 옮김, 전쟁과 과학, 그 야합의 역사, 2003) [본문으로]
Posted by 人鬪

모든 곡선은 직선이야

 

모든 곡선은 직선이야. 앞으로 나가기만 하면 돼.

 

버스 안에서 저 문장을 처음 봤을 때 버스는 한강을 건너고 있었다. 순간 머릿속에 전구가 반짝 켜졌다. 그 느낌을 잃지 않으려고 책을 덮고 강을 내다봤다. 대체로 맑지만 구름이 간간히 섞인 하늘처럼 조금 모자란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시작은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학을 소재로 새로운 글쓰기에 도전한 건 순전히 까지는 아니어도 어느 정도는 저 문장 때문이다. 구상은 있었지만 계획은 없었다. 이를테면 저 문장은 불을 지른 격이다.

모든 곡선은 직선이야.”뭐 그냥 문학적 수사 정도로만 여길 수도 있는 이 문장은 수학적으로 참일 수도 있다. 참일 수도 있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면 어떤 전제를 깔면 참이기도 하다는 말이다. 어렴풋이나마 그 의미를 아는 사람은 이 문장에서 잠시 상상을 해 볼수 있다. 비현실의 현실성에 대해. 작품을 보는 시선이 달라질 수 있다. 작가가 의도했든 안했든. 그래서 나는 혼자 버스 안에서 피식 웃었다. 그리고 글쓰기를 시작했다.


  

차원이 다르네

 



당신은 선 위를 움직이는 점이다. 수학적으로 길이만 있고 면적이나 부피 개념이 없는 1차원 세계 속에 살고 있다. 선 끝에 도달하면 또 다른 선으로 넘어갈 방법이 없다. 그러나 면적이 존재하는 2차원 속에 살고 있다면 간단히 점프해서 넘어가면 된다. 2차원 안에는 무수히 많은 1차원이 존재한다. 쉽게 말해 면 안에는 무수히 많은 선들이 존재한다. 따라서 2차원은 1차원의 단순합으로 표현될 수 없으며 그야말로 차원이 다른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세계다. 1차원 세계 속에서는 1차원 밖을 상상할 수 없다. 또 다른 1차원의 존재를 알 수도 없다. 존재를 모르니 당연히 이동할 수 없다. 1차원 세계에 속한 존재에게 선을 벗어난 세계는 모두 인식불가능한 외부다.




2차원과 3차원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3차원 안에는 무수히 많은 2차원이 존재한다. 입체 안에는 무수히 많은 면이 존재한다. 2차원 세계 속에서는 2차원 밖을 상상할 수 없다. 2차원 세계에 속한 존재에게 면을 벗어난 세계는 모두 인식불가능한 외부다.

그렇다면 3차원에서 3차원으로 이동하는 일도 가능할까? 지금까지 차원이 상승하는 과정으로부터 실제 우리가 경험한 적은 없지만 4차원 세계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4차원 세계 속에는 무수히 많은 3차원이 존재하고 3차원에서 또 다른 3차원으로 이동하는 일이 가능해진다. 높은 차원에 속한 존재는 낮은 차원의 세계를 인식할 수 있지만 그 반대는 불가능하다.

 

 

<3개의 식탁, 3개의 담배>

  

SF소설은 “science fiction”의 줄임말로 SF소설이라 하면 과학 지식에 기초해 쓰여진 소설이라는 일차적 의미를 갖는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이를 흔히 공상과학소설로 번역해서 그 느낌이 환타지소설이나 무협소설처럼 뭔가 뻥을 친다는 식으로 의미가 격하되는 기분을 느끼게 된다.[각주:1] 과학과 공상의 경계는 늘 모호하지만 그 장르가 갖는 영역의 애매함과 무관하게 SF 장르는 분명히 존재한다.

나만해도 매니아까지는 아니어도 SF영화(소설 말고)를 제법 많이 챙겨보는 편인데 이야기가 그럴 듯하지 않으면 신경이 거슬리는 편이다. 그럴듯하게 보이려면 수학/과학적 사실이 적당히 동원되어야 한다. 일단 현실과 다른 몇 가지 전제를 깔아주고(여기부터 시비를 거는 사람은 대체로 SF라는 장르하고 친해질 수 없다.) 그 안에서 내적 논리성에 충실하다면 충분히 리얼리티를 획득할 수 있다. 해리포터 시리즈를 생각해보라. 킹스크로스역 93/4 정류장이라는 조건을 받아들이면 호그와트에 사는 해리포터 친구들을 만날 수 있다물론 현실에서는 배우의 얼굴이 빠르게 변해 강력한 분장이 필요하겠지만 말이다.

 

3개의 식탁, 3개의 담배SF소설에 가깝다. 시공간은 미래의 지구, 정확한 시점은 알 수 없다. 여기서 조건 없이 받아들여야할 전제라면 담배로 폭약을 만들어 원하는 부분만 우주로 날려버릴 수 있다는 정도일 뿐 차가 고속도로를 200km정도로 질주하는 것으로 보아 현재 지구와 설정이 아주 많이 다르지도 않다.

하나 더. 여기에서는 사람마다 남은 수명을 시(hour)단위로 표시한 시계를 차고 있고 그 시계에 찍힌 숫자가 사람 이름이 된다. 시간이 지날 때마다 이름이 바뀐다. 사람은 숫자로 호명되며 존재는 정체성을 상실한다. 삶은 언제나 소멸을 향해 달려가는 여정에 불과하다. 여기에서는 죽음이 삶을 지배한다.[각주:2]

등장인물은 킬러와 소녀. 킬러 2021394199가 소녀를 처음 만난 순간에 소녀 이름은 100이다. 1시간이 지날 때마다 삶이 1%씩 닳아 없어지는 이 소녀는 죽음에 대한 공포에 지배당하고 있다. 반면 소녀와 대비되는 인물인 킬러는 감정을 억누른 채 표정 없이 살아간다. 남아 있는 시간이 다를 뿐 죽는 건 어차피 모두 똑같다고 말한다.

킬러에게 삶은 작업(청부살인)과 또 다른 작업을 잇는 단순한 과정의 반복이다. 순차적으로 놓인 점(살인)을 연결하는 1차원적 삶이다. 요컨대 그의 삶은 선형이다. 그는 길을 선택할 필요가 없다. 내비게이션을 켜서 다음 목표물의 주소를 입력할 뿐이다. 언제나 목표물에 이르는 최단거리만을 고려하므로 주어진 길 밖의 삶을 인식불가능하다. 따라서 그에게 모든 곡선은 직선이다. 왜냐하면 앞으로 나가기만 하면 돼니까.

하지만 킬러는 짐짓 쿨한 척하는 것일 뿐이다. 존재의 바닥에서 킬러는 언제나 극단적인 공포와 싸우고 있다. 킬러는 그 공포를 이겨내기 위해 스스로 삶의 의미를 제거해버리는 전략을 취했다. 그에게 삶은 단순한 것이어야했다.

 

죽음의 공포란 무섭죠. 압니다. 저도 그런 공포를 많이 겪었습니다. 우주증후군이라는 건데, 들어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시작은 이렇습니다. 제가 갑자기 저를 빠져나와요. 일종의 유체이탈 같은 거죠. 빠져나와서는 지구를 벗어나고 은하계를 벗어나고 또 먼 우주를 벗어나서 어디론가 아주 멀고 크고 가늠할 수 없는 곳으로 사라집니다. 먼지보다도 작고 작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 존재가 되는 거죠.

3개의 식탁, 3개의 담배

 

소녀의 삶도 마찬가지다. 너무 이른 나이에 생을 마감해야만 한다는 공포와 분노는 죽음이라는 종착지를 향해 가는 단순한 경로 외에 무엇도 상상하지 못하게 만든다. 킬러와 소녀. 두 개의 1차원 세계가 만났을 때 서로 넘나들 수 있는 방법은 당장 없다. 질적으로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야만 서로의 세계가 연결된다. 관계성을 회복해야 삶은 다른 차원으로 비약할 수 있다.


 

직선=최단거리?


직선이란 무엇인가?’라고 물으면 당신은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유클리드 <원론>에 따르면 직선은 점들이 한결같이 고르게 놓인 것이다.’그러나 한결같이 고르다는 말도 애매하긴 매한가지여서 직관적으로는 차라리 직선이란 말이 이해하기 쉽다. 직선이란 단어는 일상적으로 써왔지만 점들이 한결같이 고르게 놓여있다는 서술은 생소하다.

직선이 정의되면 선분은 직선의 부분으로 이해하면 된다. 직관적으로 선분을 이해하는 방법 중에 하나가 두 점을 잇는 최단거리라는 개념이다. 너무 쉬운 이야기다. 두 점을 연결하는 최단거리는 선분(직선의 일부)이다. 물론 반대로 생각할 수도 있다. 두 점을 연결하는 최단거리가 선분이고 그 연장이 직선이라고.

자 그럼 구면 위에서 두 점을 잇는 최단거리는 무엇인가? 쉽게 지구를 떠올려보자. 지구상의 두 점을 연결하는 최단거리는 무엇일까? 선분을 평면에서와 똑같이 이해한다면 선분은 구를 뚫고 지나갈 것이다. 구면 위에서는 최단거리를 이해할 새로운 개념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일반적인 곡면(surface)에서는 어떤가?






구를 평면으로 자르면 원이 생긴다. 이 원들 가운데 구의 중심을 지나는 평면으로 자른 원이 가장 큰데 이를 대원이라고 부른다. 이 대원의 일부가 측지선(geodesic)이고 측지선이 구면 위에서 두 점을 잇는 최단거리다. 대원을 따라 걸어라. 그러면 당신은 지면과 수직을 이루며 가장 균형 잡힌 자세로 걷게 될 것이다. 

구면에서는 대원=직선, 측지선=선분이라는 개념이 성립한다. 선분 3개로 이루어진 도형이 삼각형이라면 구면 위에서는 삼각형의 내각의 합도 180도를 넘게 된다. 대전제가 하나 바뀌면 대전제로부터 도출된 사실들이 줄줄이 다 바뀐다.

기존 설명방식이 잘못된 게 아니다. 이전 설명이 평면의 세계에서는 여전히 잘 들어맞는다. 부분적인 정의로서는 충분하다. 하지만 일반적인 정의로서는 부족하다. 수학에서는 이처럼 틀리고 맞고의 문제라기보다는 어떤 시스템을 전제하느냐에 따라 지식의 구성체계가 바뀐다. 말그대로 차원이 다른 문제인 것이다. 현대 수학에서는 영역에 따라 차원(dimension), 공간(space), 그룹(group), 장 또는 체(field) 등 다양한 개념을 사용하여 지식의 층위를 구분한다.


 

다시 <3개의 식탁, 3개의 담배>

 

다시 킬러에게 모든 곡선은 직선이다. 왜냐하면 킬러는 언제나 최단거리만을 따라가기 때문이다. 목표물과 목표물을 잇는 최단거리. 점과 점이 선으로 연결된 1차원적 선형의 세계. 이 세계를 벗어나는 길은 다른 세계와 접속되는 길 뿐이다. 다른 세계와 만나려면 일단 자신에게 주어진 길, 최단거리를 벗어나야 한다. 킬러와 소녀가 아주 잠시나마 각자에게 주어진 궤적을 벗어났던 순간이 있다.

 

202139419697은 블랙홀 체험관 뒤쪽의 공원으로 갔다. 두 사람 모두 차를 탈 기분이 아니었고, 말을 할 기분도 아니었다. 온몸의 힘이 다 빠져버린 것 같기도 했고, 어디선가 힘을 얻은 것 같기도 했다. 100이 된 것 같기도 했고, 0이 된 것 같기도 했다. 두 사람은 공원의 작은 길을 계속 걸었다. 20213941962021394195가 될 때까지, 9796이 될 때까지, 계속 걸었다.

3개의 식탁, 3개의 담배

 

물론 그 경험은 너무 미비하고 짧았다. 그 둘은 서로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고 질적으로 다른 차원을 만들어내지는 못했다. 그러나 자기경로를 벗어나는 순간 일탈은 시작되었다. 이제 둘은 어디로 향할 것인가? 96시간 밖에 주어지지 않은 이에게 어떤 선택이 주어질 수 있을까? 소녀는 다음 목표물을 우주로 날려버릴 때 자신도 함께 날려달라고 부탁한다. 삶의 종착점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 소녀는 가장 근본적인 일탈을 감행한다.

 

구십육 시간이 남은 걸 아는 사람에게 죽는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요.”

그럼 뭐가 중요한데?”

질문이요.”

어떤 질문?”

어떤 질문이든 상관없어요. 답은 이미 다 알고 있으니까 저한테 필요한 건 질문이에요. 구십육 시간이 저에겐 답이에요. 질문을 알고 싶어요.”

3개의 식탁, 3개의 담배

 

목표물 토드와 함께 소녀를 우주로 날려 보내려던 킬러는 처음으로 격투 중에 부상을 입는다. 그리고 의도치 않게 자신까지 우주로 발사되는 순간 소설은 끝이 난다. 킬러는 자신이 가게 될 우주를 생각했다. 께 우주로 날아가는 건 어떤 기분일까? 소녀에게는 구원과도 같은 순간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그래서인지 이 결말이 슬프지만은 않았다.

그렇다면 킬러에게는? 킬러는 자신의 룰을 아주 조금 어긴 것치고는 너무 큰 대가를 치룬 셈이다. 완전했던 삶은 파괴되었다. 그런데 결말은 역설적으로 라이프컨트롤센터가 정해준 운명을 벗어나는 최초의 순간이기도 하다. 그 우주에서 킬러와 소녀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결말에서 죽음이 아니라 다른 세계로의 이행을 상상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설령 그것이 아주 고독하고 외로운 소멸을 의미할지라도 말이다.

  

각자가 선택한 세계 속에는 고유한 시간과 거리 개념이 존재한다. 다른 세계와 충돌하지 않는 세계는 그 자체로 완고하고 자기완결적이다. 그 바깥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의미를 찾기 시작하는 순간 외부가 형성된다. 외부와 대면하게 되었을 때 자기세계는 방어본능과 소통본능이 동시에 작동한다. 질적으로 다른 세계로 넘어가려는 이에게 외부는 가장 고통스럽지만 매혹적인 장소다. 관계성의 변화는 가장 혹독한 댓가를 요구할 수도 있다. 결론은 알 수 없다. 그러나 간절한 이에게 더 많은 길이 열릴 것이다. 


  1. 이와 관련해서는 영화평론으로 유명한 블로거 듀나의 글 “ http://www.djuna.kr/movies/etc_2000_08_25.html” 을 참고. [본문으로]
  2. 메갈로시티의 라이프컨트롤센터가 수명을 결정할 뿐, 구체적인 배경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소설 속 설정은 마츠모토 레이지(松本零士)의 ‘은하철도 999’시리즈를 연상시킨다. 부유층이 사는 첨단도시 메갈로폴리스에서는 죽음을 두려워한 인간들이 거액을 들여 육체를 기계화시킨다. 죽음을 극복한 대신 감정도 사라지게 되는데 이는 킬러가 삶을 대하는 태도와 맞닿아 있다. [본문으로]
Posted by 칸나일파

1989년에 첫 편이 출시되어 이후 심시티2000, 심시티3000, 심시티4 등 많은 속편을 낳은 심시티(SimCity)’ 시리즈는 가장 많은 판매 부수를 올린 비디오게임 중 하나로 기록되어 있다. 이 심시티 시리즈의 특징은 결말이 열린 게임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성취되면 게임이 종료되는 일정한 목표가 없이 끝없이 게임이 진행된다는 뜻이다. 이 글에서는 이와 같은 과정 지향적 게임들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그 전에 먼저 놀이와 게임에 대한 몇 가지 고전적인 저작들을 살펴보자.


1989년작 윌 라이트(Will Wright)의 심시티


요한 하위징아(Johan Huizinga)[각주:1]는 <호모 루덴스(Homo Ludens: 놀이하는 인간>에서 인간 사회의 본질이 놀이에 있다고 보았다. 그는 다양한 언어에서 놀이를 나타내는 단어들을 살펴봄으로써 놀이 개념을 파악하고자 했다. 그리스어에는 파이디아(paidia)와 아곤(agon)이라는 두 단어가 있다. 파이디아는 원래 어린아이의 놀이를 뜻하는 단어였으며, 아곤은 경기 혹은 경연을 가리킨다. 한편 라틴어는 놀이의 전 영역을 통칭하는 루두스(ludus)라는 단일한 단어만을 갖고 있다.


로제 카이와(Roger Caillois)[각주:2]와 장 피아제(Jean Piaget)[각주:3]는 규칙의 복잡하고 엄격한 정도에 따라 초기 아동이 하는 파이디아/놀이(play)와 보다 나이든 아이나 어른이 하는 루두스/게임(game)을 구분했다. 둘의 차이라면 카이와가 규칙이 덜 복잡한 게임과 더욱 복잡한 게임으로 구분한 반면에, 피아제는 사실상 규칙으로부터 자유로운 운동감각적 놀이 및 상징적 역할놀이와 규칙을 가진 게임으로 구분했다는 점이다.


놀이는 특정 시간과 공간 내에서 벌어지는 자발적 행동 혹은 몰입 행위로서, 자유롭게 받아들여진 규칙을 따르되 그 규칙의 적용은 아주 엄격하며, 놀이 그 자체에 목적이 있고 ‘일상생활’과는 다른 긴장, 즐거움, 의식(意識)을 수반한다. -요한 하위징아, <호모 루덴스>


한편 곤살로 프라스카(Gonzalo Frasca)[각주:4]에 따르면 규칙이 없는 놀이 혹은 게임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점에서 그의 견해는 모든 놀이에는 놀이가 벌어지는 장소와 시간에서 무엇이 통용되는지를 결정하는 규칙이 있다고 본 하위징아와 일치한다. 하지만 하위징아가 놀이(파이디아)와 경기(아곤)는 근본적으로 분리될 수 없다고 주장한 것과 달리, 프라스카는 게임의 승리 및 패배를 가르는 종료 조건의 유무에 따라 게임을 분류했다. 그러한 종료 조건을 루두스 규칙이라고 하며, 게임의 진행과 관련된 나머지 규칙을 파이디아 규칙이라고 한다.


모든 게임에는 파이디아 규칙이 있다. 예를 들어, 전래놀이인 강강술래에는 손을 잡고 원을 만들어 노래를 부르며 돈다는 파이디아 규칙이 있지만 루두스 규칙은 없다. 장기에는 졸(卒)이 앞이나 옆으로 한 칸씩 움직일 수 있다는 등의 파이디아 규칙과 상대방의 왕을 잡으면 이긴다는 루두스 규칙이 있다. 프라스카는 강강술래처럼 파이디아 규칙만 있는 게임을 ‘파이디아’, 장기처럼 파이디아 규칙과 루두스 규칙이 모두 있는 게임을 ‘루두스’라고 정의한다. 승리 및 패배 조건의 유무에 따른 프라스카의 범주 구분은 규칙의 복잡성처럼 모호한 기준에 따른 다른 학자들의 분류보다 훨씬 더 명확하다.


어쩌면 ‘승리 및 패배’라는 표현보다 ‘성공 및 실패’라는 표현이 적당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싱글플레이어 게임이나 협력게임에서는 다른 플레이어와의 경쟁에서 승리를 거두는 것이 아니라, 게임 속의 환경에 맞서 일정한 성공 요건을 성취하는 것이 게임의 목표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싱글플레이어 게임과 멀티플레이어 경쟁게임 및 협력게임 모두 게임의 목표가 있으면 루두스에 속한다. 이 점에서 루두스와 파이디아는 각각 목표의 달성을 지향하는 ‘결과 지향적’ 게임과 플레이 과정 자체를 즐기는 ‘과정 지향적’ 게임이라고 부를 수 있다.


심즈 - “심시티 제작자의 사람 시뮬레이터”


그렇다면 ‘덜 복잡한’ 규칙을 가진 놀이를 제외하고 제법 형식을 갖춘 복잡한 게임들 중에서도 게임의 목표가 없는 파이디아가 존재할까? 비디오게임의 주요 장르 중 하나를 차지하는 시뮬레이션 게임들 다수가 거기에 해당한다. 시뮬레이션 게임이란 현실의 다양한 상황들을 모사하는 게임을 말한다. 시뮬레이션 게임은 다시 전략 시뮬레이션, 건설 시뮬레이션, 경영 시뮬레이션, 연애 시뮬레이션, 비행 시뮬레이션, 운전 시뮬레이션 등 다양한 하위장르로 구분되기도 한다.


물론 많은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과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처럼 목표가 분명한 것들도 있다. 이때의 목표는 각각 상대 진영과 캐릭터의 ‘정복’이 될 것이다. 한편 심시티나 ‘심즈(Sims)’ 같은 시뮬레이션 게임들은 도시를 건설하고 한 가족의 삶을 가꾸는 과정 자체에서 즐거움을 제공한다. 이 밖에도 ‘심팜(SimFarm)’, ‘심앤트(SimAnt)’, ‘심콥터(SimCopter)’, ‘심타워(SimTower)’, ‘심어스(SimEarth)’ 등 게임의 제목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심(Sim)’이 바로 시뮬레이션(simlulation)이라는 단어에서 딴 것이다.


위 이름들에서 보듯이 시뮬레이션 게임에서 다루는 소재는 농장, 개미집, 헬리콥터, 건물, 행성까지 정말 다양하다. ‘마이크로소프트 플라이트 시뮬레이터(MSFS)’라는 비행 시뮬레이션 게임은 실제로 항공기 조종사 교육용으로 사용될 정도로 정확한 모사를 자랑한다. 전투기를 조종해 공중전을 벌이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한 공항에서 다른 공항까지 항공기를 몰고 가는 게 무슨 재미가 있을까 싶기도 하지만, 이 같은 가상현실 체험이 바로 시뮬레이션 게임의 묘미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온라인 롤플레잉 게임(MMORPG)들도 파이디아라고 볼 수 있다. 레벨업이나 퀘스트처럼 작은 목표들이 있기는 하지만 게임의 궁극적인 목표와 끝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을 잘 살린 ‘세컨드 라이프(Second Life)’ 같은 게임도 있다. 세컨드 라이프에는 레벨업도 퀘스트도 없다. 현실의 일상생활 전부를 가상으로 옮겨놓은 심즈의 온라인 버전인 셈이다. ‘마인크래프트(Minecraft)’처럼 플레이어의 자유도를 극대화한 오픈월드 혹은 샌드박스 게임들도 파이디아의 좋은 예이다.


마인크래프트 - 무엇이든 만들 수 있는 놀이터의 모래밭처럼 플레이어의 창조성을 극단적으로 발휘할 수 있는 샌드박스 게임의 하나


오늘날 많은 루두스(결과 지향적 게임)가 경쟁게임이고 파이디아(과정 지향적 게임)가 시뮬레이션 게임이라는 관찰이 일찍이 하위징아에게서도 비슷하게 발견된다는 점이 흥미롭다. 하위징아는 고등 형태의 놀이에는 두 가지 기본적 양상이 있는데, 하나는 어떤 것을 얻기 위한 ‘경쟁’이고 다른 하나는 어떤 것의 ‘재현’이라고 보았다.


프라스카는 위에서 언급한 파이디아들이 ‘피억압자의 게임’이 될 잠재성을 갖추고 있다고 말한다. 게임 디자이너가 미리 규정한 틀을 따르는 대신에 플레이어 스스로가 규칙을 만들어나가는 게임이 바로 파이디아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파이디아를 즐기는 플레이어는 아무 목표 없이 헤매는 것이 아니라 자기만의 루두스 규칙을 좇는다. 그것은 세계 최대의 도시 건설이 될 수도 있고, 그렇게 건설한 도시를 화산 폭발로 파괴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파이디아 규칙 역시 플레이어에 대한 암묵적 제약을 가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예컨대 심즈에서 플레이어의 캐릭터는 군인, 과학자, 범죄자, 사업가 같은 직업은 가질 수 있지만 시민단체 활동가가 될 수는 없고, 어린이와 청소년은 무조건 학교에 가야 한다. 한편으로 사용자가 직접 게임의 규칙를 고친 모드(mod: modification)를 제작하여 플레이하고 다른 플레이어들과 공유하는 문화가 게이머들 사이에 존재한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이 플레이어와 디자이너가 분리되지 않고 하나 되는 진정한 게임 해방으로 가는 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 Johan Huizinga, Homo Ludens: A Study of the Play Element in Culture, 1938. (이종인 옮김, 호모 루덴스 - 놀이하는 인간, 2013) [본문으로]
  2. Roger Caillois, Man, Play and Games, 2001. [본문으로]
  3. Jean Paiget, Play, Dreams and Imitation, in Children, 1951. [본문으로]
  4. Gonzalo Frasca, The Videogames of the Oppressed, 2004. (김겸섭 옮김, 억압받는 사람들을 위한 비디오게임, 2008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Posted by 人鬪
이전버튼 1 2 이전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