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토이즈>를 보면 재밌는 장면이 나온다. 형으로부터 장난감 회사를 물려받은 전직 군 장성 릴랜드는 장난감을 개조해 무기를 만들려는 전쟁광이다. 그는 아케이드 게임장에서 탱크 시뮬레이션 게임을 하며 적의 병력은 쏘지 않고 “어딜 가나 끼어드는 빌어먹을 유엔” 트럭들만 골라 파괴한다. 적의 탱크를 쏘면 300점, 헬리콥터를 쏘면 500점을 얻고, 유엔 트럭을 쏘면 벌칙으로 무려 1000점이 감점되는데도 말이다.


이렇듯 플레이어들은 오로지 게임의 목표 달성을 위해서만 움직이는 자동인형이 아니라 각자의 가치관과 신념에 따라 행위를 결정하는 주체이다. 한편으로 게임은 고정된 텍스트가 아니며 플레이‘하기’를 통해 능동적으로 수용되는 상호작용적 매체이다. 같은 게임이라도 사람마다 그것을 다르게 즐기고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아래에서 소개할 게임은 플레이어의 양심적 선택에 따라 게임에서 얼마나 다른 다양한 결과가 초래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영화 토이즈


‘페이퍼스 플리즈(Papers, Please)’는 루카스 포프(Lucas Pope)가 1인 개발한 인디게임이다. 도스 시절을 연상시키는 도트 그래픽과 간소한 인터페이스가 특징이다. 배경은 1980년대 초반 아스토츠카라는 동구권풍의 가상의 독재국가다. 플레이어는 국경 검문소의 입국심사원이 되어 입국자들의 서류를 검사하고 입국 허가 또는 거부 여부를 결정한다. “서류를 제출하십시오.”라는 뜻의 게임 제목은 새 입국자가 창구에 도착할 때마다 플레이어의 캐릭터가 형식적으로 내뱉는 말이다.


게임 플레이는 어떻게 보면 다소 따분하다. 책상 앞에 앉아 한 줄로 들어오는 사람들의 입국서류를 보고 허가/거부 둘 중의 한 도장을 찍으면 된다. 입국 승인 요건은 그때그때 상부에서 하달된다. 처음에는 여권과 입국 허가증, 노동 허가증 정도만 검사하면 되지만, 갈수록 망명 허가증이나 예방접종 인증서 등 서류가 많아진다. 그 밖에 기재된 국적, 성별, 나이, 입국사유, 만료일자 등을 대조하여 위조된 서류가 아닌지도 판정해야 하고, 수상한 사람은 따로 대질심문을 하고 무기나 밀수품은 없는지 엑스레이도 찍어봐야 한다.


페이퍼스 플리즈의 트레일러 - 그래픽과 사운드가 이 작은 게임에 담긴 묵직함을 잘 드러낸다.


매일 정해진 시간 동안 심사한 사람의 수에 따라 성과급제로 임금을 받는다. 그 돈으로 집의 임대료와 난방비를 내고 식구를 먹여 살릴 식료품도 사야 한다. 추위와 굶주림이 계속되면 가족이 병에 걸리고 죽기까지 한다. 문제는 먹고 살 돈을 버느라 쉴 새 없이 서류를 들여다보기도 바쁜데, 플레이어의 내적 갈등을 일으키는 사건들이 계속 일어난다는 것이다. 실수든 고의든 심사를 잘못하면 처음 몇 번은 경고장을 받지만 그 다음부터는 임금이 삭감되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서 플레이어는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다.


한 여성이 자신을 쫓는 포주의 입국을 막아달라고 애원하기도 하고, 이웃 국가에서 전염병이 창궐해 해당 국가 출신인 사람의 입국은 무조건 거부해야 하는 상황도 발생한다. 때로는 반정부 비밀결사 요원들이 찾아와 임무를 맡기기도 하는데, 이런 사건들에 어떻게 대응하는지에 따라 수십 가지 엔딩이 있다. 비밀결사에 협조했다가 불온단체와 내통한 죄로 사형을 당할 수도 있고, 반대로 협조하지 않았는데 반체제 세력이 집권하면 배신자로 낙인 찍혀 ‘행방불명’될 수도 있다. 엔딩 중 하나는 가족들과 함께 다른 나라로 탈출하는 것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입국자들의 미리 여권을 압수해두어야 한다.


국경에서는 극단주의자들의 테러도 종종 일어난다.


페이퍼스 플리즈는 다양한 방식으로 플레이할 수 있다. 플레이어는 상부의 지침만을 충실히 따르는 순응주의자가 될 수도, 반정부 결사에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혁명가가 될 수도, 대의보다는 가족의 안위를 최우선으로 걱정하는 소시민이 될 수도 있다. 이 가운데 정답은 없다. 선택에 따른 다양한 결말이 있을 뿐이다. 어떤 플레이어는 한 가지 선택에 만족하여 게임을 다시 플레이하지 않을지도 모르고, 또 다른 플레이어는 모든 엔딩을 다 볼 때까지 반복해서 플레이할 수도 있다.


이 게임은 수많은 멀티 엔딩 게임들 중에서도 플레이어의 양심에 따른 선택에 상당히 큰 비중을 두고 있다. 사실 그걸 빼면 이 게임은 시체다. 갈등을 일으키는 결정들이 없다면 단순히 글자 읽기와 마우스 클릭을 반복하는 ‘일’이 뭐가 재밌겠는가? 액션이나 퍼즐, 시뮬레이션 같은 장르를 택하지 않고 사회주의체제 하의 단순노동에 걸맞은 ‘지루한’ 플레이 방식을 채용함으로써 복잡함은 버리고 게임의 본질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디스토피아 서류 스릴러’라는 부제가 이 게임의 장르적 특이성을 보여준다.


얼마 전에는 ‘나쁜’ 비디오게임이 플레이어를 더 도덕적으로 만든다는 내용의 연구 결과가 발표됐다. 게임 안에서 저지르는 행위들에 대한 죄책감을 느낌으로써 도덕적 감수성이 향상될 수 있다는 것이다.[각주:1] 물론 이와 상반되는 연구도 많고 앞으로 더 세밀한 탐구가 필요하겠지만, 게임이 플레이어의 폭력성을 증가시킨다는 세간의 주장과는 사뭇 다른 흥미로운 결과다.


플레이어들은 때로는 게임의 목표를 추구하고, 때로는 <토이즈>의 릴랜드 장군처럼 목표와 정반대되는 행동을 한다. 페이퍼스 플리즈처럼 게임에 단일한 목표가 없고 다양한 가능성이 열려 있는 경우도 있다. 어느 쪽이든 플레이어들은 게임에서 자신의 선택에 따른 피드백을 받고, 그에 따라 가상 및 현실 세계에서의 행동을 수정하거나 강화한다. 이처럼 게임은 플레이어가 가능한 여러 가지 행동들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도록 함으로써, 현실의 비슷한 상황들에 대한 고민을 깊게 만들고 나아가 현실 세계에 영향을 줄 수 있다. 그것이 어떤 방향의 영향일지는 게임 개발자와 플레이어 둘 모두에게 달렸다.

  1. Grizzard Matthew, Tamborini Ron, Lewis Robert J., Wang Lu, and Prabhu Sujay. Cyberpsychology, Behavior, and Social Networking. August 2014, 17(8): 499-504. [본문으로]
Posted by 人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