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굴업자, 선장, 고위관리, 상인, 토지 개척자, 제조업자, 건축업자. 여러분은 신세계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할 것인가? 가장 풍요로운 농장을 소유할 것인가? 가장 위대한 건축물을 건설할 것인가? 여러분의 목표는 오직 하나이다. 그것은 바로 최대의 부와 최고의 명성을 성취하는 것!


여러분은 20세기 초의 일본인 지주이다. 여러분과 경쟁자들은 기회의 땅 조선으로 앞 다투어 건너가 불하받은 토지에 쌀과 대마, 면화, 인삼을 재배한다. 수확된 쌀과 가공된 삼베, 면직물, 한약은 다시 선적하여 내국으로 수출한다. 보다 원활한 생산과 유통을 위해 여러분은 조선에 시장과 창고, 관청, 학교, 항구, 수공업 공장을 건설한다. 총독과 다양한 역할들의 특권을 활용해 수탈과 개발로 가장 많은 부와 명성을 얻은 사람이 승리한다.


이런 게임이 나온다면 어떨까? 순수하게 즐거운 기분으로 게임에 몰입할 수 있을까? 왠지 출시 전부터 온갖 논란에 휩싸일 것만 같다. 그런데 이런 게임이 정말로 있다. 20세기 일본을 16세기 에스파냐로, 조선을 푸에르토리코로, 쌀·대마·면화·인삼을 옥수수·인디고·설탕·담배·커피로 바꾸면 그렇다.


푸에르토리코


안드레아스 사이파스(Andreas Seyfarth)가 2002년에 선보인 보드게임 ‘푸에르토리코(Puerto Rico)’는 출시 직후부터 평단과 게이머들의 호평을 받으며 큰 인기를 끌었다. 그 뒤 보드게임 커뮤니티 보드게임긱에서 수년 간 순위 1위를 독차지했고, 지금까지 5위권 밖으로 밀려난 적이 없다. 한편 이 게임의 주제에 대한 논란은 그동안 별로 없었다. 따지고 보면 그다지 폭력적이지도 선정적이지도 않은 게임이라 그런 게 당연한 듯도 하다.


하지만 비판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세바스찬 아타이는 어느 게임사(史) 웹진에 실린 글 ‘푸에르토리코의 수사학’에서 이 게임을 “철저하게 유럽 중심적인 문화의 산물”이라고 평했다. 그것이 “서구의 억압적 실천을 축소·은폐하고, 비유럽인의 성취를 부정하며, 서구인을 진보의 주된 촉매로 묘사하는 자유주의적 역사관을 재생산한다”는 것이다.[각주:1]


“1493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서인도제도 동쪽 끝의 섬을 발견했다. 50년 뒤, 푸에르토리코는 번성하기 시작한다. 당신의 손에 의해!” -‘푸에르토리코’ 영문 1판 상자 뒷면


이 말을 이해하려면 먼저 푸에르토리코의 역사를 조금 알아야 할 것 같다. 1493년 콜럼버스는 이 섬에 상륙해 에스파냐 국왕의 영토임을 선언했다. 뒤이어 정착한 이민자들은 금광을 개발하고 현재 수도인 산후안을 개척했다. 푸에르토리코라는 이름이 생긴 것도 이때다. 스페인어로 ‘puerto rico’는 영어로 ‘rich port’, 즉 ‘부유한 항구’를 뜻한다.


1530년대부터 금광이 고갈되자 사탕수수와 담배 등을 재배하기 위한 대규모 농장이 건설되었고, 여기서 일할 아프리카인 노예가 대량으로 실려 왔다. 이때 콜럼버스의 ‘발견’ 당시 3만 명이 넘었던 선주민 인구는 질병과 과로, 학살로 이미 2천 명 아래로 줄어 있었다. 이후 푸에르토리코는 400여 년 동안 에스파냐의 식민 지배를 받았다. 현재 푸에르토리코의 인종 구성은 백인이 75%, 흑인이 12%이고, 미원주민은 0.5%에 불과하다.


알고 보면 푸에르토리코는 조선과 많은 면에서 비슷하다. 둘 다 일본과 에스파냐의 통치에서 벗어난 뒤 곧바로 미군정이 시작되었고 이후에도 미국에 종속된 신식민지 체제를 겪었다. (푸에르토리코는 1952년부터 국방·외교·통화를 제외한 내정을 이양 받아 미국의 완전한 주는 아니지만 자치령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냉전 시대에는 각각 동아시아와 중앙아메리카에서 공산진영에 맞서 최전선의 교두보 역할을 했다. 양국 모두 아직까지 미군이 주둔해 있다는 점도 같다.


비에케스 미해군기지에 반대하는 직접행동. 푸에르토리코의 비에케스 섬은 2003년까지 미해군의 사격훈련장으로 쓰였다. 수도 산후안에는 아직도 포트 뷰캐넌 미육군기지가 남아 있다.


다시 게임으로 돌아가자. ‘푸에르토리코’에서 플레이어의 목표는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아니다. 게임에서 이기기 위한 승점을 얻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생산물을 본토로 실어 보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건물을 짓는 것이다. 이 점은 게임의 핵심을 잘 보여준다. 수탈과 개발은 식민 지배의 본질이 아닌가. 이제 그 과정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자.


플레이어는 자신이 경영하는 농장과 건물에 사람을 배치한다. 사람이 없는 농장과 건물에서는 생산을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이 과정은 게임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흑갈색’ 목재 토큰으로 표현되는 이 사람들은 규칙서에 따르면 식민지 ‘이민자’를 상징한다. 배에 실려 온 이민자를 사탕수수 농장에 보내 일을 시킨다고? 솔직해지자. 이건 이민자가 아니라 노예이다.


채석장과 옥수수밭, 사탕수수밭 등에 배치된 문제의 ‘이민자’ 토큰들


이 문제는 보드게임긱 커뮤니티에서도 논란이 되었다. 물론 개발자와 제작사가 일부러 게임에 그런 은유를 심어놓지는 않았을 수도 있다. 어쩌면 그들에게 이것은 “그저 게임일 뿐”일 것이다. “그저 흑갈색 토큰이지,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는 말이 옳을지도 모른다. (자연목의 색을 그대로 쓸 수도 있는데 왜 굳이 게임 중 커피를 나타내는 토큰과 헷갈릴 수 있는 색깔을 칠했는지는 잘 납득이 가지 않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런 해명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이 게임의 수사가 몰역사적이라는 지적은 여전히 유효하다. 게임의 수사적 기능을 부정하고 외면한다고 해서 그것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케이티 샐런과 에릭 짐머만에 따르면 “게임은 문화적 학습이 일어나는 사회적 맥락”이며 “사회의 가치가 착근되고 전달되는 장소”이다.[각주:2] 이안 보고스트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부연했다.


비디오게임과 같은 절차적 매체는 대상에 내재된 절차에 관한 의견을 세움으로써 그것의 핵심에 다가선다. 우리가 비디오게임을 만드는 것은 곧 우리가 찬양하고, 우리가 무시하며, 우리가 문제 삼는 이런 과정들에 관한 주장을 하는 것이다. 우리가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은 곧 이런 과정들을 우리의 삶에서 심문하고, 미래의 경험으로 이월하는 것이다.[각주:3]


식민지라는 심각한 주제를 게임의 소재로 써서는 안 된다고 말할 생각은 없다. 나는 전쟁게임이나 유혈이 낭자하는 좀비학살 게임도 즐겨 한다. 다만 ‘게임은 그저 게임일 뿐’이라는 생각만은 경계하고 싶다. 적어도 게임의 수사가 현실의 어떤 면은 은폐하고 또 다른 면은 미화하고 있지는 않은지, 그리고 이것이 게임을 즐기는 사람에게 어떻게 해석될지는 고민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전쟁게임을 만들어 놓고 이 게임에서는 말이 잡힐 때 병사가 죽는 게 아니라 포로로 잡히는 거라고 말한다고 해서 그것이 더 평화적인 게임이 되지는 않는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민감한 소재를 애써 회피하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게임’보다는 현실을 불편함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게 해주는 게임일 것이다. 물론 그것이 일단 재미있다는 가정 하에 말이다.


  1. Sebastian Atay, The Rhetoric of Puerto Rico, Memory Insufficient, July 2013. [본문으로]
  2. Katie Salen & Eric Zimmerman, Rules of Play: Game Design Fundamentals, 2003. [본문으로]
  3. Ian Bogost, Persuasive Games, 2010. [본문으로]
Posted by 人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