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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01.29 연기처럼 흩어지는 삶이라 해도. 영화 <스모크>와 <21그램> 1

객관보다 먼저 존재하는 의지

 

<매드 사이언스 북>은 실험이 과학적 방법론으로서 확고한 지위를 획득한 이후에 벌어진 온갖 실험에 대한 이야기다. 과학지식이란 방대한 지도에서 미지의 영역을 몰아내겠다는 집념과 열정이 가득한 책이다. 동시에 그에 뒤지지 않는 광기도 살벌하다. mad(미친)와 science(과학)이란 조합은 열정과 광기 사이 간극을 효과적으로 표현한다. 소재 자체도 흥미롭지만 살짝 살짝 곁들이는 과학전문기자의 농담도 유쾌하다. 물론 어떤 농담은 여전히 낯설지만. 과학전문기자가 진득하게 한 분야에 전념할 수 있는 현실은 부럽기만 하다.

<매드 사이언스 북>에는 오늘날 기준으로는 용납하기 힘든 실험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 병원균의 실체를 확인하게 위해 자신을 대상으로 임상실험을 하는가 하면, 단두대에서 잘린 사람 머리를 몰래 훔쳐와 전기를 흘려보내기도 한다. 그 중에 영혼의 무게를 재려한 사람도 등장한다.

던컨 맥두걸은 실험을 통해 영혼의 무게가 21그램이라고 결론 내렸다. 뉴스 타임즈 1907년 3월 11일자 신문에는 “의사는 영혼에 무게가 있다고 믿는다.”는 기사가 실렸다. 물론 실험은 조잡하고 신빙성이 없었다. 고작 6명을 대상으로 사망 전후 무게를 측정해 낸 결론이었다. 표본 자체가 너무 작은데다 그 6명마저 결과는 제각각이었다. 오히려 관전 포인트는 실험의 결과라기보다는 동기에 있다. 그는 영혼에도 무게가 있다고 믿었다. 모든 실천 앞에는 의지가 먼저 존재한다. 객관은 가장 극단적인 주관 속에서 태어난다.

 

영혼의 무게는 21그램

 

서양철학에서 영혼이란 개념은 꽤나 오랜 전통을 갖고 있다. 피타고라스는 윤회설을 믿었다. 플라톤에게 영혼은 보편적 진리를 인식할 수 있는 능력과도 같다. 따라서 육체보다 우월한 영혼은 불멸의 존재다. 이런 사고방식은 자연스럽게 종교에 흡수되어 내세라는 개념으로 이어진다. 영혼은 죽은 후에도 살아 남는다. 영혼을 실체(무게)가 있는 무엇으로 이해하다보니 데카르트는 육체와 영혼을 연결시켜주는 송과선이란 기관이 있다는 주장으로까지 이어진다. 능력자들이 내지른 헛발질은 믿음의 산물이다.

영혼의 무게를 재는 실험은 별 다른 신뢰를 얻지 못했지만 동기만큼은 강렬한 인상을 남긴 것이 분명하다. 21그램이란 기업이 있는가 하면 <21그램>란 제목의 영화도 있다. 이 영화에 실험과 연관된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단지 모티브로 따 왔을 뿐이다. 복잡한 심경 속에 죽음을 앞 둔 한 사람의 독백 속에 21그램이 등장한다.

 

사람이 죽는 순간에 21그램이 줄어든다고 한다. 누구나 다...

21그램은 얼마 만큼일까? 얼마나 잃는 걸까? 언제 잃을 것일까?

21그램. 5센트 5개의 무게. 벌새 한 마리 무게. 초콜릿 하나.

21그램은 얼마나 나갈까?

 

어떤 사람을 분석한다고 치자. 수다스럽다, 다정하다, 관능적이다 등등. 정성적 분석이다. 이 분석을 이렇게 대체해보자. 하루 평균 2시간 동안 수다를 떨고 15명에게 카톡을 보내며 3명에게 페로몬을 뿌려댄다. 정량적 분석이다. 수학과 과학은 대체로 어떤 성질을 정량화시키는 과정에서 발전한다. 온도만 해도 그렇다. 따뜻하다, 미지근하다, 차갑다는 등의 표현은 주관적이다. 여기에 숫자를 부여하면 객관성이 확보된다. “너 나 얼마만큼 사랑해. 1부터 100까지 숫자로 말해봐.” 이것이 수학의 마인드다. 이미 실패가 예정되어 있더라도 어떻게든 삶을 객관화시키고 싶은 인간의 욕망. 21그램은 불가사의한 삶을 계량화하고 싶어 하는 인간의 덧없는 욕망을 상징한다.

 

담배연기 무게는 몇 그램?

 

나는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한 번도 피워본 적이 없다. 담배냄새를 미친 듯이 싫어한다. 어릴 적에는 담배를 피우는 아빠를 집 밖으로 쫓아내기 일쑤였고, 대학생 때는 학생회실에서 담배 피우는 회의를 처음으로 금지시킨 장본인이다. 그런가하면 베란다를 타고 올라오는 담배연기를 참지 못해 아래층 집집마다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우지 말아 달라.”는 쪽지를 붙여두기도 했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담배 피는 모습이 너무 멋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사람이 있었다. 그 모습은 아무 설명 없이도, 충분히 매력적이어서 삶이란 담배피우는 모습으로 형상화되는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게 했다.

<스모크>는 소설가 폴 오스터가 공동으로 대본을 써서 주목받았던 영화로 그의 소설 [오기 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모티브로 한 영화다. 제목처럼 담배 피는 장면, 특히 담배연기가 날아가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오기의 담배 가게는 사람들이 만나고 헤어지는 상징적인 장소다. 담배연기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 영화는 어쩐지 멋있게 담배 피는 사람을 연상시킨다.

영화 배경은 뉴욕 브룩클린이다. 여기에 주인공이 여럿 등장한다. 먼저 부인을 잃고 혼자 사는 소설가 폴. 한때는 잘 나갔지만 부인이 죽은 뒤로는 폐인 모드다. 줄담배만 펴댄다. 교통사고 직전 우연히 폴을 구해준 청년 라시드는 묘하게 폴 옆을 맴돌며 접근한다. 그런데 폴은 이 청년 덕에 조금씩 기운을 되찾고 다시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그리고 의문투성이 라시드는 어릴 적 생이별을 했던 아버지를 찾아가 결국 다시 가족을 이루게 된다.

한 편 담배 가게 주인 오기는 매일같이 같은 시각에 자기 가게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다. 그 사진을 인화해 사진첩에 모아 둔다. 이 담배 가게에 폴이 소개한 라시드가 점원으로 근무하면서 관계는 얽히고 설킨다. 오기는 쿠바산 시가담배를 밀수하려다 낭패를 보지만 이렇게 저렇게 만회해서 목돈을 만드는데 성공한다. 그런데 집나갔던 옛 애인 루비가 찾아온다. 루비는 둘 사이 딸이 있다며 마약에 찌든 딸을 보러 가야 한다고 하지만 오기는 돈 때문에 루비가 돌아왔다고 생각한다. 딸은 오기를 받아들이지 않지만 오기는 루비에게 어렵게 구한 목돈을 건네준다.

 

이 영화에 인상적인 장면이 두 군데 있다. 하나, 폴이 담배연기 무게를 어떻게 재는지 설명하는 장면. 영국에 담배를 들여 온 월터 롤리 경은 담배연기 무게를 잴 수 있는지 엘리자베스 여왕과 내기를 해서 이긴다. 흡연 전후에 담배 무게(재와 꽁초)를 측정해서 그 차이를 계산했다. 이 방법은 아주 간단하지만 실험이 가진 강력한 힘을 보여준다. 삶과 죽음 사이에 발생한 차이 21그램처럼. 삶 역시 이렇게라도 측정 가능한 것이라면 얼마나 간명하겠는가.

둘, 아내를 잃은 후 폐인처럼 지내던 폴은 담배 가게 오기랑 친해진다. 어느 날 폴은 오기의 희한한 사진집을 구경하게 된다. 매일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찍은 사진뿐인 사진집. 오기는 매일 자신의 담배 가게 건너편에서 가게 쪽을 바라보며 사진을 찍는다. 사진 중앙에는 담배 가게가 자리 잡고 있으며 길거리 풍경은 늘 비슷비슷하다. 폴은 왜 이런 걸 찍느냐며 이해 못할 표정을 짓다가 우연히 사진에 찍힌(지금은 죽고 없는) 자기 부인을 발견하고 오열한다. 오기의 쓸데없던 취미는 잠들어 있던 폴의 기억을 끄집어낸다. 무색무취했던 거리 풍경은 구체적인 시공간과 함께 되살아난다.

 

<스모크>처럼 흩어지는 삶이라 해도

 

<스모크>에는 삶과 죽음, 만남과 이별이 복잡하게 교차한다. 인생은 어디로 흩어질지 모르는 담배연기처럼 예측하기 어렵다. 한 사람의 우연한 행동이 또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고, 무겁게 가라앉은 것 같던 담배연기가 순식간에 흩어지듯 사람사이 만남도 그 의미를 헤아릴 길이 없다.

공리주의로 유명한 벤담은 쾌락계산법(Felicific calculus)으로 괘락의 총량을 계산할 수 있다고 했다. 검색창에 행복지수란 단어를 집어넣으면 삶을 계량화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를 접할 수 있다. 삶이 목적의식적으로 배치된 노력의 총합이라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리고 그런 이들에게 수학이란 도구는 얼마나 고마운 것이겠는가!

영혼의 무게를 재고, 담배연기의 무게를 측정하고,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사진을 찍는 행위는 무정형의 실체를 포착하고자 하는 노력이다. 더러는 성공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실패할 것이 분명한. 삶은 대체로 정량화되지 않는다. 영화에 유난히 담배 연기가 많이 나오는 이유가 있다. 그렇다면 이런 노력들은 언제나 무의미한가? 아니 그렇지 않다. 오기의 사진 속에서 사랑하는 이의 흔적을 발견해낸 폴처럼. 삶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가끔 의도치 않게 소소한 선물을 선사한다. 그러니 열심히 시도할 일이다. 다만 거기에 정답이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그 노력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면 된다. 우리가 수학에서 얻을 게 있다면 그것은 삶에 대한 답이 아니다. 답을 찾고자 하는 노력 자체가 삶을 아름답게 한다.

마지막에 나오는 영화 속 영화 [오기 렌의 크리스마스]를 해마다 한 번쯤 다시 보기로 한다. 꼭 직접 보라고 줄거리는 이야기 하지 않는다. 마음까지 추워지는 추운 겨울, 마침 연말연시나 삶과 사람에 대해 확신이 서지 않는 그런 때에. 당신도 누군가에게 좋은 선물 같은 존재였으리라. 그러니 모든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그래도 인생이다.

Posted by 칸나일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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