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시엄!


 개인적으로 픽사 애니메이션 시리즈 중에 이 작품이 최고라고 생각하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깨알 같은 지적 유희 때문이다. 3D 영화의 기술력이 업데이트 될 때마다 반응은 대체로 둘로 나뉜다.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표현력에 놀라는 사람이 있는 반면,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드는 이 기술적 진보 앞에 불편함을 표현하는 사람이 있다. 어느 쪽이든 대다수는 3D 영화 종사자들을 영화인 이라기보다는 최상급 엔지니어로 보는 거 같다. 그런데 픽사의 이 유쾌한 천재들은 단지 엔지니어가 아니다. 심지어 이 영화에 수학적 은유까지 들어 있다는 걸 알아차린 사람은 얼마나 될까?

-E가 거대 우주선 엑시엄을 처음 만나는 순간. 클로즈업되면서 드러나는 우주선의 위용이 스크린을 압도하는 순간 나는 ~”하고 가볍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리고 순간 극장이라는 사실을 잊고 우주선의 이름을 작게 소리 내 불렀다. Axiom(엑시엄)!

  

가슴 뜨거운 로봇 <-E>

 

<-E>는 믿고 보는 픽사가 제작한 3D 애니메이션이다. -E의 영어명은 WALL-EWaste Allocation Load Lifter Earth의 약자다. 간단히 말하면 지구 쓰레기 처리 로봇으로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인류는 넘쳐나는 쓰레기를 감당하지 못하고 거대한 우주선 엑시엄호를 타고 지구를 떠난다. 버린다는 말이 더 적절한 상황이다. -E는 정해진 순서에 따라 쓰레기 처리를 반복하도록 프로그래밍 되어 있던 양산형 로봇이다. 인간이 지구를 떠난 뒤, 700년이 흘러도 사방엔 쓰레기 뿐 생명체(유기체)는 보이지 않고 정비를 받지 못한 월-E들은 시나브로 기능 정지 및 파손으로 그 자신이 쓰레기 더미의 일부가 된다. 영화는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시작한다.

지구상에는 생명체 아닌 유일한 생명체 오직 한 대 남은 월-E만이 살아가고 있다. 이제 보통명사에서 고유명사가 된 월-E는 이미 죽어버린, 아니 고철이 되어버린 다른 보통명사 월-E들로부터 부품을 얻고 태양열 발전으로 에너지를 얻으면서 지속적으로 작동(work)한다. 심지어 음악을 듣고, 영화를 보고, 바퀴벌레를 키운다. 쓰레기를 치우다 맘에 드는 물건이 있으면 수집한다. 뇌가 없으나 두뇌활동을 하고, 심장이 없으나 감정을 느낀다. 요컨대 월-E는 작동하는 기계가 아니라 생명(life)체로 살(live)게 되었다. 가장 인간다운 모습으로.

그러던 어느 날 월-E는 쓰레기 더미 가운데서 자라난 새싹을 발견하게 되고 거의 동시에 어디선가 EVE(이브)라는 로봇이 날아온다. -E는 이브를 사랑하게 되지만 이브는 월-E의 존재에는 관심이 없다. 이브는 엑시엄이 보낸 외계식물 탐사로봇으로 지구에서 발견된 식물을 엑시엄호로 가져가야 할 임무를 수행하도록 프로그래밍 되어 있다. 이 식물을 우주선의 할로디텍터에 넣기만 하면 엑시엄호는 즉시 지구로 돌아가도록 설정되어 있다. 이어서 영화 후반부에는 상당한 우여 곡절을 거치지만 결국 인류는 지구로 돌아온다.

 

과학기술로 인한 환경파괴와 인간성의 괴멸이라는 월-E의 메시지는 해석할 필요가 없을 만큼 선명하다. 로봇이 휴머니즘을 가장 진득하게 체화하고 있다는 역설적인 설정도 자연스럽다. 끝내 재앙을 극복해내는 헐리웃의 긍정은 여전하다. 가족 영화로 분류해도 손색없을 정도로 애들도 좋아할 거 같은데 평론가와 관객 모두에게 높은 점수를 받은 건 픽사 애니메이션 특유의 창의력과 유머, 그리고 캐릭터가 지닌 생명력 때문일 것이다.

  

시작 없이는 무엇도 존재할 수 없다.

 


Axiom은 수학 용어로 공리를 뜻한다. axiom의 어원은 그리스어 단어인 axioma에서 왔으며 '그 자체로 명백한 진리'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수학에서 공리는 증명하지 않고 참으로 받아들이는 명제를 의미한다. 이것은 종의 기원이 아니라 수학의 기원에 관한 이야기다.

인간의 조상이 원숭이인가 아닌가를 놓고 저명한 사회 인사들이 논쟁을 한다. 토론 막바지에 진화론 반대측 토론자는 당신 할아버지 쪽 선조가 원숭이냐, 할머니 쪽 선조가 원숭이냐?”고 묻는다. 영국 성공회 주교였던 윌버포스가 던진 질문이다. 진화론에 비판적인 신문은 다윈을 원숭이에 빗댔다. 어릴 적 백과사전에서 저 그림을 처음 봤을 때 나는 편집자가 진화론을 지지하는 줄 알았다. 빈정거림을 곁들인 풍자를 이해하기엔 아직 세상을 너무 모를 때였다. 다윈의 얼굴은 진화론에 잘 어울리는 상이다. 특히 풍성한 수염이. 지금으로부터 150년 전이다.

생물학에 있어 진화론은 완전한 패러다임의 변화를 의미했다. 지동설에 버금가는 발상의 전환이었다. 다윈이 <종의 기원>에서 진화론을 처음 발표했을 당시에는 다수가 그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다. 기독교 중심의 세계에서 창조론에 대한 부정이 가져올 파장은 충분히 예측가능하다. 하나의 세계가 끝장날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을 느끼기 충분했을 것이다. 진화론만 그런 게 아니다. 고정관념을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수학, 과학 이론이 나올 때마다 사람들은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수학 이론도 시대정신의 산물인 이상 그 기본을 흔드는 것은 시대정신의 생사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돌연변이와 자연선택에 의해 종이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생각은 상식이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최초 생명체는 어디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이 질문을 수학 버전으로 바꿔보면 다음과 같다. 사람들이 알고 있는 수학지식은 어디서 비롯하는가? 수학적으로 참이라고 증명된 문장을 정리라고 한다. 하나의 정리는 또 다른 정리를 사용해서 증명한다. A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B가 필요하다. B가 참이라는 것을 설명하려면 C가 필요하다. C를 위해서는 D...이렇게 거슬러 올라가면 논리의 끝엔 무엇이 있을까?

  

유클리드가 정립한 공리 체계

 

수학은 사람이 만든 인위적인 논리체계이기 때문에 명확하게 논리의 출발점이 존재한다. 그게 공리다. 논리의 피라미드 제일 꼭대기에 있는 문장. 어디서부턴가 시작점을 설정하기 위해 증명 없이 참으로 받아들여야만 했던 명제. 보통 공리에는 자명(自明)하다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고대 그리스 수학을 집대성한 유클리드[각주:1]는 그의 저서 <원론(elements)>에서 처음으로 5개의 공리와 5개의 공준을 설정하고 이로부터 당시까지 알려진 모든 수학적 사실을 일목요연하게 재배치하였다. 공리는 수학 일반에 있어 대전제를 의미하며, 공준은 기하학에 있어 대전제를 의미한다. 당시에는 이를 구분하기 위해 다른 단어를 선택했으나 훗날 모두 공리라는 용어로 불리게 된다.

유클리드는 우선 기본적인 용어를 정의하면서 서술을 시작한다. 원론의 첫 문장은 점은 쪼갤 수 없는 것이다.”이다. 이어서 선, 면을 비롯한 기본 용어 23가지에 대한 정의가 이어진다. 그 다음으로 5개의 공리와 5개의 공준이 등장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공리

1) 같은 것과 같은 것들은 서로 같다.

2) 같은 것들에 같은 것을 더하면 그 합은 서로 같다.

3) 같은 것들에서 같은 것을 빼면 그 차는 서로 같다.

4) 서로 포개어지는 것들은 서로 같다.

5) 전체는 부분보다 크다.

 

공준

1) 임의의 서로 다른 두 점은 직선으로 연결할 수 있다.

2) 직선은 무한히 연장할 수 있다.

3) 임의의 점을 중심으로 하고 임의의 길이를 반지름으로 하는 원을 그릴 수 있다.

4) 모든 직각은 서로 같다.

5) 한 평면 위의 한 직선이 그 평면 위의 두 직선과 만날 때 동측내각의 합이 2직각보다 작으면 이 두 직선은 그쪽에서 만난다. (머리 아프니까 쉽게 설명하면, 평행선은 영원히 만나지 않는다.)

 

 

읽으면서 어떤 느낌이 드는가? 일단은 이런 것까지 다 규정해야 하나?”내지는 시시하네. 그래서 이게 뭐?”와 같은 생각이 들 것이다. 같은 것끼리 같다는 게 무슨 말장난인가. 공준으로 넘어와도 여전히 비슷한 느낌이다. 임의의 서로 다른 두 점은 직선으로 연결할 수 있다는 건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직관적으로 누구나 알 수 있다. 5)번 공준 정도 와야 이제 본격적인 수학이 시작되는가 보네. 슬슬 외계어처럼 들리는데.”하는 느낌이 들 것이다. 감을 잡기 위해 문제를 하나 풀어보자.

 

어떤 길이의 선분으로 정삼각형을 만들어라.

  

원론의 첫 번째 문제다. 단 눈금 없는 자와 컴퍼스만을 이용해야 한다. 왜 그런지는 나중에 설명할 테니 일단 한 번 시도해보자. 물론 시도하지 않아도 좋다. 예상했겠지만 바로 설명 들어간다. 어차피 수학 문제 잘 풀라고 이 글 쓰는 게 아니다. 해결과정을 그림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먼저 아무 곳에나 두 점 A, B 를 찍고 연결해서 선분을 그린다.

 

 

2. A 를 중심으로 하고 선분 AB 의 길이를 반지름으로 하는 원을 그린다.

 

 


 

3. 이번에는 B 를 중심으로 하고 선분 AB 의 길이를 반지름으로 하는 원을 그린다.

 

 

4. 두 원의 교점을 C 라 하고 A 와 C 를 잇고, B 와 C 를 이어 삼각형을 만든다.





 

각 단계를 원론의 구성에 맞춰 분석해보자.

1단계에서는 두 점을 지나는 선분을 그렸다. 1)번 공준을 사용했다.

2단계에서는 원을 그렸다. 3)번 공준을 사용했다.

3단계도 마찬가지.

4단계에서 원의 정의는 23가지 정의 중 15번째에 나온다. “원이란 그 도형의 내부에 있는 한 정점으로부터 곡선에 이르는 거리가 똑같은 하나의 곡선에 의해 둘러싸인 평면도형이다.”따라서 선분 AB 와 AC는 길이가 같다. 마찬가지 이유로 선분 AB 와 선분 BC 의 길이가 같다. 이제 공리 1)번에 의해 같은 것끼리는 같으니까 선분 AC 와 선분 BC 도 같다. 따라서 삼각형 ABC 는 정삼각형이다.

아 깜빡! 삼각형의 정의는 19번째, 정삼각형의 정의는 20번째 나온다. 이 정의에 따르면 세 개의 직선으로 둘러싸인 도형이 삼각형이고 그 중 세 변의 길이가 같은 도형이 정삼각형이다. 아차차차. 직선의 정의는 4번에, 도형의 정의는 14번에, 원의 중심의 정의는 16번에...짜증나지 그만할까?

 

보편적 언어로 정립된 공리 체계

 

위 내용을 수학에서 흔히 사용하는 문장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임의의 길이를 선분으로 하는 정삼각형을 그릴 수 있다.”

 

공리, 공준, 정의를 사용해 새롭게 알아낸 사실을 정리(theorem)라고 한다. 정리를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과정을 증명(proof)이라고 한다. 수학의 지식 체계는 피라미드식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새로운 정리를 증명할 때는 공리, 공준, 정의와 이미 알아낸 정리만을 사용해야 한다.

유클리드는 이런 식으로 그 때까지 알려진 거의 모든 수학 지식을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기념비적인 성실함이다. 책 내용 중 유클리드 자신의 이름으로 된 정리는 없다. 언제나 한 시대를 풍미하는 백과사전적 지식인이 있기 마련이다. 그리스 시대 최고의 수학자는 아르키메데스이지만 언어 체계를 세운 건 유클리드다. 근대 이전의 모든 기하학을 통틀어 흔히 유클리드 기하학이라고 부른다. 사람은 머리가 좋지 않으면 손발이라도 부지런해야 한다. 그러면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수도 있다.

공리와 공준은 사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수학 지식의 체계를 세우기 위해 근본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다가 더 이상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단계까지 이르렀을 때 공리가 등장한다. 그러니까 공리나 공준은 너무 뻔한 말처럼 들리는 게 당연하다. 수많은 정리들이 아주 간단한 원리 몇 개로 모두 설명이 된다는데 공리 체계의 매력이 있으니까. 그런데 수학에서는 뻔할수록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유클리드도 5번째 공준에 대해서는 증명을 시도했다고 한다. 다른 공리나 공준에 비해 딱 봐도 문장이 복잡하니 맘에 안 들었을 것이다. 공리나 공준은 간명해야 한다. 하지만 끝내 증명이 되지 않아 공준으로 설정해야만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에서도 수학은 부분적으로 발전했다. 어떤 내용들은 그리스보다 앞선 것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지식은 결코 학문으로 정립되지 못했다. 차라리 측량에 가까웠다. 수학은 측량을 위한 보조도구에 불과했다. 높이가 같은 원뿔과 원기둥의 부피비가 왜 1:3이냐고 물으면 이집트인이나 메소포타미아인은 실제로 원뿔과 원기둥 모양의 그릇을 만들어 부피를 측정했을 것이다. 원뿔에 물을 가득 담아 원기둥에 부었더니 3번 만에 꽉 차더라 하는 식으로. 이집트라면 모래를 채웠을 가능성이 높겠지만. 그들은 원주율 3.1이라고 쓰기도 했고 3.2라고 쓰기도 했다. 측량 결과에 따라 적당한 근삿값을 사용했다.

그러나 그리스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들은 논리를 사용했다. 개념을 설정하고 논리적 인과관계로 모든 명제를 이끌어냈다. 민주주의가 논리로 상대를 설득하는 것처럼 그들은 수학적 사실을 논리로 증명했고, 수학을 학문으로 발전시켰다. 그들에게 측량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부피비가 정확히 2.999배인지 혹은 3.001배인지 심지어 3.0000000000001배인지는 측량으로 알아낼 수 없다. 오직 수학적 방식의 증명만이 필요할 뿐이다.

따라서 그리스의 수학은 고도의 논리학이었다. 또한 이성 중심의 사고를 끝까지 밀어부친 철학체계였다. 점의 정의가 정립되기까지 데모크리토스의 원자(아토모스)론부터 피타고라스, 제논, 플라톤, 아르키메데스에 이르는 엄청난 철학적 논쟁이 계속되었다. 현실에서는 어떠한 점을 그려도 면적이 있다.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즉 길이도 면적도 없는 존재로서 점의 정의는 오직 개념 속에만 존재한다. 당연히 그리스의 수학은 고도의 형이상학이었다.

원론은 단순히 수학적 논리체계의 완성을 넘어 그리스 시대의 정신이 어떻게 종합되었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본보기다. 그리스 시대정신이 르네상스에서 부활해 근대에까지 영향을 미쳤듯이 그리스 수학은 2000년간 서양세계를 지배했다. 2000년간 유럽에서 수학교과서로 쓰였으며(물론 중세 시대 단절이 있긴 했지만) 성경 다음으로 두 번째로 많이 읽힌 책이 되었다. 알렉산더 대왕의 후계자 프톨레마이오스 1세부터 중세 후반의 스콜라학파를 거쳐 뉴턴, 데카르트, 칸트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거인들에게 끊임없는 영감을 불러 일으켰다.

  

원론과 같은 형식으로 쓰인 미국의 독립선언문

 

적어도 19세기 전까지 공리 체계는 매우 공고하게 유지되었다. 그 때까지 서양 세계 자체가 공리와 유사한 구조로 구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종교()가 가장 오래 공리 역할을 했다가 왕이 그 자리를 잠깐 차지했고 뒤이어 이성과 법률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선험적 진리(공리)를 전제로 모든 사회구조와 체계를 배치했다는 점에서 인류의 역사는 공리 체계를 정교하게 다듬어 온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나폴레옹 법전에 기초한 현대적 법체계가 공리 체계와 유사한 구조를 갖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뉴턴의 <프린키피아-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와 스피노자의 <에티카>는 물론 미국의 독립선언문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책과 문서들이 원론의 형식을 따라한 것은 자신의 말이 세계를 구성하는 기본원리라는 자부심 혹은 권력의지에서 비롯된 자연스런 귀결이다. (그러고 보면 수학 문제집에 정석이나 바이블 같은 말이 등장하는 것도 우연은 아니다.) 한 예로 미국의 독립선언문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한다.

 

다음과 같은 사실을 자명한 진리로 받아들인다. 즉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고, 창조주는 몇 개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했으며, 그 권리 중에는 생명과 자유와 행복의 추구가 있다. 이 권리를 확보하기 위하여 인류는 정부를 조직했으며, 이 정부의 정당한 권력은 인민의 동의로부터 유래하고 있는 것이다. 또 어떤 형태의 정부이든 이러한 목적을 파괴할 때에는 언제든지 정부를 개혁하거나 폐지하여 인민의 안전과 행복을 가장 효과적으로 가져올 수 있는, 그러한 원칙에 기초를 두고 그러한 형태로 기구를 갖춘 새로운 정부를 조직하는 것은 인민의 권리인 것이다.”

 

독립선언문은 이 공리(자명한 진리)에 기초하여 영국정부의 행동이 왜 잘못된 것인지 마치 수학문제 증명하듯 설명하다가 미국의 독립은 정당하다는 결론으로 마무리된다.

이성의 궁극적 승리는 근대국민국가로 완성되는 듯했다.

  

하나의 세계가 종말을 고한 곳에서 새로운 세계가 시작된다

  

지구를 생명체가 살 수 없는 쓰레기더미로 만들고 우주선에 스스로를 가두어버린 이 어리석은 인간들이 스스로 엑시엄이란 이름을 붙인 것은 아주 훌륭한 수학적 은유다. 인간들은 이성의 힘으로 과학기술을 발달시켰고, 지구를 파괴했으며, 기계와 다를 바 없는 시스템 속에서 살아간다. 그 모든 과정을 스스로 선택했으며 그 파괴의 종착점인 우주선에 진리의 출발점, 의심할 바 없는 진리라는 의미로 엑시엄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인간의 어리석음. 인간의 기계적 합리성이 빚어낸 이 어처구니없는 황폐함에 보내는 야유에 이 만큼 적당한 이름이 어디 있을까? 이 정도 작명센스라면 작은 신음소리 정도는 보내줘도 된다. 저 우주선에 엑시엄이라는 이름을 붙일 줄 아는, 그런 유머감각과 상상력이 참 좋다. 수학을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에 대한 애정과 고민을 놓지 않았을 때 만날 수 있는 뼈 있는 언어유희다.

수학의 각 영역은 원론을 모델로 자기만의 공리체계를 갖추어 내적으로 논리의 완결성을 갖추었다. 논리의 시작점을 의미하는 공리는 역설적으로 체계가 가장 완결적인 형태를 갖추었을 때 안정적인 지위를 획득한다. 이천년 동안 쌓아온 수학 지식 체계는 매우 촘촘하고 강력했다. 하지만 공리도 사람이 만든 것이라 불완전하다. 19세기 들어 공리 체계 자체가 가진 모순들이 드러났고 공리 체계에 대한 회의, 보완, 재정의 등이 잇따랐다. 공리라는 것은 허구가 아닌가 의심하는 사람도 나타났다. 공리도 인간이 만들어낸 것인 만큼 완벽할 수 없고 논리적인 모순까지 드러난 만큼 그 공리에 기초한 체계를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적당히 리모델링해서 고쳐 쓰자는 사람이 있었는가 하면 전면적으로 집을 허물고 다시 짓자는 사람이 있었다.

공리 체계가 흔들리는 과정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다룰 생각이다. 다만 여기서는 다음과 같은 정도로만 정리하고 넘어가자. 이전 공리 체계가 또 다른 공리 체계로 대체되거나 혹은 지속적인 혼란 상태에 놓일 수도 있다. 그 혼란은 아주 빨리 끝날 수도 있고 좀 더 오래갈 수도 있다. 여러 가지 상황이 가능한데 여기서 중요한 건 이 과정이 거짓을 몰아내고 진리를 획득하는 과정이라기보다는 인식의 지평을 넓혀가는 과정에 가깝다는 점이다. 새로운 이론은 이전의 성과와 한계를 함께 안고 다음 단계로 도약한다. 그렇게 무너진 곳이 또 다른 출발점이 된다.

같은 맥락에서 우주선 엑시엄호는 한 세계의 종착점인 동시에 또 다른 세계의 출발점이다. 700년 넘게 목적지를 찾지 못하고 우주를 떠돌던 엑시엄호는 지구에 착륙하며 여행을 끝마쳤고 거기서 다시 역사는 시작되어야 한다. 인간들이 공리로 믿고 있던 경제발전, 합리성, 효율성, 과학기술, 물신숭배와 같은 가치를 환경, 평화, 공존, 재생, 지속가능성과 같은 가치로 대체할 수 있을까? 이제 막 싹을 심으며 영화는 끝난다. <-E>가 미국 보수주의자들의 공격을 받은 건 당연한 일이다.

 

잘 돌이켜보면 당신의 삶 자체도 대부분은 몇 개의 공리로 구성되어 있다. 건강이 최고다. 가족이 제일 소중하다. 사랑을 위해 산다. 신앙 없는 삶은 무의미하다. 이런 것들은 모두 자신이 만들어낸 공리다. 의심 없이 참으로 받아들이는 명제. 사랑을 예로 들어보자. 60억 인류에게는 60억 개의 사랑이 있다. 사랑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답을 할 것이다. 물론 예측 가능한 몇몇 유형의 대답이 있다. 그러나 거기에 정답이 있는가? 확실할 수 없음에도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답을 가지고 산다. 모든 추상명사는 답이 없다. 자신만의 개념어 사전 속에는 무수한 추상명사의 리스트가 있다. 공리는 그런 것이다. 사람을 생각하게 하고 판단하게 하고 그럼으로써 살게 한다. 때로는 그것이 완벽하지 않다는 사실이 드러나 하자보수하며 고쳐 쓰기도 하고 때로는 혁명적으로 파괴하고 완전히 새로 만들어내기도 하며 때로는 미로 같은 암흑 속을 헤매더라도 말이다.

지구행을 결심하는 선장이 고장 난 시스템에 반기를 들기로 결심하면서 난 생존이 아니라 살고 싶어. (I don't want to survive. I want to live)”라고 말하는 건 지금, 여기에 사는 우리에게도 어떤 울림을 준다.

  

마지막으로

 

이 외에도 깨알 같이 재미를 주는 장면이 몇 개 더 있다. 글을 쓰려고 작정하면서 별 것도 아닌 것에 의미를 부여하려고 눈 부릅뜨고 보니 이것저것 보이는 게 신기도 하다. 이브의 손에서 손가락이 생겨나는 장면이나 지구에 도착한 선장이 제일 처음 농사를 언급하는 장면 등 영화 전반이 생명의 진화와 인류의 역사를 재서술하는 느낌이 든다. 그 중에서 특히 선장이 처음으로 기계식 의자에서 내려와 스스로 걷는 장면에서 교향시 “Also Sprach Zarathustra(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깔리는 건, 당연히 내가 알았겠나. 열심히 정보를 뒤져보니 나오더라. 자라투스트라는 조로아스터교의 창시자 조로아스터(그리스 발음)의 독일식 발음이다. 이 음악을 만든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니체의 저작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영감을 얻어 음악을 만들었다. 니체는 신, 이성, 시장, 국가 등 일체의 권위를 의심하고 오직 자신의 자유의지(생의 권력의지)로 진리를 찾으려는 생각을 자라투스트라에 빗대어 설명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역시 시기적으로 19세기 후반에 등장한 낭만주의 시대 대표적인 작곡가로 파국으로 치닫는 이성 중심의 유럽 사회에 반감을 갖던 터에 니체에게 많은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에 쓰인 것으로도 유명하다던데. 이 영화를 내처 볼까 검색하다가 제목만 2001이 들어가고 실제로는 1968년에 만들어진 영화라는 사실을 알고는 일단 한 발 물러섰다. 흑백영화나 예술영화를 보면 빠르게 잠드는 관계로 강력한 동기부여가 되지 않고서는 아마 쉽게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마지막으로 엔딩 크레딧에 미술사에 등장했던 다양한 기법을 시간 순으로 적용했던 것도 이전에는 몰랐다. 엔딩 크레딧을 안 봤으니 당연하다. 꼭 챙겨보시도록.

  1. 그리스식 이름은 에우클레이데스. 원론 역시 영어식 번역으로 원제목은 <스토이케이아> 그리스어로 세상을 구성하는 기본 요소의 의미를 담고 있다. 당시 그리스 시대에는 만물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치열하게 싸우던 때다. 그리하여 물, 불, 흙, 공기라는 4원소 체계가 자리를 잡는데 이 와중에 책 제목을 원소라고 지은 것은 엄청난 자신감의 발로일 것이다. [본문으로]
Posted by 칸나일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