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에 첫 편이 출시되어 이후 심시티2000, 심시티3000, 심시티4 등 많은 속편을 낳은 심시티(SimCity)’ 시리즈는 가장 많은 판매 부수를 올린 비디오게임 중 하나로 기록되어 있다. 이 심시티 시리즈의 특징은 결말이 열린 게임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성취되면 게임이 종료되는 일정한 목표가 없이 끝없이 게임이 진행된다는 뜻이다. 이 글에서는 이와 같은 과정 지향적 게임들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그 전에 먼저 놀이와 게임에 대한 몇 가지 고전적인 저작들을 살펴보자.


1989년작 윌 라이트(Will Wright)의 심시티


요한 하위징아(Johan Huizinga)[각주:1]는 <호모 루덴스(Homo Ludens: 놀이하는 인간>에서 인간 사회의 본질이 놀이에 있다고 보았다. 그는 다양한 언어에서 놀이를 나타내는 단어들을 살펴봄으로써 놀이 개념을 파악하고자 했다. 그리스어에는 파이디아(paidia)와 아곤(agon)이라는 두 단어가 있다. 파이디아는 원래 어린아이의 놀이를 뜻하는 단어였으며, 아곤은 경기 혹은 경연을 가리킨다. 한편 라틴어는 놀이의 전 영역을 통칭하는 루두스(ludus)라는 단일한 단어만을 갖고 있다.


로제 카이와(Roger Caillois)[각주:2]와 장 피아제(Jean Piaget)[각주:3]는 규칙의 복잡하고 엄격한 정도에 따라 초기 아동이 하는 파이디아/놀이(play)와 보다 나이든 아이나 어른이 하는 루두스/게임(game)을 구분했다. 둘의 차이라면 카이와가 규칙이 덜 복잡한 게임과 더욱 복잡한 게임으로 구분한 반면에, 피아제는 사실상 규칙으로부터 자유로운 운동감각적 놀이 및 상징적 역할놀이와 규칙을 가진 게임으로 구분했다는 점이다.


놀이는 특정 시간과 공간 내에서 벌어지는 자발적 행동 혹은 몰입 행위로서, 자유롭게 받아들여진 규칙을 따르되 그 규칙의 적용은 아주 엄격하며, 놀이 그 자체에 목적이 있고 ‘일상생활’과는 다른 긴장, 즐거움, 의식(意識)을 수반한다. -요한 하위징아, <호모 루덴스>


한편 곤살로 프라스카(Gonzalo Frasca)[각주:4]에 따르면 규칙이 없는 놀이 혹은 게임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점에서 그의 견해는 모든 놀이에는 놀이가 벌어지는 장소와 시간에서 무엇이 통용되는지를 결정하는 규칙이 있다고 본 하위징아와 일치한다. 하지만 하위징아가 놀이(파이디아)와 경기(아곤)는 근본적으로 분리될 수 없다고 주장한 것과 달리, 프라스카는 게임의 승리 및 패배를 가르는 종료 조건의 유무에 따라 게임을 분류했다. 그러한 종료 조건을 루두스 규칙이라고 하며, 게임의 진행과 관련된 나머지 규칙을 파이디아 규칙이라고 한다.


모든 게임에는 파이디아 규칙이 있다. 예를 들어, 전래놀이인 강강술래에는 손을 잡고 원을 만들어 노래를 부르며 돈다는 파이디아 규칙이 있지만 루두스 규칙은 없다. 장기에는 졸(卒)이 앞이나 옆으로 한 칸씩 움직일 수 있다는 등의 파이디아 규칙과 상대방의 왕을 잡으면 이긴다는 루두스 규칙이 있다. 프라스카는 강강술래처럼 파이디아 규칙만 있는 게임을 ‘파이디아’, 장기처럼 파이디아 규칙과 루두스 규칙이 모두 있는 게임을 ‘루두스’라고 정의한다. 승리 및 패배 조건의 유무에 따른 프라스카의 범주 구분은 규칙의 복잡성처럼 모호한 기준에 따른 다른 학자들의 분류보다 훨씬 더 명확하다.


어쩌면 ‘승리 및 패배’라는 표현보다 ‘성공 및 실패’라는 표현이 적당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싱글플레이어 게임이나 협력게임에서는 다른 플레이어와의 경쟁에서 승리를 거두는 것이 아니라, 게임 속의 환경에 맞서 일정한 성공 요건을 성취하는 것이 게임의 목표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싱글플레이어 게임과 멀티플레이어 경쟁게임 및 협력게임 모두 게임의 목표가 있으면 루두스에 속한다. 이 점에서 루두스와 파이디아는 각각 목표의 달성을 지향하는 ‘결과 지향적’ 게임과 플레이 과정 자체를 즐기는 ‘과정 지향적’ 게임이라고 부를 수 있다.


심즈 - “심시티 제작자의 사람 시뮬레이터”


그렇다면 ‘덜 복잡한’ 규칙을 가진 놀이를 제외하고 제법 형식을 갖춘 복잡한 게임들 중에서도 게임의 목표가 없는 파이디아가 존재할까? 비디오게임의 주요 장르 중 하나를 차지하는 시뮬레이션 게임들 다수가 거기에 해당한다. 시뮬레이션 게임이란 현실의 다양한 상황들을 모사하는 게임을 말한다. 시뮬레이션 게임은 다시 전략 시뮬레이션, 건설 시뮬레이션, 경영 시뮬레이션, 연애 시뮬레이션, 비행 시뮬레이션, 운전 시뮬레이션 등 다양한 하위장르로 구분되기도 한다.


물론 많은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과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처럼 목표가 분명한 것들도 있다. 이때의 목표는 각각 상대 진영과 캐릭터의 ‘정복’이 될 것이다. 한편 심시티나 ‘심즈(Sims)’ 같은 시뮬레이션 게임들은 도시를 건설하고 한 가족의 삶을 가꾸는 과정 자체에서 즐거움을 제공한다. 이 밖에도 ‘심팜(SimFarm)’, ‘심앤트(SimAnt)’, ‘심콥터(SimCopter)’, ‘심타워(SimTower)’, ‘심어스(SimEarth)’ 등 게임의 제목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심(Sim)’이 바로 시뮬레이션(simlulation)이라는 단어에서 딴 것이다.


위 이름들에서 보듯이 시뮬레이션 게임에서 다루는 소재는 농장, 개미집, 헬리콥터, 건물, 행성까지 정말 다양하다. ‘마이크로소프트 플라이트 시뮬레이터(MSFS)’라는 비행 시뮬레이션 게임은 실제로 항공기 조종사 교육용으로 사용될 정도로 정확한 모사를 자랑한다. 전투기를 조종해 공중전을 벌이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한 공항에서 다른 공항까지 항공기를 몰고 가는 게 무슨 재미가 있을까 싶기도 하지만, 이 같은 가상현실 체험이 바로 시뮬레이션 게임의 묘미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온라인 롤플레잉 게임(MMORPG)들도 파이디아라고 볼 수 있다. 레벨업이나 퀘스트처럼 작은 목표들이 있기는 하지만 게임의 궁극적인 목표와 끝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을 잘 살린 ‘세컨드 라이프(Second Life)’ 같은 게임도 있다. 세컨드 라이프에는 레벨업도 퀘스트도 없다. 현실의 일상생활 전부를 가상으로 옮겨놓은 심즈의 온라인 버전인 셈이다. ‘마인크래프트(Minecraft)’처럼 플레이어의 자유도를 극대화한 오픈월드 혹은 샌드박스 게임들도 파이디아의 좋은 예이다.


마인크래프트 - 무엇이든 만들 수 있는 놀이터의 모래밭처럼 플레이어의 창조성을 극단적으로 발휘할 수 있는 샌드박스 게임의 하나


오늘날 많은 루두스(결과 지향적 게임)가 경쟁게임이고 파이디아(과정 지향적 게임)가 시뮬레이션 게임이라는 관찰이 일찍이 하위징아에게서도 비슷하게 발견된다는 점이 흥미롭다. 하위징아는 고등 형태의 놀이에는 두 가지 기본적 양상이 있는데, 하나는 어떤 것을 얻기 위한 ‘경쟁’이고 다른 하나는 어떤 것의 ‘재현’이라고 보았다.


프라스카는 위에서 언급한 파이디아들이 ‘피억압자의 게임’이 될 잠재성을 갖추고 있다고 말한다. 게임 디자이너가 미리 규정한 틀을 따르는 대신에 플레이어 스스로가 규칙을 만들어나가는 게임이 바로 파이디아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파이디아를 즐기는 플레이어는 아무 목표 없이 헤매는 것이 아니라 자기만의 루두스 규칙을 좇는다. 그것은 세계 최대의 도시 건설이 될 수도 있고, 그렇게 건설한 도시를 화산 폭발로 파괴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파이디아 규칙 역시 플레이어에 대한 암묵적 제약을 가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예컨대 심즈에서 플레이어의 캐릭터는 군인, 과학자, 범죄자, 사업가 같은 직업은 가질 수 있지만 시민단체 활동가가 될 수는 없고, 어린이와 청소년은 무조건 학교에 가야 한다. 한편으로 사용자가 직접 게임의 규칙를 고친 모드(mod: modification)를 제작하여 플레이하고 다른 플레이어들과 공유하는 문화가 게이머들 사이에 존재한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이 플레이어와 디자이너가 분리되지 않고 하나 되는 진정한 게임 해방으로 가는 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 Johan Huizinga, Homo Ludens: A Study of the Play Element in Culture, 1938. (이종인 옮김, 호모 루덴스 - 놀이하는 인간, 2013) [본문으로]
  2. Roger Caillois, Man, Play and Games, 2001. [본문으로]
  3. Jean Paiget, Play, Dreams and Imitation, in Children, 1951. [본문으로]
  4. Gonzalo Frasca, The Videogames of the Oppressed, 2004. (김겸섭 옮김, 억압받는 사람들을 위한 비디오게임, 2008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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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의자놀이를 한 번씩 해봤을 것이다. 게임의 규칙은 이렇다. 참가자들은 음악이 틀어진 동안 자유롭게 돌아다니다가 음악이 멈추면 의자를 하나씩 차지하고 앉는다. 이때 의자의 수는 참가자의 수보다 적고, 의자에 앉지 못한 사람은 탈락한다. 이제 의자의 수를 더 줄이고 남은 참가자들이 다시 게임을 진행한다.


이 게임은 전형적인 ‘경쟁 게임’이다. 경쟁 게임에서 플레이어들은 희소한 자원(돈이나 땅 그리고 많은 경우 목숨)을 놓고 경합을 벌인다. 여기서 희소한 자원은 의자이다. 누군가가 의자에 앉으면 다른 누군가는 필연적으로 그 의자에 앉지 못한다. 경쟁의 결과로 매번 탈락하는 사람이 생기고 이 과정을 반복하여 최후에 남는 사람이 승리한다. 게임이 끝나면 참가자들은 승자와 패자의 두 집단으로 구분된다.


실제로 우리가 즐기는 대다수의 게임과 스포츠는 경쟁 게임이다. 교육심리학자 알피 콘(Alfie Kohn)은 경쟁이 놀이와 동일시되는 것에 대한 반론을 펴며, 다음과 같은 의자놀이의 변형을 제시한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참가자보다 적은 수의 의자가 주어지지만, 한 의자에 꼭 한 사람만 앉을 필요는 없다. 모든 사람이 어떻게든 의자 위에 올라가기만 하면 된다. 게임이 진행될수록 의자의 수는 줄어들고 모두 앉기는 점점 어려워진다.


이 게임에는 성공과 실패가 있을 뿐 승리와 패배는 없다. 이 두 가지의 차이는 중요하다. 성공은 승리와 달리 참가자들 모두가 동시에 성취할 수 있다. 다 같이 이기거나 다 같이 지는 것이다. 이런 협력 게임에서는 누구도 적으로 돌릴 필요가 없으며, 패배의 두려움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 ‘협력 게임’은 플레이어들이 서로 싸우는(PvP) 것이 아니라, 함께 외부의 환경과 맞서 싸우는(PvE) 게임으로 정의할 수 있다. 다른 플레이어가 아니라 게임의 규칙과 대결하는 셈이다.


공지영의 ‘의자놀이’ - 2009년 정리해고로 시작된 쌍용차 사태에 관한 르포르타주


콘에 따르면 놀이의 본질은 경쟁, 즉 승자와 패자를 가르는 것이 아니라 즐거움 그 자체에 있다. 사람들이 경쟁 게임을 선호하는 것은 그것이 오늘날의 사회와 경제제도의 관점에서 유용하기에 “경쟁이 즐거운 것이라고 생각하게끔 우리가 사회화”된 결과라는 것이다. 그는 한걸음 더 나아가 “놀이의 순수한 즐거움을 얻으려면 스포츠와 같은 경쟁적 활동은 배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각주:1]


이런 급진적인 결론까지 옹호하지는 않더라도, 우리가 즐기는 게임이 왜 대부분 경쟁적인가는 깊이 생각해볼 만한 문제다. 많은 사람이 경쟁 게임이 협력 게임보다 더 재미있다고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 게임이 재미있기 위해서는 반드시 경쟁의 요소가 들어가야 하는 걸까? 이런 질문들에 직접 답하는 대신에 한번 반대의 질문을 던져보자. 우리가 즐기는 협력 게임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간혹 경쟁 게임에도 협력의 요소가 있다. 다대다로 싸우는 전략게임의 팀플레이나 축구, 농구와 같은 팀스포츠가 그러하며, 나를 제외한 모두가 적인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에서도 더 큰 적을 상대하기 위해 언젠가는 대적해야 할 상대와 일시적으로 손을 잡아야 할 때가 있다. 하지만 이 경우도 본질은 집단 내의 협력보다는 결국 집단 간의 경쟁에 있으므로 진정한 의미의 협력 게임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주로 혼자 하는 퍼즐이나 액션/어드벤처 장르의 비디오게임 중에는 멀티플레이어 협력 모드를 지원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대체로 여럿이 즐기는 전략게임이나 일인칭슈팅게임(FPS)에 ‘디펜스’와 같은 협력 모드가 있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사례들도 싱글플레이어 혹은 멀티플레이어 경쟁 게임이 주가 되며 협력 게임은 덤으로 딸려온 특별 모드나 유저들이 만든 변형 게임(mod) 수준인 경우가 많다. 순수하게 협력을 본위로 만들어진 비디오게임은 드물다.


‘리그 오브 레전드(LoL)’ - 어떤 의미에서 거의 모든 3인 이상 멀티플레이어 게임은 협력의 요소를 지니고 있지만, 이것을 진정한 의미의 협력 게임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한편 보드게임을 비롯한 아날로그 게임 중에는 협력 게임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보드게이머들 사이에 잘 알려진 예로는 팬데믹, 플래시 포인트, 하나비, 아컴 호러, 로빈슨 크루소, 스페이스 얼럿, 좀비사이드, 메이지 나이트 등이 있다. 이 게임들에서 플레이어들은 인류를 위협하는 전염병을 퇴치하거나, 화재를 진압하고 인명을 구하거나, 고대 악령의 부활을 막거나, 조난된 섬에서 탈출하는 등 공동의 목표 달성을 위해 힘을 모은다.


탁자에 둘러앉아 하는 역할놀이 즉, TRPG(tabletop role playing game)는 거의 모두가 협력 게임이다. TRPG의 플레이어들은 각자 하나씩 역할을 맡고 일행이 되어 던전과 같은 가상 세계를 탐험하고 주어진 임무 혹은 퀘스트를 완수한다. TRPG에도 규칙은 있지만 비디오게임이나 보드게임처럼 정교하게 알고리즘화된 규칙은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에 TRPG의 진행은 주로 대화를 통한 역할의 수행으로 이루어진다.


경쟁이 게임의 필수적인 요소가 아니라는 사실은 수많은 싱글플레이어 게임들의 사례를 보아도 알 수 있다. 플레이어가 주인공이 되어 주어진 시나리오를 클리어 하는 액션/어드벤처 게임이나 현실을 모사한 환경을 간접 체험할 수 있는 시뮬레이션 게임은 비디오게임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항상 인기를 끌어 왔다. 이런 게임들마저 ‘자신과의 경쟁’이라고 부르는 것은 수사의 남용일 것이다.


‘팬데믹’ - 전염병으로부터 세계를 구하라!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싱글플레이어 게임이나 협력 게임들은 대개 소재나 테마에 있어서 경쟁 게임들과 두드러지게 구분된다는 것이다. 협력 게임 중에는 전쟁보다는 모험, 살생보다는 생존, 상잔보다는 상생을 다루는 것이 많다. 그 과정에 싸움이 수반되더라도 상대는 대등한 위치에 있는 가상의 경쟁자보다는 괴물이나 재난, 위기상황과 같은 거대한 악(惡)이다. 요컨대 협력 게임은 대체로 공공선이나 바람직한 가치를 추구한다. 물론 이는 경쟁 게임이 구조상 어느 정도의 대칭성을 띄기 때문일 수도 있다.


협력 게임의 재미는 다른 플레이어를 밟고 올라가 승리의 왕관을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의 목표 달성을 위해 모두가 힘을 합치고 의견을 조율하는 데서 나온다. 그렇다고 협력 게임이 항상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진행되는 것은 아니다. 한 사람이 플레이를 지나치게 주도하는 경우 나머지는 게임에서 소외될 수 있다. 결정적인 잘못을 저질러 실패를 초래한 사람이 원성을 사기도 한다. TRPG에서는 자기 역할과 맞지 않는 말과 행동을 하는 것이 게임의 분위기를 완전히 망칠 수 있다.


‘던전 앤 드래곤(D&D)’ - 모든 TRPG의 효시이자 지금까지 가장 널리 즐겨지는 TRPG 중 하나


협력 게임이 경쟁 게임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하다거나, 항상 더 재미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협력 게임보다 경쟁 게임을 선호하는 사람에게 “그런 것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은 당신뿐이다.”라고 윽박지를 수는 없지 않은가? 다만 경쟁이 재미의 필수적인 요소는 아니라는 점, 협력 게임에는 거기서만 느낄 수 있는 고유한 재미가 있다는 점, 그리고 우리가 경쟁 게임을 선호하는 것은 어쩌면 타고난 본능이 아니라 학습된 것일 수 있다는 점은 잊지 말아야겠다.


사실 경쟁 게임이든 협력 게임이든 ‘결과 지향적’ 활동이라는 점에서는 같다. 하나는 타인에 대한 승리를, 다른 하나는 전원의 성공을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다를 뿐이다. 그럼 결과에 관계없이 게임을 플레이하는 과정만으로 즐거움을 얻을 수는 없는 걸까? 게임에서 지거나 목표 달성에 실패해도 재미를 느낄 수 있듯이 승리와 패배, 성공과 실패의 구분이 아예 없는 게임도 충분히 재미있을 수 있지 않을까? 다음 글에서는 이런 ‘과정 지향적’ 게임들에 대해 살펴보겠다.


  1. Alfie Kohn, No Contest: The Case Against Competition, 1992. (이영노 옮김, 『경쟁에 반대한다』, 산눈, 2009)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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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이 섞여 있는 수학용어

 

무리수(無理數)

명사

1」『수학실수이면서 분수의 형식으로 나타낼 수 없는 수.

2도리나 이치에 맞지 않거나 정도를 지나치게 벗어나는 일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예를 들어 



등은 모두 분수꼴로 표현되므로 유리수이다.



처럼 순환하지 않는 무한소수는 분수형태로 나타낼 수 없는 무리수이다.

유리수(有理數)를 한자 그대로 풀이하면 이치에 맞는 수라는 의미다. 반대로 무리수(無理數)는 이치에 맞지 않는 수라는 의미다. 영어로 유리수는 rational number, 즉 합리적인(이성적인) 수를 뜻하고 무리수는 irrational number, 즉 비합리적인(비이성적인) 수를 뜻한다. 한자어 유리수와 무리수는 이 용어를 그대로 의역한 것이다.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무리수를 뒀다거나 너무 무리했다는 표현 역시 이런 의미를 살린 표현이다.

그런데 무리수의 실제 정의는 실수이면서 분수의 형식으로 나타낼 수 없는 수이므로 "비합리적인(비이성적인) 수"와는 그 의미가 전혀 다르다. 보통 수학용어는 그 의미가 명확한 단어를 사용한다. 수학용어에는 감정이 결여되어 있다. 그런데 비합리적이라는 말에는 감정이 섞여 있다. 수학용어에서 이런 표현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왜 이런 이상한 용어가 탄생한 것일까? 이것은 무리수에 관한 이야기이며 우리의 삶에 관한 이야기이다. 

 

수학의 언어로 신비주의를 설파하다


무리수는 수학 교양서적이나 다큐멘터리에서 빠지지 않는 단골 메뉴다인식 과정 자체가 극적인 사건들로 가득 차 있어서 이 주제로만 책 한 권을 써도 될 정도다무리수와 관련된 사건과 인물이 이야기의 폭을 넓혀준다면 무리수 자체가 가진 심오한 성격은 그 깊이를 더해준다학 외에도 철학, 미학, 신학, 과학 등 여러 분야에서 무리수의 흔적이 발견된다. 

역사 속에 최초로 등장하는 무리수는 2의 제곱근 이다. 이 숫자는 피타고라스 정리와 관련이 깊다직각삼각형의 세 변 a, b, c 가운데 가장 긴 변을 c 라고 했을 때 항상 을 만족한다는 게 피타고라스 정리다대표적으로 등이 있다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시작되었다a=b=1 인 경우에는 가 되는데 이 조건을 만족하는 유리수 c를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므로  c는 1.4 와 1.5 사이에 있다.

이므로 c는 1.41 과 1.42 사이에 있다.

이므로 c는 1.414 와 1.415 사이에 있다.

이런 식으로 계산해 들어가면 순환하지 않고 끝없이 계속되는 숫자 c=1.4142135623...가 나온다물론 우리는 이 값을 라고 쓰고 있다.[각주:1]


피타고라스(572?492? B.C.는 폐쇄적이고 비밀스런 신비주의 교단의 교주였다. 이들은 집단생활을 했으며 대개 모든 성과를 스승에게 돌렸으므로 피타고라스의 성과로 알려진 내용 대부분은 집단이 공유한 지식으로 보아야 한다.‘만물은 수로 이루어져 있다는 믿음을 공유했던 피타고라스 학파는 모든 현상의 배후에 수의 규칙이 숨어 있다고 믿었다

이 믿음에 기초해 현악기에서 현과 현 사이 길이비를 자연수비로 표현했는데 서양음악의 7음계가 여기서부터 유래한 것이다.(오늘날 쓰이는 음계와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뿐만 아니라 우주의 운행에도 일정한 규칙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우주는 거대한 악기와 같은 구조로 무질서 속에서 질서로 나아가 완벽한 조화를 이루게 되었으며 이는 단순한 수로 표현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우주, 질서, 조화 등을 의미하는 코스모스란 단어도 이들이 처음 사용했다

피타고라스 학파처럼 극단적인 예가 아니더라도 그리스의 정신세계에서는 수학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그리스인은 수학이야말로 가장 논리적이고 이성적이며 신의 세계에 가까운 언어라고 생각했다현상의 배후를 지배하는 수학적 질서를 중요하게 여겼고 여기에는 다양한 종류의 비례/비율이 포함된다.

이집트가 내세와 신의 세계를 강조했던데 반해 그리스는 상대적으로 현세와 인간의 세계를 긍정했다그래서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인간의 모습을 최대한 현실 그대로 묘사하려 노력했다이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사물과 인체의 정확한 비율(이상적인 비율)을 찾는 일이다이런 사고방식은 수학적 사고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그리스인들에게 이상적인 비율은 이성적인 것이었고 동시에 아름다운 것이었다그리스에서는 철학미학자연과학종교수학은 모두 깊이 연결되어 있었다.

라틴어로 ratio(라티오)는 비()를 의미한다. 여기에서 파생된 형용사가 rational이다. 그러니까 합리적인(이성적인)이란 단어는 일면 비율에 맞는이란 의미가 담겨 있다. 이것을 일본인들이 번역하는 과정에서 합리적인 수라는 의미로 오역해 '이치에 맞는'에 해당하는 유리수(有理數)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유클리드는 <원론>에서 유리수와 무리수를 묘사하며 자연수와 자연수의 비로 나타낼 수 있는 수와 나타낼 수 없는 수라는 정의를 사용한다.[각주:2] 따라서 어원을 고려하면 유비수(有比數)나 무비수(無比數)라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피타고라스 학파는  비율이 아니므로 말할 수 없다는 뜻으로 알로곤이란 이름을 부쳤다.

피타고라스가 살던 때는 신화의 시대였다제우스가 분노하여 던진 창이 번개가 되고 분노한 포세이돈이 폭풍우를 일으키던 시절이다피타고라스 학파도 디오니소스를 숭배했다지진은 죽은 자들의 모임이며천둥은 죽은 자들이 산자를 겁주는 위협이라는 식의 신화적 상상력을 폭넓게 동원했다인도와 이집트의 영향 아래 다양한 동양의 종교적 전통도 받아들였다금욕주의적 자기수양을 강조했고윤회설을 믿었다그들은 이런 식으로 인간이 던질 수 있는 근본적 질문들에 초보적인 형태로 답을 내놓았다어떤 답은 아주 훌륭했지만 어떤 답은 아주 형편없었다여기에는 신비주의와 수학신앙과 이성동양과 서양 등 현재 상식으로는 자칫 상호 모순적으로 보이는 요소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요컨대 그들은 수학의 언어로 신비주의를 설파했다. 가장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세계를 한데 버무렸다. 그것은 이미 갈등이 내재된 언어였다. 동시에 이것은 파이의 언어이기도 했다. 


진짜 질문은 질문 자체에 있다.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Life of Pi)>는 얀 마텔의 베스트셀러를 영화화한 이안 감독의 작품이다. 소설의 경우 국내에는 <파이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라이프 오브 파이>는 액자소설 형식을 취하고 있다. 파이가 자신을 찾아 온 소설가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이다.

 

인도에서 동물원을 운영하던 파이 가족은 동물원에 대한 정부 지원이 끊기자 캐나다로 이민을 준비한다. 수많은 동물과 함께 화물선을 타고 태평양을 건너는 도중 상상치 못한 폭풍우를 만나 화물선은 침몰하고 가까스로 구명보트에 올라탄 파이만 목숨을 건지게 된다. 이어서 다리를 다친 얼룩말, 굶주린 하이에나, 바나나 더미를 타고 온 오랑우탄이 배에 합류한다. 그리고 보트 안쪽에는 벵골 호랑이 리처드 파커가 웅크리고 있다!

먼저 하이에나가 얼룩말과 오랑우탄을 잡아먹고 이어 호랑이가 하이에나를 잡아먹으며 결국 리처드 파커와 파이만 남게 된다. 파이는 구명보트에서 발견한 생존 지침서를 바탕으로 살아남는 법을 습득하게 되고 파이와 리차드 파커는 엄청난 긴장 속에 공존한다 그리고 기괴한 경험은 끝이나고 마침내 멕시코 해안에 도착한다. 

도착하자마자 리처드 파커는 인사도 없이 밀림 속으로 사라지고 사람들에게 구조된 파이는 병원으로 옮겨진다. 이 병원으로 화물선이 침몰한 원인을 알아내려고 선박회사 직원들이 찾아온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선박회사 직원들은 파이 이야기를 믿지 않는다. 그리고 보고서를 작성하기 위해 모두가 믿을 만한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요구한다. 그래서 파이는 두 번째 이야기를 들려준다[각주:3]

화물선이 가라앉고 구명보트에 넷이 살아남았다. 파이는 먼저 구명보트에 탄 주방장과 선원이 던져 준 튜브를 잡고 살아남았다. 마지막으로 파이 엄마가 바나나 덩어리를 타고 왔다. 선원은 살아남는 과정에서 다리가 부러졌고 염증이 생기기 시작했다. 점점 생존이 절박해지자 주방장은 다리가 다친 선원은 어차피 죽을 수밖에 없으니 그를 죽여서(먹고) 남은 사람들이라도 살자.’는 의견을 내지만 사람들은 거부한다. 하지만 끝내 주방장은 선원을 죽이고 이를 목격한 엄마와 주방장 사이에 다툼이 일어난다. 다툼 과정에서 주방장은 엄마마저 칼로 살해하고 피 흘린 채 바다에 던져진 엄마는 상어밥이 되고 만다. 그리고 다음날 파이는 주방장을 살해한다

 

이 이야기를 첫 번째 이야기와 비교해보면 두 이야기 속 캐릭터들이 일대일 대응을 이룬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얼룩말=선원, 오랑우탄=엄마, 하이에나=주방장, 리처드 파크(호랑이)=파이, 파이=??  그렇다면 첫 번째 이야기에서 파이는 두 번째 이야기에서 누구란 말인가? 대부분은 첫 번째 이야기 속 호랑이 리처드 파크는 파이가 만들어낸 또 다른 자아이며, 이중인격이 되어 자아를 두 개로 분리한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선박회사 직원들도 그랬다. 두 번째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직원들은 파이의 고통을 이해하겠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물러간다. 회사에는 첫 번째 이야기로 보고서를 올리겠다는 약속과 함께.

 

우선 이 영화는 묘사가 굉장히 뛰어나다. 집채만 한 고래와 빛을 내는 해파리하늘을 나는 물고기하늘과 바다의 경계가 사라진 밤하늘밤이 되면 생명체를 잡아먹는 식인섬낮이면 그 섬을 빼곡하게 채우는 미어캣 등 3D가 빚어내는 망망대해의 풍경은 넋을 잃게 만든다. 장면 장면이 너무 아름다워 극한의 고통에 놓인 상황조차 잊는다3D기술이 영화를 망치는 경우도 많은데 이 영화는 모자라지도 과하지도 않게 3D를 너무 잘 활용했다. 이야기는 너무 생생해서 영화를 보면 내가 태평양 한가운데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특히 영화 대부분을 차지하는 파이와 리처드 파크의 분투는 너무나 매력적이고 복합적인 텍스트다. 구명보트라는 좁은 공간은 긴장감을 고밀도로 압축시킨다. 파이와 리처드 파크는 자연과 싸우고 상대와 싸우며 무엇보다 자기 자신과 싸운다둘은 적으로 만나 동료가 되었으며 다시 아무 것도 아닌 타자로 돌아갔다. 끝부분에 잠깐 등장하는 두 번째 이야기 역시 누가 들어도 그럴 듯한 이야기다. 얼핏 보기에는 구명보트에서 네 마리 동물과 함께 지냈다는 이야기보다 더 현실적으로 보인다

가장 흔한 감상평은 두 가지 이야기 중 어느 쪽이 사실인가(진실이 아니라!)라는 질문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사람들은 자기주장이 좀 더 논리적이라고 설득하는데 에너지를 쏟는다. 주위 사람들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져봤다어떤 스토리가 진짜인 거 같냐고첫 번째 이야기가 사실에 가깝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 이야기가 담고 있는 상징에 주목하는 반면, 두 번째 이야기가 사실에 가깝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논리적 인과관계나 현실성에 주목한다. 흥미롭게도 수학을 가르치는 학원 동료들은 모두 하나같이 두 번째 이야기가 사실이라고 답했다

파이는 두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당신은 어느 쪽을 믿고 싶은가?’, ‘믿고 안 믿고는 당신이 판단하세요?’, ‘어떤 스토리가 맘에 들어요?’와 같은 질문을 계속해서 던진다. 선박회사 직원들은 첫 번째 이야기를 듣고 난 후 바나나 더미는 물에 뜨지 않는다고 지적하지만 파이는 두 번째 이야기에서도 엄마가 바나나 더미를 타고 왔다고 말한다.[각주:4] 파이는 첫 번째 이야기에서 리처드 파크와 헤어질 때도, 두 번째 이야기에서 엄마가 상어밥이 되었다고 말할 때도 나라를 잃은 사람처럼 슬퍼한다

파이가 반복해서 질문을 던지기 때문에 영화를 보고 나서 이 질문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건 이 질문의 답이 아니라 질문 자체에 있다. 파이의 질문을 문자 그대로 해석해서 열심히 정답을 찾고 만족하는 것으로 끝냈다면 이 글을 읽고 영화를 다시 보기 바란다.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일 것이다. 이 영화는 인생의 정답에 관한 영화가 아니라 답을 찾아나가는 과정과 그 과정에서 가져야할 태도에 관한 영화다. 


무한한 탐구자의 길고 긴 여정

  

파이는 종교를 세 개나 가지고 있다힌두교기독교(천주교), 이슬람교를 동시에 믿고 있으며 대학에서는 유대교의 신비주의를 강의하고 있다파이는 맨 처음 힌두교를 믿게 된 이유에 대해신은 소개를 받아야 아는 건데 처음 소개받은 게 힌두였다.”고 말할 뿐이다그 다음 예수를 알게 되고 올린 기도는 예수를 만나게 해줘서 감사합니다비슈누님이었다이슬람교에 대해서는 기도를 하면 바닥은 성지가 됐고 마음이 편해졌다.”고 말한다파이의 태도는 역설적으로 범신론이나 불가지론에 가까워 보인다. “동시에 3개의 종교를 믿는 것은 아무 것도 믿지 않는 것과 같다.”는 아버지의 말은 상당히 예리하다.

파이가 처음 물을 마시러 성당을 찾아갔을 때 신부가 건넨 말은 너 목마르구나(you must be thirsty)”였으며 리처드 파커의 원래 이름은 목마른(thirsty)”이었다파이는 진리에 목마른 사람이다이름에 붙인 상징성은 파이(π자신의 이름에서 절정에 이른다아버지의 친구이자 수영선생님이었던 마마지는 파리에 있는 피신 몰리토(piscine molitor) 수영장[각주:5]을 다녀온 뒤, “아들이 깨끗한 영혼을 갖기 바라면 피신 몰리토 수영장에 데려가라고 조언한다.[각주:6] 아버지는 이 이야기를 듣고 주인공 이름을 피신 몰리토 파텔로 지었다그런데 피신이 피싱(pissing, 오줌싸개)과 발음이 유사해 놀림거리가 되자 이를 타개할 아이디어를 낸다수업시간에 이름이 호명될 때마다 자기 이름을 피신의 약자 pi(파이)로 불러달라며 밑도 끝도 없이 원주율 π를 외우기 시작한 것이다.[각주:7] 결국 칠판 4개를 가득 채울 정도로 원주율의 근삿값을 정확히 외운 피신은 이제 전설의 파이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그러나 원주율에 끝이란 없다단지 칠판 4개 분량을 외운!! 것이다.)




파이가 태어난 곳은 인도 폰디체리로 프랑스 식민지였다가 막 해방된 곳이다. 해안가 마을은 프랑스 남부 분위기를 풍기지만 마을 한복판 수로를 건너면 전형적인 인도 마을이다. 서쪽으로는 이슬람 구역이 자리하고 있다. 시공간의 정체성은 복합적이다.[각주:8] 그렇다면 등장인물은 어떤가?

1954년 프랑스가 폰디체리를 반환하자 사업가인 아버지는 호텔을 접고 식물원 자리에 동물원을 낸다. 파이 어머니는 독실한 힌두교 신자다. 어머니는 하층계급과 결혼했다고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상류층 출신으로 여전히 전통적인 인도의 가치관을 갖고 있다. 반면 아버지는 독립을 이룬 인도가 서구민주주의에 기초한 현대국가로 탈바꿈하길 바란다. 소아마비를 앓고 신을 찾았지만 정작 아버지를 살린 건 서양의학이었다. 아버지라는 캐릭터는 이성과 합리성을 중시하는 서구근대성을 상징한다. 아버지가 사업가인 것도 상징적이다. 아버지는 파이에게 세상의 어떤 종교를 믿는 것보다도 이성을 믿는 게 어떠냐? 우주를 이해하는데 과학은 수백 년이 걸렸지만 종교는 1만 년이나 걸렸다"고 말한다. 그러자 파이 어머니는 자신의 손바닥으로 가슴을 짚으며과학은 세상을 가르쳐줄 순 있지만 여기 있는 건 가르쳐주지 못한다.”고 응수한다.

파이가 이해불가한 재난을 대하는 태도는 얼핏보면 어머니의 세계를 닮아 있다. 채식주의자인 파이는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물고기를 먹게 된다. 물고기의 죽음에 미안해하며 물고기로 나타나 자신을 살려준 비슈누 신에게 감사해한다. 리처드 파커의 존재에 대해서도 감사해한다.

 

“...리처드 파커가 있어서 마음이 놓인다. 녀석도 나처럼 험한 세상에 대한 경험이 별로 없다. 둘 다 같은 주인(master, 부모님) 밑에서 편히 살아왔고 이젠 진짜 주인(ultimate master, )의 처분을 기다리는 신세다. 리처드 파커가 없었다면 난 지금쯤 죽었을 거다. 난 녀석을 보며 긴장했고 녀석을 돌보는 것에 삶의 의미를 두었다.” 


결정적인 순간마다 파이는 피타고라스처럼 신비주의자의 면모를 보인다. 퍼붓는 폭풍우 사이로 내비치는 햇살과 섬광처럼 번쩍이는 번개를 보며 "신을 경배하라! 온세상의 신이시여! 온정과 자비의 신이시여! 너무 아름답다"고 외치거나 죽음을 앞둔 위기 앞에서 드디어 신이 우리를 찾아왔다고 흥분한다. 파이는 신이 언제나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섬을 못 찾았으면 난 죽었을 거예요. 그 이빨을 못 찾았어도 혼자 외로이 죽었겠죠. 신이 날 버리셨다 생각했는데 지켜보셨던 거죠. 내 고통에 무심하다 생각했는데 지켜보셨던 거예요. 구조될 희망을 버렸을 때 휴식을 주시고 여행을 계속하란 계시를 내리셨죠.”

 

하지만 파이는 단지 믿음에만 의존해서 사태를 헤쳐나가는 게 아니라 매순간 굉장히 이성적인 판단을 총동원하여 생존방법을 터득해간다. 구명보트에서 발견한 생존 지침서(survival at sea)가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빗물받아 식수로 쓰고 낚시해서 배를 채우고 바람을 다스리거나 태양을 피하는 방법을 터득한다. 해류지도를 보고 현재위치를 찾아보기도 한다. 심지어 지침서에는 육식동물과 함께 살아남았을 때 동물을 조련하는 방법까지 설명되어 있는데 결국 리처드 파커를 길들이는데도 성공한다. 이런 식으로 파이는 두려움을 극복하고 희망을 잃지 않는다. 요컨대 생존 지침서는 아버지의 언어인 이성과 과학이 집약되어 있는 또 다른 '삶의 방식'인 셈이다.


파이의 이런 복합적인 태도는 관객을 아리송하게 만든다. 어떨 때는 굉장히 비상하고 영리한 주의주의자(主意主義)의 풍모를 비치는가하면 어떨 때는 소극적이고 무기력한 운명론자의 느낌을 준다. 파이라는 이름처럼 수학적인 메커니즘에 익숙한 사람으로 보이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대책없이 신의 이름을 부르는 미치광이처럼 보이기도 한다.

파이가 진리에 목마른 사람임을 상기하기 바란다. 수학과 종교는 진리를 갈구하는 사람들의 언어라는 점에서 상통한다. 대부분은 수학의 언어와 종교의 언어가 가장 먼 대척점에 위치해 있다고 생각하지만 인류의 역사를 조금만 살펴보아도 이 둘이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애초에 종교, 수학, 과학, 철학은 그 뿌리가 같다. 

파이라는 이름에는 질서와 무질서가 공존하는 복잡한 삶의 모습이 담겨 있다. 동시에 진리를 갈구하는 무한한 탐구자로서 인간의 모습이 담겨 있다. 탐구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겸손이다. 겸손이란 한 가지 방법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오만에 빠지지 않는 것이다. 파이는 아버지의 언어를 따분해했다.학교는 재미없다고 열심히 다니지도 않았다. 그러나 마지막에 그가 가장 가슴아파한 건 아버지와의 이별이었다. 


"하지만 가장 가슴 아픈 건 작별인사조차 못했다는거죠. 아버지한테 감사할 기회가 없었어요. 그분의 가르침이 없었다면 살아남지 못했을 거예요."

   

무리수는 순환하지 않는 무한소수라서 아무리 쓰고 또 써도 그 끝이 없으며 규칙성도 없다커튼을 달려고 창문 크기를 재면서 누구도 가로 길이가  미터라고 말하지 않는다 는 분명히 존재한다하지만 누구도 일상에서 사용하지 않는다무리수라는 개념은 매우 형이상학적이어서 두뇌로는 인식할 수 있지만 감각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다배는 난파되었고 파이가 살아 남았다는 사실만큼은 명확히 존재한다. 그러나 그 과정은 이해하기 어려운 수 많은 의문들로 가득 차 있다. 유한한 삶 속에 무한한 질문. 파이의 삶 속에, 그 삶을 대하는 파이의 태도 속에 무리수 의 발자취가 담겨 있다. 

  

 

"의미없음"의 "의미"



파이가 겪었던  이야기를 다 듣고 난 후 의미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는 소설가에게 파이가 되묻는다.이미 일어난 일에 무슨 의미가 필요해요?" 이야기는 미궁 속에서 길을 찾지 못하고 끝나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갑자기 소설의 한 대목이 떠올랐다.


 전쟁에는 진실이 있지만전쟁 이야기에는 조금의 진실도 없으니까삶은 살아가는 것이지이야기하는 게 아니거든.

김연수, <‘뿌넝숴’·不能說중에서  


우리는 이 쯤에서 의미찾기를 포기해야 하는 것일까? 

파이가 두려워 한 것은 죽음이나 고통 그 자체가 아니었다. 파이는 죽음 앞에 초연했다. 죽음을 앞 둔 순간에도 드디어 신이 날 찾아왔다며 기뻐하기까지 했다. 파이를 제일 고통스럽게 한 건 언제나 준비되지 않은 이별이었다. 이별의 정점에 리처드 파커가 있다. 

파이와 리처드 파커와의 첫 만남은 상당히 인상적이다동물원 호랑이와 교감을 시도한 파이는 눈을 보면 동물에게도 영혼이 있다는 걸 알 수 있다고 말한다하지만 아버지(이성)는 짐승(자연)은 짐승일 뿐이며 친구가 될 수 없다그걸 잊어버리는 순간 목숨을 잃는다고 나무란다짐승의 눈에서 보는 건 그 눈에 비춰진 네 감정일 뿐아무 것도 아니라고 단정한다. 아버지의 세계에서 호랑이는 잡아먹히지 않으려면 내가 먼저 제압해야 하는 대상이다. 

파이는 겸손한 사람이었다. 세상을 이해하려고 애썼지만 다 안다고 자만하지 않았다. 원인을 알 수 없는 고난과 시련이 들이닥쳤을 때 파이는 리처드와의 긴장감 속에서 다시 살아나기 시작한다. 리처드를 구해내고 돌보는데서 자신의 존재 이유를 발견한다. 파이는 리처드라는 타자를 통해 삶의 의미를 되찾는다. 물론 그 과정에서 아버지의 세계(동물 조련)로부터 도움을 얻기도 한다. 파이에게 리처드는 삶의 이유이자 정체성이 되었다. 파이 이야기는 리처드와 함께한 이야기이고 파이는 시련을 함께 극복한 리처드의 친구로 존재했다. 

파이는 리처드에게 말을 건다. 함께 별을 바라본다. 파이는 리처드와 대화했으며 교감했다고 생각했다. 비어 있던 삶, 의미가 없던 삶은 리처드로 인해 채워졌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리처드는 한마디 인사도 없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졌다. 파이는 다시 삶의 이유를 잃었고 배신감에 사로잡혔고 무엇보다 외롭고 두려워서 펑펑 울었다. 하나의 세계가 붕괴되었다가 다시 구축되었고 또 다시 붕괴되었다. 파이는 다시 홀로 남겨졌다.

리처드를 적으로 인식했던 순간부터 가장 뜨거운 시절을 함께한 동료라고 생각했던 마지막까지 리처드는 그저 리처드였다. 파이는 리처드를 이해한 것도 정복한 것도 아니었다. 무언가를 공유한 것도 아니었다. 물론 그와 함께한 시간 만큼은 분명히 존재했었다. 그러나 그 시간들은 파이의 언어로, 파이의 가치로 환산되지 않는다. 리처드에게 투영했던 모든 감정은 파이만의 것이었을까? 파이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떠올린다. 호랑이 눈을 통해 보게 되는 것은 단지 거기 투영된 네 모습일 뿐이라던. 하지만 파이는 끝내 여운을 남긴다. 


 “아버지가 옳으셨어요리처드 파커에게 난 친구가 아니었어요생사를 같이했는데 돌아보지도 않고하지만 녀석의 눈에 비춰진 게 결코 내 모습만은 아니었어요틀림없어요난 느꼈거든요비록 입증은 못하더라도.”


우리 인생과 이 세계에는 정답이 있어야 한다. 는 강박이 있다. 우리는 한시도 이 태도 앞에 굴복하지 않은 적이 없다. 이 세상에 답이 없다면 왜, 어떻게 살아간단 말인가! 이런 강박은 나날이 심해지고 있다. 20대에는 어때야 하고, 30대는 뭘 해야 하고, 여자는 어때야 하고, 나이듦은 어떤 것이어야 하고. 이런 식으로 사회적 통념이 굳어 있고 대부분은 그 길을 따라간다. 그 길은 많은 이들이 걸었고, 지금도 걷는 길이라 안심할 수 있다는 과대포장이 되어 있지만 이상하게 쓸쓸하고 공허한 길이다.  

"의미없음"의 "의미"에 대해 생각한다. 시작도 끝도 알 수 없는 만남과 이별에 대해, 끝내 인식불가능했던 리처드에 대해. 대상을 어떻게 이해하건 그것은 일단 자신의 의지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의미를 찾으려는 노력은 정직하게 보상받지 못할 때가 많다. 진실에 가 닿으려는 노력은 오히려 텅 빈 공허로 돌아올 수도 있다. 채우면 다시 비고 채우면 다시 비는. 그러나 확실히 비워야 다른 것을 채울 수 있다. 실패를 모르는 사람은 고통에 대해 해석하지 못한다.[각주:9]자신의 감정을 이해하는데 게으른 사람은 타자도 이해할 수가 없다. 

누구나 어느 정도는 해석불가능한 고통과 분열을 안고 살아간다. 모든 것이 명쾌하게 이해가능한 삶이란 없다. 때로는 의미없는 시간들을 견뎌내야 한다. 그 시간이 지나야 우리는 새로운 세계로 접어들 수 있다. 의미가 없다고 말한 것은 과거의 사건을 현재의 시점에서 돌이켜볼 때 그렇다는 말이다. 그 과거의 의미를 덜어내야 새로운 걸 담을 수 있기 때문에. 완벽하게 해석되지 않더라도 과거는 과거대로 두어야 다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으므로. 물론 그렇게 새로운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과거의 편린들이 되살아날 것이고 그 의미는 매번 조금씩 달르게 해서될 것이다. 

어쩌면 다른 단계로 도약하지 않고 거기 그대로 멈춰있을 수도 있다. 나이에 상관없이 계속 과거 속에 머무르며. 물론 그게 가장 편안할 수도 있다. 나는 파이의 뒷 이야기가 궁금하다. 그래서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또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닌지. 나에게 들려줄 지혜로운 이야기는 더 없는지.


마무리 하며 - 파이의 근삿값


유리수로 표현되지 않는 수를 발견한 피타고라스 학파는 패닉에 빠진다. 피타고라스 학파는 만물은 수로 이루어져 있으며, 모든 현상의 배후에는 자연수의 비로 설명할 수 있는 간단한 수학적 규칙이 숨어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유리수로 표현되지 않는 수가 존재한다는 것은 자신들의 믿음이 토대부터 무너져 내린다는 것을 의미했다. 믿음이 흔들릴 때 사람들은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 피타고라스 학파는 진실을 의도적으로 외면하는 길을 택했다.와 동일한 유리수를 아직 찾지 못했을 뿐이며 그 유리수가 발견될 때까지는 “한 변의 길이가 1인 정사각형의 대각선”으로 이해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것은 편법이다. 자신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무리수의 존재를 비밀에 부쳤다. 피타고라스 학파의 일원인 히파수스가 무리수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려 했고 그래서 동료들이 살해했다는 이야기는 진위여부가 불분명하다. 

분명한 것은 무리수가 어떤 세계를 끝장냈다는 것이다. 원래 균열은 미세한 곳에서 시작된다. 후세에까지 두고 두고 강력한 영향을 끼쳤던 피타고라스 학파의 정신세계는 무리수의 발견에서 무너져내렸다. 그들은 인식 불가능한 숫자에 “비합리적인 수”라는 이름을 붙였다. 수라는 무감정의 개념에 감정을 담아 용어를 만든 까닭은 한계가 분명했던 자신의 세계를 구출하기 위해서다. 자신이 무지한 게 아니라 수가 불합리한 것이므로 그들의 세계는 여전히 안전했다. 진리를 탐구하는 원동력이었던 믿음이 진리를 가로막는 한계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가 유리수가 아니라는 최초의 증명은 유클리드 <원론>에 나온다. 오늘날에는 무리수와 유리수를 합쳐 실수(Real number)라 부르며 실수에 대한 체계적인 정의가 정립되었다. 다음으로 등장하는 수가 원주율 이다. 파이 이야기를 진이 빠지도록 하고 났더니 숫자에서 무슨 영혼이라도 느껴지는 기분이다. 왜 아니겠는가? 이 숫자에 쏟아부은 사람들의 에너지를 생각하면 그 기운이 전해질 만도 하다. 

원주율 의 값을 알아내는 과정에는 아르키메데스라는 천재 수학자가 등장한다. 원주율은 원의 지름과 둘레길이의 비를 나타낸다. 따라서 반지름이 1인 원이 있다고 하면 지름은 2이므로 둘레길이는 가 된다. 반지름이 1인 원의 둘레길이를 정확히 구할 수만 있다면 원주율 의 값을 알아낼 수 있는데 이 값을 정확히 알아낸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때와 장소에 따라 다양한 근삿값을 사용했지만 수학적으로 엄밀하게 접근한 것은 아르키메데스가 최초였다.  

아르키메데스는 다음과 같은 방법을 썼다. 

왼쪽그림처럼 원 안쪽에 있는 정육각형과 바깥쪽에 있는 정육각형을 그리면 다음과 같은 대소관계가 성립한다. 
(내접하는 정육각형의 둘레 길이)<원 둘레 길이()<(외접하는 정육각형의 둘레 길이)

이번에는 오른쪽 그림처럼 원 안쪽에 있는 정십이각형과 바깥쪽에 있는 정십이각형을 그리면 다음과 같은 대소관계가 성립한다.
(내접하는 정십이각형의 둘레 길이)<원 둘레 길이()<(외접하는 정십이각형의 둘레 길이)

이를 일반화시키면 다음 부등식이 성립한다.
(내접하는 정n형의 둘레 길이)<원 둘레 길이()<(외접하는 정n각형의 둘레 길이)

이 부등식에서 n을 키워나갈수록 원 둘레 길이()는 점점 격차가 작아지는 두 값 사이에 샌드위치가 되어 특정한 값으로 가까이 가게 된다. 이 값이 원 둘레 길이()의 근삿값이다. 따라서 이 값을 2로 나누면 원주율 의 근삿값이 나온다. 아르키메데스는 무려 n=96일 때까지 계산해서 의 근삿값을 3.14까지 정교하게 구해냈다. 오늘날 우리가 쓰는 3.14라는 근삿값은 이렇게 구해진 것이다. 이를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이런 복잡한 비교를 통해서만 우리는 파이의 실체에 접근할 수 있다. 어느 쪽 파이이든 말이다. 




  1. 무리수가 정확히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는 미지수다. 피타고라스보다 1500년 이상 앞선 메소포타미아에서 발견된 점토판에는 의 근삿값이 비교적 정확하게 적혀 있고 피타고라스 정리에 들어맞는 직각삼각형의 세 변의 길이도 여러 개 발견되었다. 인도나 중국에서도 이 피타고라스 정리를 알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한다. 어쨌거나 이 정리는 유클리드의 <원론>에 등장하면서 피타고라스에게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하게 되었다. [본문으로]
  2. 실제 내용을 직역하면 이보다 내용이 훨씬 복잡하고 어렵지만 핵심은 이런 내용이다. [본문으로]
  3. 파이가 들려준 두 번째 이야기는 19세기에 영국에서 벌어진 실화를 모티브로 하고 있다. 더들리-스티븐스 재판으로 알려진 이 이야기는 [정의란 무엇인가]로 유명해진 마이클 샌델의 강의에도 등장한다.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줄거리는 비슷하지만 결말이 다르기 때문에 논쟁이 될 쟁점도 조금 다르다. 배가 난파되고 구명보트에 선원 4명만 살아남게 된다. 이 중 리처드 파커(!)는 17세로 가장 나이가 어리고 고아이며 배를 처음 타 본 초짜다. 식량은 통조림통 두 개가 전부. 시간이 흐르자 선장은 ‘한 명이 죽고 남은 세 명이 살아남는 게 낫다.’며 제비뽑기로 희생될 사람을 뽑자고 주장하지만 무산된다. 결국 다음 날 선장은 리처드를 죽이고 남은 세 명은 리처드 덕에 살아남아 표류 24일째 구조된다. 그리고 리처드 살해 혐의로 선장(더들리)과 이에 동조했던 선원(스티븐스)가 재판에 회부 후 결국 유죄를 선고받는다. [본문으로]
  4. 영화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소설에서는 바나나 더미를 물에 띄우는 실험을 해본다. 그랬더니 물에 떴다! [본문으로]
  5. 검색해보니 지금도 운영 중인 수영장이다. [본문으로]
  6. 힌두교도들에게 성스러운 강인 갠지스 강에서 목욕을 하는 신자들이 떠오른다. [본문으로]
  7. 원주율 외우기 대회를 검색해보라. 세상엔 생각보다 다양한 세계가 존재한다. [본문으로]
  8. 소설 <파이 이야기>를 집필한 작가 얀 마텔은 캐나다 국적을 갖고 있지만 출생지는 스페인이다. 외교관인 아버지를 따라 다양한 나라를 옮겨 다녔고 대학을 졸업한 후에도 여러 나라를 여행했는데 여기에는 인도, 터키, 이란 등이 포함되어 있다. 가장 인상 깊게 읽은 책으로 단테의 <신곡>을 뽑고 있다. 지금은 캐나다 국적을 갖고 있으며 캐나다 내 프랑스계가 많이 거주하는 퀘벡주에 살고 있으며 소설은 영어로 발표했고 주인공은 인도인으로 설정했다. 저자 자체가 굉장히 소설과 어울리는 복합적인 정체성을 갖고 있는데 인도라는 장소를 선택한 것도 우연은 아닌 듯하다. - 빨간책방 파이이야기 편 참고 - [본문으로]
  9. 물론 인간은 무의미 속에서도 살지 못한다. 다만, 탐욕스러운데다 멍청하기까지 한 호모 사피엔스의 우월감이 만고(萬苦)의 근원임을 알아야 한다. 인간이 지구의 유일한 인식자(knower)라는 생각은 스스로 만든 망상이다. 백번 양보해서 ‘생각하는 동물’이면 뭐하나. 문제는 무엇을 생각하느냐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 아니라 찰나를 사는 먼지다. - 정희진, 한겨레 <어떤 메모> 중에서 [본문으로]
Posted by 칸나일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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