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꼬박꼬박 챙겨보는 드라마는 <미생>, <나쁜 녀석들>, <라이어게임> 세 편이다. 심지어 <미생>은 거의 하지 않던 본방사수를 하고 있다. 하지만 오늘은 <라이어게임> 이야기를 해 볼 생각이다. <라이어게임>2005년부터 연재되기 시작한 일본만화다. 2007년 드라마와 영화로 제작되었고 2009년에는 드라마 <라이어게임2>가 제작되었다. 올해 한국에서 드라마로 리메이크 되었다. 정확히는 일본만화의 판권을 산 것이라 일본드라마의 리메이크로 볼 수는 없다. tvN에서 방영되었고 12회로 끝났으나 시즌2가 나올 듯하다. 여기에서는 tvN에서 방영된 한국판 <라이어게임>만을 다룬다.

원래 이 드라마를 소재로 글을 쓸 생각이 없었다. 글을 써볼까 생각이 들었을 때도 아주 내키지는 않았다. 애초 내가 구상했던 글쓰기는 퓨전요리에 가깝다. 줄거리에는 수학 이야기가 거의 등장하지 않지만 수학적 관점에서 작품을 재해석하는 게 기본 컨셉이다. 그런데 이 드라마에는 수학 이야기가 아주 많이 나온다. 조금 과장을 보태자면 처음부터 끝까지 수학이야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드라마를 보며 저절로 떠오르는 생각이 너무 많아 글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라이어게임>은 매단계마다 게임을 통해 승패를 가르고, 사람들을 줄여나가며 최종우승자 1인을 뽑는 과정을 그린 드라마다. 단계마다 진행되는 게임은 우연이 아니라 수학적 계산에 기초해 승패가 갈린다. 물론 어느 정도 운도 따라줘야 하는 고도의 심리게임이기도 하다. 게다가 등장인물들은 여러 사건으로 얽히고설켜 있어 심리게임은 한층 복잡한 고차방정식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그 운조차도 수학적 계산에 의해 확률이 올라가고 내려간다. 재밌는 것은 상대의 심리를 읽어내는 근거도 수학이 제공해 준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 흥미를 유발하는 요소가 역으로 큰 장애가 되기도 한다. 시청률이 내 예상보다 낮게 나온 것도 이 때문인 듯하다. 줄거리 자체는 아주 흡인력이 높은데 막상 게임에 들어가면 규칙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수학을 전공한 내가 이 정도니 보통 시청자가 한 번에 게임 규칙을 이해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드라마에서는 매게임마다 규칙을 자세히 설명해주지만 어려운 건 여전하다. 그래도 기꺼이 리플레이를 반복해가며 볼 생각이 있다면 꼭 보시라. 그걸 만회해줄 만큼 충분히 재밌다. 게임 규칙을 이해했을 때 순간의 깨달음이 주는 기쁨은 덤이다. 야바위보다는 한층 우아하다. 그리하여 나에겐 필승법이 있어.’라고 한 번쯤 외쳐보게 되는 것이다.

 

수학으로 상대의 마음을 읽는다?

 

수학을 잘 하면 게임을 잘할까? 꼭 그런 건 아니다. 더러 확률을 높여줄 수는 있다. 고스톱을 많이 쳐 본 사람은 안다. 상대가 먹은 패, 바닥에 깔린 패를 잘 분석하면 확률적으로 승률을 높일 수는 있다. 그래도 운이 따라 주지 않으면 말짱 허사다. 그리고 인간이 하는 모든 게임은 심리전이기도 하다. 수학이 강심장을 만들어주지는 못한다. 그런데 수학이 상대의 심리를 읽는데 도움을 준다면 어떨까? 수학의 한 분야인 확률이론(probability theory)은 원래 게임에서 유래했다.

 

주사위 게임에서 상금은 64만 원이다. 3번을 먼저 이기는 사람이 상금을 모두 가져가기로 했는데 2:1인 상황에서 더는 게임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상금을 어떻게 나누어 가져야 하는가?”

 

파스칼(1623~1662)의 친구였던 메레가 던진 질문이다. 파스칼은 확률이란 용어를 아직 쓰지 않았지만 이 사례는 확률의 역사를 언급할 때 가장 자주 등장한다. 확률이론은 비교적 늦게 발달한 수학이론이다. 도형을 연구하는 기하학(Geometry)과 수와 식을 연구하는 대수학(Algebra)은 문명시대와 함께 시작되었다. 함수와 그래프를 연구하는 해석학(Analysis)은 대략 17세기 정도 시작되었으며 확률계산과 자료분석을 주로 하는 통계학(Statistics)은 그 뒤를 이어 가장 늦게 시작되었다.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수학이론 중에 게임이론이란 것이 있다. 특히 경제학에서 많이 활용되는 응용수학의 한 분야로 단일한 이론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게임과 관련된 이론 체계 전반을 지칭하는 용어다.[각주:1] 게임이론은 다양한 상황에서 인간이 어떻게 의사결정을 하는 것이 합리적인가를 수학적 관점에서 접근한다. 아주 간단한 예로 유명한 죄수의 딜레마가 있다. (쉽게 이해하고 싶은 사람은 무한도전 392회를 보시라.) 이해하기 쉬우니 1분만 뇌를 사용해보자.

 

사건 용의자 두 명이 체포되어 서로 다른 취조실에 격리되어 있다. 당연히 둘은 의사소통을 할 수 없다. 이들에게 주어진 조건은 다음과 같다.

 

1. 둘 중 하나가 배신하여 죄를 자백하면 자백한 사람은 즉시 풀어주고 나머지 한 명이 10년을 복역해야 한다.

2. 둘 모두 서로를 배신하여 죄를 자백하면 둘 모두 5년을 복역한다.

3. 둘 모두 죄를 자백하지 않으면 둘 모두 6개월을 복역한다.

 

자 이제 상상훈련을 해보자. 당신이 체포된 사람 중 하나라고 해보자. 상대가 침묵하는 경우 당신은 자백을 하는 게 유리하다. 상대가 자백을 하는 경우에도 당신은 자백을 하는 게 유리하다. 결국 당신은 자백을 선택하게 된다. 마찬가지 이유로 상대도 자백을 선택하게 된다. 둘 모두 침묵을 지키면 6개월을 복역하면 그만인데, 결론은 둘 모두 자백을 하고 5년을 복역하는 쪽으로 났다. 각자가 가장 합리적이라고 생각하고 행동했는데 결과는 서로 침묵하고 6개월을 복역하는 것보다 나쁜 쪽으로 기울었다.

여기에서 전제는 개별 행위자들이 항상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사고한다는 것이다. 개별 행위자들 사이에는 어떤 감정도 개입하지 않는다. 즉 신뢰든 불신이든 측정불가능한 요소는 배제한다. 이런 전제를 깔면 둘 사이 의사소통을 허용해도 결과는 똑같다. 뭔가 끔찍하지 않은가?

 

라이어게임 줄거리

 

<라이어게임>으로 돌아가보자.

남다정은 신뢰의 강자다. 어떤 상황에서도 무조건 일단 상대를 믿고 본다. 당연히 사기를 당하기도 제일 쉬운 캐릭터다. 아버지는 빚에 쫓겨 집을 나갔고 그 빚은 고스란히 자신에게 넘어왔다. 다니던 학교를 중단하고 알바를 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해도 이자조차 갚기 버거운 상황. 집에는 사채업자들이 들끓고 삶은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도 잘 웃고 남을 잘 돕고 쉽게 믿는다. 아마 주위에 이런 친구가 있었다면 성질나고 짜증나서 보고 싶지 않은 그런 사람이다.

하우진은 천재다. 명문대 최연소 심리학과 교수였으나 어쩐 일인지 범죄에 연루되어 감옥에 갇혔다가 출소한다. 행동, 몸짓, 얼굴표정 등 작은 변화를 놓치지 않고 거의 정확하게 읽어내 상대 심리를 파악한다. 이런 능력을 십분 발휘해 경찰을 돕기도 한다. 드라마는 그 누구도 믿지 말라.’는 하우진의 대사로 시작한다. 또 매게임마다 내뱉는 내겐 필승법이 있어.’라는 대사의 중독성이란.

강도형은 냉혈한이다. 좀처럼 자기감정을 들키는 법이 없으며 상대의 감정을 들었다 놓았다 한다. 영리한데 차갑다. 경제적 이해에 밝으며 거대한 게임을 기획하고 조종할 줄 아는 사람이다. 차가운 카리스마 뒤로 숨겨진 상처가 얼핏 얼핏 보이지만 어느 쪽이 진짜이고 어느 쪽이 가짜인지 구별하기 어렵다. 연기하는 자신을 연기하고 가면을 쓴 자신을 다시 가면으로 만드는 사람이다.

라이어게임이라는 TV쇼는 이 셋을 포함한 40명으로 시작한다. 단계를 거칠 때마다 생존자는 줄어들고 상금 규모는 점점 올라간다. 최종 우승자에게는 100억이라는 엄청난 상금이 걸려있지만 중간에 탈락하면 거꾸로 지금까지 받은 상금을 내놓아야 한다. 중간에 그 상금을 쓰기라도 하면 빚더미에 앉게 된다. 이렇게 시작된 게임은 사람이 줄어들수록 더욱 고도의 심리전 양상을 띠게 되고 그저 게임으로 즐기기엔 살벌한 기운마저 감돈다. 게다가 이 게임의 참가자는 애초에 기획된 각본에 따라 선별되었다. 드라마가 진행되면서 이 참가자들을 둘러싼 과거의 실체가 조금씩 드러나는데 긴장감이 상당하다. 그리고 라이어게임이라는 TV쇼는 점점 가상과 현실의 구분이 모호한 스릴러물이 되어간다.

 

당신은 게임 안에 있는가, 밖에 있는가

 

게임 참가자들은 상대를 이기기 위해 여러 가지 거짓말을 동원한다. 상대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건 안 된다. 게임 내에서 체결한 계약은 게임 내에서 유효하며 반드시 지켜야 한다. 때에 따라 돈을 동원하기도 하고 계약과 배신이 밥 먹듯 이루어진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되는가 하면 내 팀 안에 적의 내통자가 암약하기도 한다. 조금 머리가 아프기는 하지만 포기하지 말고 드라마 설명대로 한 번 따라해 보는 것도 재밌다. 그런 성의가 없다면 게임장면을 자주 건너뛰게 될지도 모른다. 고백하자면 나도 몇 번 건너뛰기를 눌렀다. 그래도 전체 이야기를 이해하는데 크게 지장은 없다.

개별 참가자들의 행동에는 기본적인 전제가 깔려 있다. 각자가 자신에게 가장 이익이 극대화되는 방향으로 움직인다는. 매게임에는 제법 간단치 않은 수학적 계산이 등장한다. 게임이론과 비슷한 상황도 자주 벌어진다. 참가자들은 자신에게 가장 유리한 상황이라고 머리를 굴리지만 오히려 더 나쁜 결과를 만들어내는 경우가 다반사다. 모든 인간이 수학적 계산에 따라 움직인다면 세상은 언제나 예측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게임판을 흔드는 가장 강력한 존재는 역설적으로 가장 게임을 못할 것 같은 남다정이다. 기본적인 게임이론의 전제를 무시하기 때문이다. 남다정은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심지어 남다정은 중간 생존자들에게 모두 똑같은 선택을 하면 승패가 갈릴 일이 없으니 최종상금을 골고루 나눠갖자는 제안을 한다. 누가 보더라도 말도 안 되는 제안이다. 애초에 게임의 전제를 무시하는 발상이다. 그런데도 남다정의 제안은 묘한 울림을 갖는다. 게임 참가자들의 사연이 처절하면 처절할수록. 자본주의 경쟁 사회에서 패배한 낙오자들은 서로를 부둥켜안고 가자는 제안에 조금씩 흔들린다.

여기에서 하우진과 강도형의 복잡한 셈법이 개입한다. 하우진은 남의 말을 믿지 말라면서도 정작 자신은 절대적 믿음을 갈망하며 남다정을 돕고, 강도형은 사람들의 관계를 적절히 이간질하며 효과적으로 자신의 승리를 향해 나아간다. 게임은 남다정을 사이에 두고 하우진과 강도형이라는 이질적인 천재들이 벌이는 처절한 사투의 양상이 되어간다. 결론은 생략하겠다. 당신이 예상한 그림을 그려보라.

 

라이어게임에서 우리는 선의를 믿어야 하는가

아니라면 수학을 믿어야 하는가?

 

물론 판은 남다정 생각대로 굴러가지 않는다. 그렇게 세상이 간단한 것이라면 인간은 진즉에 유토피아를 건설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남다정의 선의는 당연히 배신당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남다정의 생각을 박살내는 건 단 한 명의 배신자면 충분하다. 잠깐 또 머리를 써보자.[각주:2]

 

A, B 두 도시가 있다. 인구는 무한히 많다. 정보는 앞사람이 뒷사람에게 말해주는 방식으로 일자형으로 전달된다. 앞사람은 뒷사람에게 자기가 들은 내용을 그대로 전달하거나 반대로 전달하거나 둘 중 하나다. A도시 사람들은 매우 정직한 편이라 확률적으로 99%는 들은 내용을 그대로 전달하고, 1%만 반대로 전달한다. 반면 B도시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거짓이 만연해서 확률적으로 60%가 들은 내용을 그대로 전달하고, 40%는 반대로 전달한다. 최초 전달자는 올바른 정보를 갖고 있다. 자 두 도시에서 어떤 정보가 무수히 많은 사람을 거쳐 전달된다고 하자. 단계를 거칠수록 전달되는 정보의 진위여부는 어떻게 될까?

 

수학적으로 두 도시에서 올바른 정보와 거짓 정보가 전달될 확률은 똑같이 1/2로 수렴해간다. 아 슬프다. 이론적으로 100명 가운데 단 한 명꼴로 거짓말을 해도 결국 수많은 단계를 거치면 원정보가 그대로 전달될 확률과 거짓이 전달될 확률은 반반이란 이야기다. 많은 사람을 거치고 나면 A도시나 B도시는 모두 절반의 거짓말로 채워진다. 온 세상에 고담시 천지다. 악플러들은 A도시의 선의를 비웃는다. 수학은 당신에게 디스토피아를 선물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인간의 선의를 믿는다는 게 무슨 의미인가? 남다정의 선의는 단 한 명의 배신으로 쉽사리 망가진다. 단 한 명이라도 배신자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상황은 파국으로 치닫는다. 왜냐하면 단 한 명만 거짓을 말하더라도 내게 전달된 정보가 진실인지 거짓인지 알아낼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내게 전달된 진실이 거짓에 거짓을 더한 결과일 수도 있다.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는 것이다. 신뢰는 바닥부터 무너진다.

 

똑같은 수학적 사실을 두고 세상은 무슨 말을 하는가?

 

수학/과학법칙을 흔히 진리라고 부른다. 이것은 조건 없이 참이라는 말이다. 수학이론은 항상 매우 가치중립적인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런데 그 동일한 결과를 써먹는 사람에 따라 결론은 완전 판이하다.

맬더스라는 유명한 고전경제학자가 있다. 맬더스는 인구론이란 책에서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하는데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는 이론을 전개한다. 쉽게 말해 식량은 100, 101, 102, 103, 104, ... 이렇게 일정한 양이 증가하는데 인구는 1, 2, 4, 8, 16, 32, ... 이렇게 일정한 비율로 증가한다는 의미다. 그럼 어떻게 되겠는가? 당장엔 식량이 훨씬 많아도 시간이 흐르면 인구가 식량을 추월한다. 맬더스는 이 이론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른다. 시간이 흐르면 인구에 비해 식량이 모자라는 현상이 일어나는데 이것은 자연의 법칙이다. 따라서 인간이 굶주리고 죽는 것은 사회나 경제제도의 문제가 아니다. 그냥 자연법칙이다. 따라서 죄책감을 느끼지 마라. 그렇게 자연스럽게 세상은 다시 균형을 잡아간다.

맬더스는 19세기 중반 영국 산업혁명 시기에 자본가 입장을 대변한 고전경제학자다. 1842년에 도입된 광산법은 10세 이하 아동노동을 법적으로 금지시켰다.[각주:3] 이 말은 거꾸로 당시에 10세 이하의 아동노동이 횡행했다는 이야기다. 19세기 런던 노동계급의 평균수명은 20세를 넘지 못했다.[각주:4] 맬더스는 이런 잔혹한 체계를 정당화하기 위해 수학을 끌어들인 것이다.

맬더스 인구이론은 19세기 영국에서 몇 십 년간 잘 들어맞다가 용도폐기 된다. 일단 출산율이 일정하다는 가정 자체가 맞지 않았고 식량증가나 인구증가 패턴도 예상과 맞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견강부회식 이론은 엄청나게 많았고 앞으로도 많을 것이다. 슬프게도 이 이론들이 자신을 정당화하는데 수학을 동원한다.

게임이론 역시 다양한 방식으로 이용된다. 어떤 사람은 개별적 인간의 합리적 행동만으로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으니 중재자의 역할로서 정부 역할을 강조한다. 어떤 사람은 합리적 행동에 따라 산출되는 결과물을 어느 정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맬더스처럼 삐뚤어지면 그건 자연의 법칙이니 냅둬야 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개별행위자로서 국가가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가면 환경을 해치고, 자원을 남획하며, 분쟁 지역에 무기를 판매하는 등의 행위도 모두 정당화될 수 있다.

남다정이 많아지면 세상은 좋아지는가? 선의는 언제나 선한 결과를 만드는가? 그렇지 않다면 이 세상이 조금 더 좋아지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수학에는 도덕이 개입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수학을 사용하는 사람은 도덕을 개입시킨다. 특히 통계학과 경제학이란 학문에 두드러지는 특성이다. 사람에겐 어떤 의지가 먼저 있고 그 의지를 위해 지식을 동원하는 경우가 숱하다. 경제학은 진리가 아니다. 사람의 문제에 고정된 진리라 없다. 그러니 무조건 믿지 말라. 당신의 선의조차도. 다만 그 선의가 어떻게 선한 결과로 이어질지 부단히 고민해야 한다. 아아 이 한마디로 끝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겐 필승법이 있어."

  1. 보통 1921년 시행된 보렐의 연구를 그 시작으로 보지만 수학자 존 폰 노이만과 경제학자 오스카 모건슈테른이 1944년 쓴〈게임과 경제행동 이론〉을 제대로 된 최초의 이론서로 본다. 이 책은 수학적 이론은 물론 경제학·정치학·군사과학·작전연구·사업·법·운동·생물학 및 기타 다른 분야에 응용되어 이 분야의 전세계적인 급속한 발전을 촉진했다. 게임 이론은 전략적 사고에 대한 평범한 대화를 폭넓고 세련되게 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중에서 [본문으로]
  2. 이 문제는 이화여대에서 기출한 2008학년도 수리논술 기출문제와 맥락이 같다. [본문으로]
  3. 조은, 이정옥, 조주현 지음, <근대가족의 변모와 여성문제>, 서울대학교출판부 [본문으로]
  4. 한겨레 기사 5월 22일자 기사. http://i-soccer.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588520.html [본문으로]
Posted by 칸나일파

어니스트 볼크먼의 <전쟁과 과학, 그 야합의 역사>[각주:1]는 지난 수천 년의 인류 역사가 결정적 무기를 향한 인간의 끝없는 경쟁과 욕망의 역사였으며 거기서 전쟁과 과학이 어떤 상호관계를 맺었는지를 서술한 책이다. 이 책의 목차를 보고 바로 ‘시드 마이어의 문명(Sid Meier's Civilization)’을 떠올렸다. 이 글에서는 비디오게임 ‘문명’을 통해 전쟁과 과학, 그 야합의 역사를 조명하고자 한다. 게임에 관한 구체적인 정보는 2005년에 나온 ‘문명 4’를 기준으로 삼았다.


1991년 출시되어 여러 편의 속편을 낳은 ‘문명’은 턴제 전략 시뮬레이션계에 큰 획을 그은 게임이다. 플레이어는 기원전 4000년부터 중세와 근현대를 거쳐 가까운 미래까지 한 문명의 지도자가 되어 문명의 흥망성쇠를 결정한다. ‘문명’에는 정치체제와 종교, 문화, 도시계획, 외교 등 고려해야 할 다양한 요소가 있지만 핵심적인 것은 군사유닛의 운용과 테크트리, 즉 전쟁과 과학이다. 중요한 테크를 빨리 탈수록 다른 문명보다 이른 시기에 더 강력한 군사유닛을 뽑을 수 있기에 과학기술의 경쟁은 곧 군비경쟁이다.


1991년작 시드 마이어의 문명


역사상 최초의 군비경쟁은 금속을 무기 제조에 유용한 소재로 만들고자 하는 경쟁이었다. 청동기술을 연구하면 만들 수 있는 창병(공격력 4)과 도끼병(공격력 5)은 기본 유닛인 전사(공격력 2)의 두 배 이상 되는 공격력으로 보병들의 백병전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하지만 이러한 무기도 말이 끄는 전차 앞에서는 맥을 못 추었다. 특히 이집트 문명의 고유 유닛인 전투전차(공격력 5, 이동력 2)는 기존 유닛들의 두 배나 되는 기동력을 바탕으로 고대의 전쟁터를 지배했다.


그러나 이집트를 비롯한 전차 부대를 거느린 문명들은 어느 시대의 어느 곳에서라도 누군가는 반드시 좀 더 우월한 신무기를 개발하게 되어 있다는 역사의 진실을 간과하는 자만에 빠졌다. 그 신무기는 철이라 불리는 금속이었다. 철제기술을 연구한 다른 문명들이 검사(공격력 6)를 이끌고 쳐들어오기 시작했을 때 전차를 앞세운 문명들은 자신들의 결정적 무기가 더 이상 결정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전차 - 전략자원인 말을 확보하고 바퀴를 연구하면 생산 가능한 최초의 기병유닛


어떻게 전차가 개발되었으며, 어떻게 전차가 고대의 전쟁터를 지배했으며, 그리고 훗날 보다 우월한 과학기술에 의해 그 전차가 패배하게 되었는지 그 전 과정은 과학이 어떤 방식으로 전쟁에 영향을 미치는가를 전형적으로 드러내 보여준다. … 그 순환의 과정은 이런 식이다. ‘결정적인 무기’의 개발, 그 무기가 전쟁터의 절대 강자로 군림하는 시기, 맞수의 등장, 그리고 다시 더 크고 더 좋은 무기의 개발, 또 그에 맞서는 무기의 개발이 끝없이 반복되는 것이다.


철의 발견 이후에도 그러한 순환은 계속되었다. 무엇보다 공성유닛인 캐터펄트(턴당 8%씩 도시 방어력을 깎음, 최대 50%까지 스플래시 대미지)의 등장이 난공불락으로 보였던 두꺼운 성벽(도시 방어력 +50%) 안에 위치한 적을 손쉽게 공격할 수 있게 해주었다. 중세에는 장궁병(공격력 6, 도시방어 +25%)과 석궁병(공격력 6, 밀리유닛 상대 +50%)이 전쟁의 흐름을 바꾸어놓았고, 철갑으로 중무장한 기사(공격력 10, 이동력 2)가 전쟁터의 맹주로 위용을 떨쳤다.


새로운 기술의 발견은 이전에는 생각지도 못한 새로운 유형의 경이로운 무기를 탄생시켰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화약의 개발로 공성전뿐만 아니라 야전에서도 강력한 힘을 보여준 공성유닛 대포(공격력 12)와 소총병(공격력 14, 기병유닛 상대 +25%)이 중세 기사를 전쟁터에서 완전히 내쫓았다. 현대에는 기갑유닛인 탱크(공격력 28)와 현대전차(공격력 40)가 최강의 지상병기로 군림했고, 공중유닛인 전투기와 폭격기 그리고 헬리콥터가 등장해 전장의 개념을 한 차원 확장시켰다.


문명 테크트리의 일부분 - 이를테면 화약을 연구하면 머스킷총병을, 강선을 연구하면 소총병을 만들 수 있다.


이처럼 ‘위대한’ 정복자의 뒤에는 항상 제국의 강력한 군사력을 뒷받침하는 뛰어난 과학기술이 있었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왕의 가장 큰 업적도 그의 이름을 따서 만든 이집트의 도시 알렉산드리아에 무세이온이라는 왕실과학연구기관을 건립한 것이었다. 그는 과학을 제도화했으며 국가가 운영하는 연구소나 조병창, 조선소에 과학자들을 끌어들여 전쟁병기를 개발하도록 했다. 덕분에 무세이온은 1800년 후에야 찾아올 르네상스 때까지 세계 과학의 중심지로 남을 수 있었다.


군사기술의 혁신이라는 동기는 고금을 막론하고 과학의 발전에 주요한 추진력으로 작용했다. 설사 과학자들이 우주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자연의 신비를 밝히고자 하는 순수한 동기를 가지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재정을 지원하는 국가의 심산은 그렇지 않았다. 오늘날 미국 전체 연구개발 예산의 20%가 국방 연구개발 예산이고, 정부 연구개발 예산에 한정할 경우 그 비율은 50%를 초과한다. 더욱이 모든 과학자가 그런 순수한 마음으로 연구에 임한 것도 아니었다.


많은 과학자들이 열렬한 애국자로서 순수과학을 버리고 자신의 모든 역량을 군사기술의 발전에 바쳤고, 국가의 위기 상황에서는 과학의 실용성을 ‘불명예스럽고 저속한’ 것으로 여겼던 과학자들조차 예외가 아니었다. 로마의 침략으로부터 시라쿠사를 지키고자 했던 아르키메데스부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핵무기의 개발을 위해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미국의 과학자들까지 그러한 예는 수도 없이 많다. ‘문명’에서도 위대한 과학자와 기술자를 비롯하여 많은 위인들이 조국을 위해 자신의 한 몸을 기꺼이 희생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조국을 위해 제 한 몸을 기꺼이 바치는 위대한 기술자


우리가 역사로부터 배울 수 있는 또 하나의 진실은 과학의 비법은 아무리 단단히 감추어도 언젠가 외부로 퍼지는 것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문명’의 맨해튼 프로젝트를 통해서도 잘 드러난다. 한 플레이어가 맨해튼 프로젝트를 완성하면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플레이어가 핵무기를 생산할 수 있게 된다. 실제로 핵무기 개발은 통치자의 의지만 있다면 기술적 구현이 어렵지 않기 때문에 미국 이후로 여러 나라가 독자적으로 핵개발을 할 수 있었다. 이것이 현실에서 핵확산을 막기가 어려운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끝없는 군비경쟁과 전쟁과 과학의 쌍방간 야합의 역사는 과거에도 미래에도 필연적인 것일까? 현실에서든 게임에서든 지금 상황에서 상대 문명의 군사적 위협에 맞서기 위한 최소한의 군사력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러한 현재 상태가 언젠가 모종의 합의를 통해 다 같이 총을 내려놓을 수 있는 가능성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문명’에서도 군사적 정복과 지배가 게임에서 이기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그 밖에 문화적 승리와 외교적 승리, 그리고 가장 먼저 우주식민지 개척에 성공하면 성취되는 과학적 승리가 있다. 과학적 승리는 한 문명이 군사적 우위가 아니라 과학기술의 힘만으로 인류 역사에 위대한 족적을 남길 수 있음을 시사한다. 어쩌면 이것이 ‘문명’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가 아닐까.


  1. Ernest Volkman, Science Goes to War, 2002. (석기용 옮김, 전쟁과 과학, 그 야합의 역사, 2003) [본문으로]
Posted by 人鬪

모든 곡선은 직선이야

 

모든 곡선은 직선이야. 앞으로 나가기만 하면 돼.

 

버스 안에서 저 문장을 처음 봤을 때 버스는 한강을 건너고 있었다. 순간 머릿속에 전구가 반짝 켜졌다. 그 느낌을 잃지 않으려고 책을 덮고 강을 내다봤다. 대체로 맑지만 구름이 간간히 섞인 하늘처럼 조금 모자란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시작은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학을 소재로 새로운 글쓰기에 도전한 건 순전히 까지는 아니어도 어느 정도는 저 문장 때문이다. 구상은 있었지만 계획은 없었다. 이를테면 저 문장은 불을 지른 격이다.

모든 곡선은 직선이야.”뭐 그냥 문학적 수사 정도로만 여길 수도 있는 이 문장은 수학적으로 참일 수도 있다. 참일 수도 있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면 어떤 전제를 깔면 참이기도 하다는 말이다. 어렴풋이나마 그 의미를 아는 사람은 이 문장에서 잠시 상상을 해 볼수 있다. 비현실의 현실성에 대해. 작품을 보는 시선이 달라질 수 있다. 작가가 의도했든 안했든. 그래서 나는 혼자 버스 안에서 피식 웃었다. 그리고 글쓰기를 시작했다.


  

차원이 다르네

 



당신은 선 위를 움직이는 점이다. 수학적으로 길이만 있고 면적이나 부피 개념이 없는 1차원 세계 속에 살고 있다. 선 끝에 도달하면 또 다른 선으로 넘어갈 방법이 없다. 그러나 면적이 존재하는 2차원 속에 살고 있다면 간단히 점프해서 넘어가면 된다. 2차원 안에는 무수히 많은 1차원이 존재한다. 쉽게 말해 면 안에는 무수히 많은 선들이 존재한다. 따라서 2차원은 1차원의 단순합으로 표현될 수 없으며 그야말로 차원이 다른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세계다. 1차원 세계 속에서는 1차원 밖을 상상할 수 없다. 또 다른 1차원의 존재를 알 수도 없다. 존재를 모르니 당연히 이동할 수 없다. 1차원 세계에 속한 존재에게 선을 벗어난 세계는 모두 인식불가능한 외부다.




2차원과 3차원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3차원 안에는 무수히 많은 2차원이 존재한다. 입체 안에는 무수히 많은 면이 존재한다. 2차원 세계 속에서는 2차원 밖을 상상할 수 없다. 2차원 세계에 속한 존재에게 면을 벗어난 세계는 모두 인식불가능한 외부다.

그렇다면 3차원에서 3차원으로 이동하는 일도 가능할까? 지금까지 차원이 상승하는 과정으로부터 실제 우리가 경험한 적은 없지만 4차원 세계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4차원 세계 속에는 무수히 많은 3차원이 존재하고 3차원에서 또 다른 3차원으로 이동하는 일이 가능해진다. 높은 차원에 속한 존재는 낮은 차원의 세계를 인식할 수 있지만 그 반대는 불가능하다.

 

 

<3개의 식탁, 3개의 담배>

  

SF소설은 “science fiction”의 줄임말로 SF소설이라 하면 과학 지식에 기초해 쓰여진 소설이라는 일차적 의미를 갖는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이를 흔히 공상과학소설로 번역해서 그 느낌이 환타지소설이나 무협소설처럼 뭔가 뻥을 친다는 식으로 의미가 격하되는 기분을 느끼게 된다.[각주:1] 과학과 공상의 경계는 늘 모호하지만 그 장르가 갖는 영역의 애매함과 무관하게 SF 장르는 분명히 존재한다.

나만해도 매니아까지는 아니어도 SF영화(소설 말고)를 제법 많이 챙겨보는 편인데 이야기가 그럴 듯하지 않으면 신경이 거슬리는 편이다. 그럴듯하게 보이려면 수학/과학적 사실이 적당히 동원되어야 한다. 일단 현실과 다른 몇 가지 전제를 깔아주고(여기부터 시비를 거는 사람은 대체로 SF라는 장르하고 친해질 수 없다.) 그 안에서 내적 논리성에 충실하다면 충분히 리얼리티를 획득할 수 있다. 해리포터 시리즈를 생각해보라. 킹스크로스역 93/4 정류장이라는 조건을 받아들이면 호그와트에 사는 해리포터 친구들을 만날 수 있다물론 현실에서는 배우의 얼굴이 빠르게 변해 강력한 분장이 필요하겠지만 말이다.

 

3개의 식탁, 3개의 담배SF소설에 가깝다. 시공간은 미래의 지구, 정확한 시점은 알 수 없다. 여기서 조건 없이 받아들여야할 전제라면 담배로 폭약을 만들어 원하는 부분만 우주로 날려버릴 수 있다는 정도일 뿐 차가 고속도로를 200km정도로 질주하는 것으로 보아 현재 지구와 설정이 아주 많이 다르지도 않다.

하나 더. 여기에서는 사람마다 남은 수명을 시(hour)단위로 표시한 시계를 차고 있고 그 시계에 찍힌 숫자가 사람 이름이 된다. 시간이 지날 때마다 이름이 바뀐다. 사람은 숫자로 호명되며 존재는 정체성을 상실한다. 삶은 언제나 소멸을 향해 달려가는 여정에 불과하다. 여기에서는 죽음이 삶을 지배한다.[각주:2]

등장인물은 킬러와 소녀. 킬러 2021394199가 소녀를 처음 만난 순간에 소녀 이름은 100이다. 1시간이 지날 때마다 삶이 1%씩 닳아 없어지는 이 소녀는 죽음에 대한 공포에 지배당하고 있다. 반면 소녀와 대비되는 인물인 킬러는 감정을 억누른 채 표정 없이 살아간다. 남아 있는 시간이 다를 뿐 죽는 건 어차피 모두 똑같다고 말한다.

킬러에게 삶은 작업(청부살인)과 또 다른 작업을 잇는 단순한 과정의 반복이다. 순차적으로 놓인 점(살인)을 연결하는 1차원적 삶이다. 요컨대 그의 삶은 선형이다. 그는 길을 선택할 필요가 없다. 내비게이션을 켜서 다음 목표물의 주소를 입력할 뿐이다. 언제나 목표물에 이르는 최단거리만을 고려하므로 주어진 길 밖의 삶을 인식불가능하다. 따라서 그에게 모든 곡선은 직선이다. 왜냐하면 앞으로 나가기만 하면 돼니까.

하지만 킬러는 짐짓 쿨한 척하는 것일 뿐이다. 존재의 바닥에서 킬러는 언제나 극단적인 공포와 싸우고 있다. 킬러는 그 공포를 이겨내기 위해 스스로 삶의 의미를 제거해버리는 전략을 취했다. 그에게 삶은 단순한 것이어야했다.

 

죽음의 공포란 무섭죠. 압니다. 저도 그런 공포를 많이 겪었습니다. 우주증후군이라는 건데, 들어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시작은 이렇습니다. 제가 갑자기 저를 빠져나와요. 일종의 유체이탈 같은 거죠. 빠져나와서는 지구를 벗어나고 은하계를 벗어나고 또 먼 우주를 벗어나서 어디론가 아주 멀고 크고 가늠할 수 없는 곳으로 사라집니다. 먼지보다도 작고 작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 존재가 되는 거죠.

3개의 식탁, 3개의 담배

 

소녀의 삶도 마찬가지다. 너무 이른 나이에 생을 마감해야만 한다는 공포와 분노는 죽음이라는 종착지를 향해 가는 단순한 경로 외에 무엇도 상상하지 못하게 만든다. 킬러와 소녀. 두 개의 1차원 세계가 만났을 때 서로 넘나들 수 있는 방법은 당장 없다. 질적으로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야만 서로의 세계가 연결된다. 관계성을 회복해야 삶은 다른 차원으로 비약할 수 있다.


 

직선=최단거리?


직선이란 무엇인가?’라고 물으면 당신은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유클리드 <원론>에 따르면 직선은 점들이 한결같이 고르게 놓인 것이다.’그러나 한결같이 고르다는 말도 애매하긴 매한가지여서 직관적으로는 차라리 직선이란 말이 이해하기 쉽다. 직선이란 단어는 일상적으로 써왔지만 점들이 한결같이 고르게 놓여있다는 서술은 생소하다.

직선이 정의되면 선분은 직선의 부분으로 이해하면 된다. 직관적으로 선분을 이해하는 방법 중에 하나가 두 점을 잇는 최단거리라는 개념이다. 너무 쉬운 이야기다. 두 점을 연결하는 최단거리는 선분(직선의 일부)이다. 물론 반대로 생각할 수도 있다. 두 점을 연결하는 최단거리가 선분이고 그 연장이 직선이라고.

자 그럼 구면 위에서 두 점을 잇는 최단거리는 무엇인가? 쉽게 지구를 떠올려보자. 지구상의 두 점을 연결하는 최단거리는 무엇일까? 선분을 평면에서와 똑같이 이해한다면 선분은 구를 뚫고 지나갈 것이다. 구면 위에서는 최단거리를 이해할 새로운 개념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일반적인 곡면(surface)에서는 어떤가?






구를 평면으로 자르면 원이 생긴다. 이 원들 가운데 구의 중심을 지나는 평면으로 자른 원이 가장 큰데 이를 대원이라고 부른다. 이 대원의 일부가 측지선(geodesic)이고 측지선이 구면 위에서 두 점을 잇는 최단거리다. 대원을 따라 걸어라. 그러면 당신은 지면과 수직을 이루며 가장 균형 잡힌 자세로 걷게 될 것이다. 

구면에서는 대원=직선, 측지선=선분이라는 개념이 성립한다. 선분 3개로 이루어진 도형이 삼각형이라면 구면 위에서는 삼각형의 내각의 합도 180도를 넘게 된다. 대전제가 하나 바뀌면 대전제로부터 도출된 사실들이 줄줄이 다 바뀐다.

기존 설명방식이 잘못된 게 아니다. 이전 설명이 평면의 세계에서는 여전히 잘 들어맞는다. 부분적인 정의로서는 충분하다. 하지만 일반적인 정의로서는 부족하다. 수학에서는 이처럼 틀리고 맞고의 문제라기보다는 어떤 시스템을 전제하느냐에 따라 지식의 구성체계가 바뀐다. 말그대로 차원이 다른 문제인 것이다. 현대 수학에서는 영역에 따라 차원(dimension), 공간(space), 그룹(group), 장 또는 체(field) 등 다양한 개념을 사용하여 지식의 층위를 구분한다.


 

다시 <3개의 식탁, 3개의 담배>

 

다시 킬러에게 모든 곡선은 직선이다. 왜냐하면 킬러는 언제나 최단거리만을 따라가기 때문이다. 목표물과 목표물을 잇는 최단거리. 점과 점이 선으로 연결된 1차원적 선형의 세계. 이 세계를 벗어나는 길은 다른 세계와 접속되는 길 뿐이다. 다른 세계와 만나려면 일단 자신에게 주어진 길, 최단거리를 벗어나야 한다. 킬러와 소녀가 아주 잠시나마 각자에게 주어진 궤적을 벗어났던 순간이 있다.

 

202139419697은 블랙홀 체험관 뒤쪽의 공원으로 갔다. 두 사람 모두 차를 탈 기분이 아니었고, 말을 할 기분도 아니었다. 온몸의 힘이 다 빠져버린 것 같기도 했고, 어디선가 힘을 얻은 것 같기도 했다. 100이 된 것 같기도 했고, 0이 된 것 같기도 했다. 두 사람은 공원의 작은 길을 계속 걸었다. 20213941962021394195가 될 때까지, 9796이 될 때까지, 계속 걸었다.

3개의 식탁, 3개의 담배

 

물론 그 경험은 너무 미비하고 짧았다. 그 둘은 서로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고 질적으로 다른 차원을 만들어내지는 못했다. 그러나 자기경로를 벗어나는 순간 일탈은 시작되었다. 이제 둘은 어디로 향할 것인가? 96시간 밖에 주어지지 않은 이에게 어떤 선택이 주어질 수 있을까? 소녀는 다음 목표물을 우주로 날려버릴 때 자신도 함께 날려달라고 부탁한다. 삶의 종착점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 소녀는 가장 근본적인 일탈을 감행한다.

 

구십육 시간이 남은 걸 아는 사람에게 죽는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요.”

그럼 뭐가 중요한데?”

질문이요.”

어떤 질문?”

어떤 질문이든 상관없어요. 답은 이미 다 알고 있으니까 저한테 필요한 건 질문이에요. 구십육 시간이 저에겐 답이에요. 질문을 알고 싶어요.”

3개의 식탁, 3개의 담배

 

목표물 토드와 함께 소녀를 우주로 날려 보내려던 킬러는 처음으로 격투 중에 부상을 입는다. 그리고 의도치 않게 자신까지 우주로 발사되는 순간 소설은 끝이 난다. 킬러는 자신이 가게 될 우주를 생각했다. 께 우주로 날아가는 건 어떤 기분일까? 소녀에게는 구원과도 같은 순간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그래서인지 이 결말이 슬프지만은 않았다.

그렇다면 킬러에게는? 킬러는 자신의 룰을 아주 조금 어긴 것치고는 너무 큰 대가를 치룬 셈이다. 완전했던 삶은 파괴되었다. 그런데 결말은 역설적으로 라이프컨트롤센터가 정해준 운명을 벗어나는 최초의 순간이기도 하다. 그 우주에서 킬러와 소녀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결말에서 죽음이 아니라 다른 세계로의 이행을 상상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설령 그것이 아주 고독하고 외로운 소멸을 의미할지라도 말이다.

  

각자가 선택한 세계 속에는 고유한 시간과 거리 개념이 존재한다. 다른 세계와 충돌하지 않는 세계는 그 자체로 완고하고 자기완결적이다. 그 바깥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의미를 찾기 시작하는 순간 외부가 형성된다. 외부와 대면하게 되었을 때 자기세계는 방어본능과 소통본능이 동시에 작동한다. 질적으로 다른 세계로 넘어가려는 이에게 외부는 가장 고통스럽지만 매혹적인 장소다. 관계성의 변화는 가장 혹독한 댓가를 요구할 수도 있다. 결론은 알 수 없다. 그러나 간절한 이에게 더 많은 길이 열릴 것이다. 


  1. 이와 관련해서는 영화평론으로 유명한 블로거 듀나의 글 “ http://www.djuna.kr/movies/etc_2000_08_25.html” 을 참고. [본문으로]
  2. 메갈로시티의 라이프컨트롤센터가 수명을 결정할 뿐, 구체적인 배경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소설 속 설정은 마츠모토 레이지(松本零士)의 ‘은하철도 999’시리즈를 연상시킨다. 부유층이 사는 첨단도시 메갈로폴리스에서는 죽음을 두려워한 인간들이 거액을 들여 육체를 기계화시킨다. 죽음을 극복한 대신 감정도 사라지게 되는데 이는 킬러가 삶을 대하는 태도와 맞닿아 있다. [본문으로]
Posted by 칸나일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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