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 전쯤 초등학교에서 베이직(Basic)이란 컴퓨터 언어를 가르치는 게 반짝 유행했었다. 나도 잠깐 그 유행에 합류해 난생 처음 컴퓨터를 만져보았다. 막연히 정보통신 시대가 온다, 곧 컴퓨터가 세상을 지배한다 어쩐다 했으나 대부분 그걸 배워서 어디다 써먹어야 할지 모르던 때다. 게다가 집에는 컴퓨터도 없었다. 당시에는 상당한 고가였던 탓에 컴퓨터를 가진 애들이 별로 없었다. 그나마도 대부분 값비싼 골동품처럼 모셔져 있었다. 언제 올지 모르는 미래는 대다수 사람에게 실질적인 미래가 아니다. 그래서인지 그 어떤 긴장감도 불러일으키지 않는 방과 후 수업이 좋았다. 지적인 느낌을 물씬 풍기는 예쁜 선생님을 보는 것도 좋았고 부팅될 때나 5.25인치 디스켓을 읽을 때마다 나는 끼르륵 끼르륵 소리도 듣기 좋았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스무 살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내 컴퓨터를 가질 수 있었다. 전화선으로 pc통신을 하던 시절이었고 인터넷이 상용화되니 마니 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니 70~80년 전에 컴퓨터 같은 것을 고안한 사람을 천재라고 부르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것이 말 그대로 computer, 즉 단지 계산을 빨리 해주는 정도의 기계라 해도 말이다. 앨런 튜링은 컴퓨터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컴퓨터의 아버지도 아니고 할아버지쯤으로 불릴만한 인물이다.[각주:1] 그런데 영국 비밀정보기관 밑에서 일했던 전력이 오랜 동안 베일에 가려져 있던 탓에 할아버지 대접을 받지 못했다. 게다가 동성애를 불법으로 간주했던 어두운 시대 상황 때문에 전반적으로 저평가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순수학문 성향이 강한 수학의 관점에서 기계 개발에 몰두했던 튜링에게 높은 점수를 주기 애매한 부분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그는 엄청 똑똑했다.

 

<이미테이션 게임>은 단순한 천재 서사인가?


<굿 윌 헌팅>, <박사가 사랑한 수식>, <뷰티풀 마인드>에 이어 <이미테이션 게임>까지 몇 안 되는 작품이지만 수학자 영화는 나름대로 경향성을 갖고 있다. 괴팍하고 영리한 수학자가 있다. 그 수학자는 남자다. 집중력은 뛰어나지만 사회성은 극도로 떨어져 자의반 타의반 혼자 지내는 시간이 대부분이다. 그들은 왕따거나 은둔자다. 세상과의 불화가 심할수록 주인공의 천재성은 더욱 빛이 나고 극적인 반전이 주는 카타르시스도 커진다. 그를 초라하게 만드는 것도 수학이지만 끝내 그를 위대하게 만드는 것도 수학이다.  

<이미테이션 게임>도 상당 부분 전형적인 천재 서사를 따라간다. 튜링은 학창시절 내내 왕따였다. 어머니조차 튜링을 별난 사람(odd duck)이라고 말한다. 사회생활 역시 마찬가지로 동료들과 관계는 계속 겉돌기만 한다. 하지만 멘토가 등장하고 동료들이 튜링의 천재성을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국면이 바뀌고 튜링은 엄청난 성취를 이뤄낸다. 전 영화들과 차이라면 자살로 마무리된다는 정도인데[각주:2] 이 비극적인 결말조차 튜링의 천재성을 더욱 도드라지게 만든다.

셜록에서 튜링으로 이어지는 필모그래피 덕에 컴버배치에게서는 의심할 수 없는 어떤 천재성마저 느껴질 정도다. 바닥에서 무언가를 골똘히 조사하고 있는 컴버배치가 등장하는 순간 사람들은 셜록 비슷한 천재의 등장을 직감한다. 다만 대화를 나눌 때 상대를 정면으로 응시하지 못하는 이 천재에게 무엇이 부족한지도 동시에 알게되겠지만 말이다.

결핵으로 사망한 튜링의 고등학교 친구이자 첫사랑 크리스토퍼와 관계 역시 마찬가지다. 크리스토퍼는 튜링의 유일한 숨구멍이다. 반에서 1, 2등 하는 애들끼리 수학 문제를 풀며 사랑을 나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의 귀족적 동성애를 떠올리게 한다. 튜링이 게이였다는 사실도 희귀성에 희귀성을 더하는 기능을 한다. 섹스 없이 수학이란 언어로 소통하는 멘토 조안과 관계 역시 같은 맥락을 강화한다.


때로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아무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을 해내거든.


크리스토퍼가 튜링에게 전했고, 튜링이 다시 조안에게 전한 이 말은 세상으로부터 이해받지 못하는 천재들의 자기위로다. 전반적인 설정이 천재 서사를 강화한다. 천재 서사에서 관객이 보이는 반응의 최대치는 다른 삶에 대한 연민이다. 관객은 영화 속 주인공이 나와 다르지만 틀린 것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는데 만족한다. 그런데 어찌 보면 신기한 일이다.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암호해독을 다룬 영화인 데다 주인공이 게이라는 점까지 고려하면 첩보영화, 반전영화, 퀴어영화 등 복합적 요소가 결합된 텍스트이고 사회성이 강한 영화인데 한결같이 천재 서사로만 읽어내는 분위기가 말이다.


전쟁이란 시스템 속에서 갈등하는 기능적 지식인


<이미테이션 게임>을 읽어내는 또 다른 중요한 축은 강력하게 설정된 진영논리 속에서 허우적대는 개인이다선악구도는 비교적 선명하게 설정되어 있다. 2차 세계대전에 대한 관점이 대체로 그렇듯 나치라는 절대악의 설정은 가치판단을 쉽게 만든다. 하지만 선악구도가 분명하게 설정된 경우조차 전쟁에서 승리가 기쁘게 느껴지는 경우는 별로 없다. 전쟁과 같은 거대한 시스템 속에서는 무엇이든 왜곡된다. 가치중립적이라고 믿는 지식을 통해 지식인은 전쟁의 일부로 기능한다. 이런 시선으로 바라보면 천재가 아닌 전혀 다른 서사가 드러난다. 거대한 시스템 속에서 갈등하는 기능적 지식인은 지금 우리 주변에도 아주 흔하다.  


자네 대체 왜 정부 쪽 일을 하려 하는가?

오 하고 싶지 않는데요.

자네 그 망할 평화주의자라도 되나?

저는 폭력에 대해서는 불가지론자입니다. 

자네도 알고 있겠지. 런던에서 100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히틀러라는 망할 놈이 유럽 전체를 삼키려 하고 있다는 것을?

정치는 제 전공이 아닌데요. 


튜링에게 중요한 건 독일이 만든 '에니그마'라는 암호생성 기계와 벌이는 게임에서 승리하는 것이다. 모두가 퍼즐풀이에 열중하고 있을 때 튜링은 에니그마를 능가할 기계를 설계하고, 직접 제작하고, 오류를 수정하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그 기계에 '크리스토퍼'라는 이름을 붙인다. 

이 상황을 이해못하는 동료나 군 입장에서 튜링은 불편하고 짜증스런 존재다. 소련의 스파이로 의심받기도 한다. 하지만 규칙을 배워가며 응용하고 뒤틀기도 한다. 정치적 거래를 하기도 하고 내부규율을 어기기도 한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튜링은 전쟁의 일부로 기능하게 된다. 암호해독에 성공한 후에도 전쟁을 단축시키기 위한 전략짜기에 고심하고 전반적인 상황을 호전시키기 위해 어쩔 수 없는 희생을 감내하기도 한다. 그는 점점 더 자주 갈등한다. 


천재 서사만으로 영화를 보면 이 모든 상황은 형해화되고 개인은 탈역사화 된다. 외골수 천재가 이룩해낸 성취라는 서사는 전쟁이라는 거대한 흐름의 향방이 몇몇 천재 사이에 벌어지는 경쟁의 결과에 따라 달라지며 역사도 이와 같은 식으로 흘러간다는 영웅주의를 강화한다. 그러나 전쟁은 몇몇 영웅들에 의해 좌지우지 되었다기 보다 오히려 이해불가능한 다양한 상황과 갈팡질팡 고뇌하는 수 많은 개인들을 만들어냈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전쟁을 빨리 끝내고 싶지 않느냐, 너는 어느 편이냐, 영국을 위하지 않느냐는 등 튜링이 공격을 받는 상황은 충분히 예상 가능하고 또 그래서 누구라도 그 상황에서 처할 수밖에 없는 근본적 물음들을 던지게 한다. 


앨런 튜링은 어떤 이데올로기도 받아들인 적 없다는 식으로 자신을 이해한다. 하지만 폭력에 대해 그가 보여주는 성찰은 단순하지만 날카롭다. 


사람들이 왜 폭력을 좋아하는지 알아요?

그건 바로 기분이 좋아지기 때문이죠. 

하지만 그 쾌감을 제거하고 나면 폭력의 결과는 공허하죠. 


단순히 천재가 하는 말이 아니다. 이것은 전쟁 한가운데 놓인 인간의 말이다. 동시에 튜링은 가상 세계와 현실 세계, 인간다운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영화 속 현실과 실제 현실의 경계를 뒤흔든다. 

  

튜링이란 존재 자체가 복합적 텍스트


영화 제목이기도 한 <이미테이션 게임>은 앨런 튜링이 인공지능에 관한 이론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도입한 일종의 테스트다. 그래서 튜링 테스트라고도 부른다. 요약하자면 셋이 하는 게임이다. 한 명은 질문을 던진다. 이에 답하는 응답자 중 하나는 인간이고 하나는 기계다. 튜링은“진정한 인공지능 컴퓨터는 사람이 5분간 질문을 할 수 있고, 이럴 경우 질문하는 사람이 30% 이상 확률로 컴퓨터를 인간으로 착각하는 수준”이라고 예시했다. 이 단순한 게임을 통해 튜링은 지능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수학적 혹은 기계적인 답을 내려고 시도한다. 최소한 인간에게 인간처럼 보인다면 그것은 인간에 준하는 지능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물론 이 테스트를 제대로 통과하는 기계를 만들기는 여전히 쉽지 않은 일이다. 게다가 제법 많은 질문에 답을 하는 기계조차 인간이 엄청난 양의 데이터를 입력해야 하니 이것이 지능인가 아닌가 논란이 될 수밖에 없다.[각주:3] 하지만 당신이 <공각기동대>나 <블레이드 러너>같은 영화를 보며 철학적으로 심각해지는 상황을 생각해보라. 이 사람은 이미 한참 전에 그런 고민의 시초를 던진 것이다. 게다가 뇌과학의 발달은 철학적으로 제기되던 숱한 문제들, 물질을 초월한 개념으로 인식되는 많은 것들이 실은 물질의 화학작용에 의한 것임을 밝혀냈다. 만약 이 화학작용이 인간의 의식을 결정하는 것이라면 대체 인간다운 것은 무엇인가?

지적호기심, 수학적 합리성이 튜링을 규정한다. 그는 연인들의 밀당이나 썸을 이해하지 못한다. 튜링의 언어는 컴퓨터 프로그래밍 언어를 닮아 있고 합리적 의사소통과정은 순서도(플로우 차트) 전개와 비슷하다. 감정표현조차 논리로 섭렵하여 사회화하는 캐릭터는 우리 주변에도 제법 있다. 튜링이 많은 경우 사교에 서툰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새로운 멤버를 뽑는 시험장에 유일한 여성인 조안이 나타났을 때, 잘못왔다며 제지하는 사람보다 그녀를 동일하게, 합리적인 한 명의 사람으로 받아들이는 튜링이 훨씬 인간적이다. 

이미테이션에는 모조, 모방이란 뜻이 있다. 어쩌면 튜링에게는 그가 처한 현실이 더 모방에 가깝게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어디에도 진실을 말할 수 없는 수 많은 기밀 속에서 살았던 튜링에게는 차라리 '크리스토퍼'가 진정한 본질에 가까웠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일까? 전쟁 이후 튜링의 삶은 허깨비를 쫓듯 공허했다. 튜링은 우울증에 시달렸고 더욱 진화된 ‘크리스토퍼’를 만드는 일만이 그를 살아있게 했다. 튜링은 동성애로 인해 화학적 거세형을 받고 약물 복용 후유증에 시달렸다. 그리고 우울증과 겹쳐지며 끝내 자살에 이르게 된다.

사람들은 인간 혹은 인간성에 대해 말할 때 나름대로 정해진 답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삶 속에서 발현되는 양상은 제각각이다. 동성애와 기계에 대한 사랑이라는 조합은 다소 생뚱맞게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사이버 가수의 등장, 게임 캐릭터에 대한 환타지, 각종 돌(doll)을 이용한 자위행위 등. 비현실의 현실 속에서 더 자주 위로를 얻는 우리의 삶은 튜링의 삶과 얼마나 다른가? 그래서인지 자주 마음이 시려 왔고 나는 천재가 보이기 보다는 우리 삶 속의 수 많은 튜링들이 보였다.  



  1. 무엇을 최초의 컴퓨터로 보느냐는 중요할 수도,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는 질문이다. 이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의견이 있다.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시도들이 있었기 때문에. 확실한 것은 앨런 튜링이 이론상으로 중요한 기여를 했다는 점이다. [본문으로]
  2. 앨런 튜링이 독이 든 사과를 먹고 자살했다는 일화는 너무 유명해서 스포일러 축에도 못 낀다. 스티브 잡스는 애플 로고와 앨런 튜링 사이에 연관성이 없다고 해명했지만 사람들은 계속 그렇게 믿고 싶어 하는 눈치다. [본문으로]
  3. '한 입 베어 문' 애플의 사과로고는 앨런 튜링을 기린 것일까? <2014년 6월 10일자 한국경제> 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14061022407 [본문으로]
Posted by 칸나일파

객관보다 먼저 존재하는 의지

 

<매드 사이언스 북>은 실험이 과학적 방법론으로서 확고한 지위를 획득한 이후에 벌어진 온갖 실험에 대한 이야기다. 과학지식이란 방대한 지도에서 미지의 영역을 몰아내겠다는 집념과 열정이 가득한 책이다. 동시에 그에 뒤지지 않는 광기도 살벌하다. mad(미친)와 science(과학)이란 조합은 열정과 광기 사이 간극을 효과적으로 표현한다. 소재 자체도 흥미롭지만 살짝 살짝 곁들이는 과학전문기자의 농담도 유쾌하다. 물론 어떤 농담은 여전히 낯설지만. 과학전문기자가 진득하게 한 분야에 전념할 수 있는 현실은 부럽기만 하다.

<매드 사이언스 북>에는 오늘날 기준으로는 용납하기 힘든 실험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 병원균의 실체를 확인하게 위해 자신을 대상으로 임상실험을 하는가 하면, 단두대에서 잘린 사람 머리를 몰래 훔쳐와 전기를 흘려보내기도 한다. 그 중에 영혼의 무게를 재려한 사람도 등장한다.

던컨 맥두걸은 실험을 통해 영혼의 무게가 21그램이라고 결론 내렸다. 뉴스 타임즈 1907년 3월 11일자 신문에는 “의사는 영혼에 무게가 있다고 믿는다.”는 기사가 실렸다. 물론 실험은 조잡하고 신빙성이 없었다. 고작 6명을 대상으로 사망 전후 무게를 측정해 낸 결론이었다. 표본 자체가 너무 작은데다 그 6명마저 결과는 제각각이었다. 오히려 관전 포인트는 실험의 결과라기보다는 동기에 있다. 그는 영혼에도 무게가 있다고 믿었다. 모든 실천 앞에는 의지가 먼저 존재한다. 객관은 가장 극단적인 주관 속에서 태어난다.

 

영혼의 무게는 21그램

 

서양철학에서 영혼이란 개념은 꽤나 오랜 전통을 갖고 있다. 피타고라스는 윤회설을 믿었다. 플라톤에게 영혼은 보편적 진리를 인식할 수 있는 능력과도 같다. 따라서 육체보다 우월한 영혼은 불멸의 존재다. 이런 사고방식은 자연스럽게 종교에 흡수되어 내세라는 개념으로 이어진다. 영혼은 죽은 후에도 살아 남는다. 영혼을 실체(무게)가 있는 무엇으로 이해하다보니 데카르트는 육체와 영혼을 연결시켜주는 송과선이란 기관이 있다는 주장으로까지 이어진다. 능력자들이 내지른 헛발질은 믿음의 산물이다.

영혼의 무게를 재는 실험은 별 다른 신뢰를 얻지 못했지만 동기만큼은 강렬한 인상을 남긴 것이 분명하다. 21그램이란 기업이 있는가 하면 <21그램>란 제목의 영화도 있다. 이 영화에 실험과 연관된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단지 모티브로 따 왔을 뿐이다. 복잡한 심경 속에 죽음을 앞 둔 한 사람의 독백 속에 21그램이 등장한다.

 

사람이 죽는 순간에 21그램이 줄어든다고 한다. 누구나 다...

21그램은 얼마 만큼일까? 얼마나 잃는 걸까? 언제 잃을 것일까?

21그램. 5센트 5개의 무게. 벌새 한 마리 무게. 초콜릿 하나.

21그램은 얼마나 나갈까?

 

어떤 사람을 분석한다고 치자. 수다스럽다, 다정하다, 관능적이다 등등. 정성적 분석이다. 이 분석을 이렇게 대체해보자. 하루 평균 2시간 동안 수다를 떨고 15명에게 카톡을 보내며 3명에게 페로몬을 뿌려댄다. 정량적 분석이다. 수학과 과학은 대체로 어떤 성질을 정량화시키는 과정에서 발전한다. 온도만 해도 그렇다. 따뜻하다, 미지근하다, 차갑다는 등의 표현은 주관적이다. 여기에 숫자를 부여하면 객관성이 확보된다. “너 나 얼마만큼 사랑해. 1부터 100까지 숫자로 말해봐.” 이것이 수학의 마인드다. 이미 실패가 예정되어 있더라도 어떻게든 삶을 객관화시키고 싶은 인간의 욕망. 21그램은 불가사의한 삶을 계량화하고 싶어 하는 인간의 덧없는 욕망을 상징한다.

 

담배연기 무게는 몇 그램?

 

나는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한 번도 피워본 적이 없다. 담배냄새를 미친 듯이 싫어한다. 어릴 적에는 담배를 피우는 아빠를 집 밖으로 쫓아내기 일쑤였고, 대학생 때는 학생회실에서 담배 피우는 회의를 처음으로 금지시킨 장본인이다. 그런가하면 베란다를 타고 올라오는 담배연기를 참지 못해 아래층 집집마다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우지 말아 달라.”는 쪽지를 붙여두기도 했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담배 피는 모습이 너무 멋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사람이 있었다. 그 모습은 아무 설명 없이도, 충분히 매력적이어서 삶이란 담배피우는 모습으로 형상화되는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게 했다.

<스모크>는 소설가 폴 오스터가 공동으로 대본을 써서 주목받았던 영화로 그의 소설 [오기 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모티브로 한 영화다. 제목처럼 담배 피는 장면, 특히 담배연기가 날아가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오기의 담배 가게는 사람들이 만나고 헤어지는 상징적인 장소다. 담배연기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 영화는 어쩐지 멋있게 담배 피는 사람을 연상시킨다.

영화 배경은 뉴욕 브룩클린이다. 여기에 주인공이 여럿 등장한다. 먼저 부인을 잃고 혼자 사는 소설가 폴. 한때는 잘 나갔지만 부인이 죽은 뒤로는 폐인 모드다. 줄담배만 펴댄다. 교통사고 직전 우연히 폴을 구해준 청년 라시드는 묘하게 폴 옆을 맴돌며 접근한다. 그런데 폴은 이 청년 덕에 조금씩 기운을 되찾고 다시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그리고 의문투성이 라시드는 어릴 적 생이별을 했던 아버지를 찾아가 결국 다시 가족을 이루게 된다.

한 편 담배 가게 주인 오기는 매일같이 같은 시각에 자기 가게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다. 그 사진을 인화해 사진첩에 모아 둔다. 이 담배 가게에 폴이 소개한 라시드가 점원으로 근무하면서 관계는 얽히고 설킨다. 오기는 쿠바산 시가담배를 밀수하려다 낭패를 보지만 이렇게 저렇게 만회해서 목돈을 만드는데 성공한다. 그런데 집나갔던 옛 애인 루비가 찾아온다. 루비는 둘 사이 딸이 있다며 마약에 찌든 딸을 보러 가야 한다고 하지만 오기는 돈 때문에 루비가 돌아왔다고 생각한다. 딸은 오기를 받아들이지 않지만 오기는 루비에게 어렵게 구한 목돈을 건네준다.

 

이 영화에 인상적인 장면이 두 군데 있다. 하나, 폴이 담배연기 무게를 어떻게 재는지 설명하는 장면. 영국에 담배를 들여 온 월터 롤리 경은 담배연기 무게를 잴 수 있는지 엘리자베스 여왕과 내기를 해서 이긴다. 흡연 전후에 담배 무게(재와 꽁초)를 측정해서 그 차이를 계산했다. 이 방법은 아주 간단하지만 실험이 가진 강력한 힘을 보여준다. 삶과 죽음 사이에 발생한 차이 21그램처럼. 삶 역시 이렇게라도 측정 가능한 것이라면 얼마나 간명하겠는가.

둘, 아내를 잃은 후 폐인처럼 지내던 폴은 담배 가게 오기랑 친해진다. 어느 날 폴은 오기의 희한한 사진집을 구경하게 된다. 매일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찍은 사진뿐인 사진집. 오기는 매일 자신의 담배 가게 건너편에서 가게 쪽을 바라보며 사진을 찍는다. 사진 중앙에는 담배 가게가 자리 잡고 있으며 길거리 풍경은 늘 비슷비슷하다. 폴은 왜 이런 걸 찍느냐며 이해 못할 표정을 짓다가 우연히 사진에 찍힌(지금은 죽고 없는) 자기 부인을 발견하고 오열한다. 오기의 쓸데없던 취미는 잠들어 있던 폴의 기억을 끄집어낸다. 무색무취했던 거리 풍경은 구체적인 시공간과 함께 되살아난다.

 

<스모크>처럼 흩어지는 삶이라 해도

 

<스모크>에는 삶과 죽음, 만남과 이별이 복잡하게 교차한다. 인생은 어디로 흩어질지 모르는 담배연기처럼 예측하기 어렵다. 한 사람의 우연한 행동이 또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고, 무겁게 가라앉은 것 같던 담배연기가 순식간에 흩어지듯 사람사이 만남도 그 의미를 헤아릴 길이 없다.

공리주의로 유명한 벤담은 쾌락계산법(Felicific calculus)으로 괘락의 총량을 계산할 수 있다고 했다. 검색창에 행복지수란 단어를 집어넣으면 삶을 계량화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를 접할 수 있다. 삶이 목적의식적으로 배치된 노력의 총합이라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리고 그런 이들에게 수학이란 도구는 얼마나 고마운 것이겠는가!

영혼의 무게를 재고, 담배연기의 무게를 측정하고,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사진을 찍는 행위는 무정형의 실체를 포착하고자 하는 노력이다. 더러는 성공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실패할 것이 분명한. 삶은 대체로 정량화되지 않는다. 영화에 유난히 담배 연기가 많이 나오는 이유가 있다. 그렇다면 이런 노력들은 언제나 무의미한가? 아니 그렇지 않다. 오기의 사진 속에서 사랑하는 이의 흔적을 발견해낸 폴처럼. 삶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가끔 의도치 않게 소소한 선물을 선사한다. 그러니 열심히 시도할 일이다. 다만 거기에 정답이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그 노력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면 된다. 우리가 수학에서 얻을 게 있다면 그것은 삶에 대한 답이 아니다. 답을 찾고자 하는 노력 자체가 삶을 아름답게 한다.

마지막에 나오는 영화 속 영화 [오기 렌의 크리스마스]를 해마다 한 번쯤 다시 보기로 한다. 꼭 직접 보라고 줄거리는 이야기 하지 않는다. 마음까지 추워지는 추운 겨울, 마침 연말연시나 삶과 사람에 대해 확신이 서지 않는 그런 때에. 당신도 누군가에게 좋은 선물 같은 존재였으리라. 그러니 모든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그래도 인생이다.

Posted by 칸나일파

 

위에서 아래로 떨어진다, 낙하한다, 추락한다.

 

일반적으로 사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떨어진다, 낙하한다, 추락한다. 이 동사들은 부정적인 상황에서 자주 쓰인다. 매력이 떨어진다, 지위가 추락한다 등등. 떨어지면 보통은 아프다. 언어보다 몸이 먼저 안다. 그리고 개념은 언어로 완성된다. 보통은 떨어진다는 말과 함께 위와 아래라는 방향성을 동시에 인지한다. 그런데 위에 있는데 떨어지지 않는 것들도 있다.

실험이나 관찰이라는 개념이 없던 시절에 인류는 자연현상이 신 자체거나 신의 행위라고 생각했다. 설명이 체계적으로 발달하면서 종교가 된다. 여기에 초보적인 인과관계와 관찰이 더해지면서 상상훈련을 하기 시작하고 논리를 덧댄다. 자연철학의 탄생이다.

인류가 처음 생각한 지구와 우주는 어떤 모습일까? 상상훈련을 해보자. 나는 처음으로 지구와 우주의 구조를 생각하는 호모 사피엔스다. 세상에 대한 인식은 내가 서 있는 여기를 중심으로 동심원 모양으로 퍼져나간다. 이동수단이 발달하면서 동심원은 점점 커질 것이다. 그러나 이동수단의 발달은 더디다. 지금 동심원의 크기는 크지 않다. 세상의 끝은 내 인식이 닿는 한계보다 조금 더 멀리 있는 정도다. 보통은 내가 가보지 못한 강이나 산 너머. 그곳에는 어떤 절대적인 두려움이 존재한다. 그 존재는 말에서 말로 전해져 올 뿐이다.

아직 지구가 둥글다는 것은 상상조차 힘들다. 그리고 머리 위로 해와 달이 뜨고 진다. 온갖 별들이 움직인다. 이들의 움직임을 이해하려면 꽤 많은 시간이 흘러야 한다. 그런데 왜 높은 곳에 있는 별은 떨어지지 않는 것일까?

 

별은 우리 머리 위에 있는데 왜 떨어지지 않는가?

 

그리스식 세계관은 실험보다는 상상훈련에 기초해 있고 이것을 고상하게 말해 자연철학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 토대에는 수학이란 고도의 논리학과 형이상학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스 자연철학은 밑도 끝도 없는 주장도 부지기수지만 근대 과학이 이룩한 수많은 업적 중에는 그리스 자연철학에 뿌리를 둔 것도 매우 많다. 그리스 철학은 사고의 원형을 모아 둔 잡다한 만물백화점이었다.

떨어진다는 단순한 현상 하나만 놓고 봐도 질문이 산더미다. 왜 어떤 것은 떨어지고 어떤 것은 떨어지지 않는 것일까? 사물을 떨어지게 만드는 원인은 무엇인가? 모든 사물은 똑같은 속도로 떨어지는가? 이 숱한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은 생각보다 험난하다. 천재들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무거운 물체가 가벼운 물체보다 빨리 떨어진다고 했다. 중력에 대한 학습이 없으면 이렇게 생각하기 쉽다. 확실히 돌은 깃털보다 빨리 떨어진다. 그런가하면 세상은 물, , , 공기 4원소로 구성되어 있는데 돌이 빨리 떨어지는 이유는 돌이 흙으로 구성되어 있어 본래 자기가 속한 곳으로 돌아가려는 속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역학이론은 갈릴레이에 이를 때까지 2천 년간 서양세계를 지배했다.

영화 <아고라>에 보면 그리스의 시대정신이 저물어가는 황혼녘에 한 시대의 몰락을 함께했던 수학자 히파티아가 등장한다. 영화는 히파티아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서 제자들과 토론을 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어째서 별은 떨어지지 않는가? 별은 달아나지도 떨어지지도 않으며 이상적인 형태의 경로를 따라 동서로 움직인다. 바로 원이야. 원으로 움직이는 한 별은 절대로 떨어지지 않아.”라고 말한다. 별들의 운동에 수학적인 질서가 숨어 있다고 믿었던 그리스인들은 원이 가장 이상적인 도형이기 때문에 별들이 원운동을 한다고 생각했다. 토론은 이어진다.

 

그런데 지구에서는 어떨까? 물체는 떨어지면서 원이 아닌 직선을 그린다. 대체 지구 내부 무슨 조화가 사람이든 사물이든 노예든 상관없이 전부 아래로 잡아당길까?”

무거워서겠죠. 아니 중량 때문에?”

근본 원인을 말해야지 궁금해본 적 없나? 여러분의 발바닥이 만물을 지탱하고 끌어당기는 우주의 중심을 향하고 있는 까닭? 중심이 없다면 우주는 모양도 실체도, 끝도 없는 혼돈일 거야. 그렇게 세상이 아수라장이라면 아니 태어남만 못해.”

 

현대인들은 물체가 떨어지는 현상이 중력(gravity)에 의한 잡아당김이란 걸 잘 안다. 떨어진다는 건 관찰자인 인간의 관점이고 객관적 사실은 지구가 물체를 지구 중심방향으로 잡아당기는 것이다. 뉴턴이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며 중력을 알아냈다는 일화는 사후적으로 지어낸 이야기이다.

어쨌거나 중력의 발견은 세상을 인식하는 새로운 눈을 달아준 격이었다.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이, 티코 브라헤, 케플러, 헬리, 뉴턴 등등에 이르기까지 이 익숙한 이름들이 등장하는 시기를 과학혁명이라 부른다. 과학혁명은 근대를 여는 핵심 키워드 중 하나다.

 

<낙하한다>

 

성석제 소설 <내 인생의 마지막 4.5>에는 별의 회전운동 원리를 설명하는 대목이 나온다. 돌을 세게 던져 초속 7.9km가 되면 돌은 땅에 떨어지지 않고 지구를 빙빙 돌게 된다. 조금 더 세게 던져서 11.2km가 되면 돌은 지구를 벗어나게 되고 16.7km를 넘으면 태양계를 벗어날 수 있다.

이 설명은 뉴턴의 사고실험과 일치한다. 뉴턴은 아주 높은 산에서 대포를 쏘는 상상을 했다. 너무 약하게 쏘면 포탄은 중력에 의해 다시 지구로 떨어질 것이다. 너무 강하게 쏘면 포탄은 지구 중력을 벗어나 우주로 날아갈 것이다. 정확히 그 중간 정도의 힘으로 쏘면 포탄은 지구 주위를 빙글빙글 돌게 될 것이다. 결국 떨어지는 것도 떨어지지 않는 것도 모두 중력 때문인 것이다.

 

황정은 소설 <낙하한다>는 이렇게 시작된다.

 

떨어지고 있다.

삼년은 지났을 것이다.

 

그리고 소설은 이렇게 끝난다.

 

조금도 빨라지지 않았다. 좀 전과 같은 속도로 떨어진다.

삼년 전과 같은 속도로 떨어진다.

농담이 아니다.

떨어지고 있다.

상승하고 있다.

 

구체적인 시공간은 나오지 않는다. 왜 떨어지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이야기랄 것도 별로 없다. 단지 떨어지면서 시작했고 여전히 떨어지면서 끝이 난다. 그런데 더 정확히는 떨어지는 게 아니라 부유하고 있는 것이다. 무중력 공간 속에서.

영화 <그래비티>는 무중력 상태가 불러오는 공포를 너무나 생생하게 시각적으로 재현했다. 그것은 떨어지는 것보다 훨씬 업그레이드 된 우주적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외롭고, 막막하며, 무엇보다 출구가 없다. 이 소설은 그런 소설이다. 외롭고, 막막하며, 출구가 없다. 소설은 시작도 끝도 없는 우주적 공포를 재현한다.

출구 없는 무중력 공간에서 떨어지는 것인지 상승하는 것인지조차 알 수 없을 때 우리는 차라리 무언가에 부딪치고 싶다는 상상을 하게 된다. 어떻게든 이 상황이 바뀌기를 바라며.

 

외롭고 두려운 것도 관성이 되었다.

관성적으로 외롭고 두렵다.

외롭고 두렵고 무엇보다도 지루하다.

떨어지고 떨어지고 떨어진다.

어디든 충돌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삼년째 떨어지고 있으니 슬슬 어딘가 충돌해도 좋을 것이다. 부서지더라도 충돌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출구 없는 우주를 부유하는 시대의 소설

 

소설은 의도와 무관하게 시대적 상황 속에 놓여 있다. 이 소설은 20년 전에만 나왔어도 아무런 공감대를 불러일으키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 20년 전이라면 이런 소설이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이 소설은 우주적 외로움을 공감할 수 있는 시대에만 나올 수 있다. 우주적 외로움과 공포가 뭔지, 왜 맥락 없이 주인공은 무중력 공간에 떨어져 있는 것인지 공감할 수 있을 때 나올 수 있는 소설이다. 나쁜 놈도 없다우리는 그저 재난에 처한 심정이 되어음 그냥 재난에 처한 심정이 된다뭘 어쩌자는 게 아니라<낙하한다>는 그런 소설이다입구도 출구도 없는 고통과 외로움에 대해 말하는 소설이다.

일정한 거처도 안정적인 수입도 뚜렷한 탈출구도 없는 수많은 이들의 고단한 삶이 떠올랐고 무엇보다 세월호가 떠올랐다. 오늘날 재난은 어느 날 사기를 당해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그런 종류의 재난이 아니다. 실수 따위와는 무관하게 공기처럼 존재한다. 그리하여 재난 자체가 일상이 되고, 재난이 관성이 되는. 눈보라 맞으며 광고판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어도, 어느 날 아파트 관리인이 비인간적 처우를 하소연하며 스스로 목숨을 던져도 집값 걱정을 하는, 이 세상이 재난이다. 재난은 이제 시스템 그 자체이다. 재난은 무중력 상태 우주처럼 도처에 압도적으로 펼쳐져 있다

내가 속한 좌표를 알 수 없고, 그리하여 앞으로 가는 것인지 뒤로 가는 것인지 심지어 떨어지는 것인지 상승하는 것인지도 알 수 없는 우주적 공포. 출구가 있다면, 방향이 있다면 누군가는 주장을 할 것이다. 저리로 가자고. 하지만 누구도 자신 있게 출구를 말하지 않는다. <낙하한다>는 방향감각을 상실한 시대의 소설이다.

낙하하는(상승하는) 내내 주인공 는 공상을 한다. 그러나 그 공상도 완결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단지 에피소드 몇 개에 불과하다. 그 에피소드 속에 방이 등장한다. 그 방에는 개수대가 있는데 개수구멍이 없다. 문도 없다. 시계도 없다. 한마디로 진공 상태다. 구체적인 시공간이 없다. 내부와 외부가 없다. 공상조차 시작도 끝도 없는 지옥이다. 그런데 주인공이 끊임없이 되뇌이는 문장이 하나 있다.

 

세 개의 점이 하나의 직선 위에 있지 않고 면을 이루는 평면은 하나 존재하고 유일하다.

 

이 문장은 고등학교 2학년이 공간도형을 배울 때 제일 처음에 등장하는 간단한 수학 명제다. 공간에 세 점을 찍어보라. 그 세 점을 지나는 평면은 유일하게 하나 존재한다. 세 점이 한 직선에 있을 때는 예외다. 카메라 삼각대나 향을 피우는 향로가 다리가 세 개인 이유다. 어떤 지형에서도 다리가 뜨지 않는다. 반면 다리가 네 개면 이야기가 다르다. 바닥이 고르지 않은 상태에서 세 다리를 고정하면 하나가 뜬다. 네 점을 지나는 평면은 없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책걸상을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수학 공식처럼 분명할수록 거짓말처럼 들리는 시대다. 위아래조차 분간할 수 없는 곳인데 하물며. 주인공은 이 문장이 애매하다고 말한다. ‘하나라는 단어가 두 번 들어간 것도 맘에 들지 않는다. 그런데 계속 되뇌인다. 계속 되뇌이다보면 외로운 것도 애매해질지 모른다고.

주인공 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장면은 지하철역이다. 지하철역에서 만난 아주머니가 출구를 물어보고 대답해주는 장면, 그게 전부다. 그런데 아주머니가 건넨 마지막 말은 이것이었다. 동시에 주인공이 기억하는 마지막 말이기도 하다.

 

친절하게 대답해줘서 고마워요.

 

친절, 대답, 고마움. 우주적 공포 속에서 기억해낸 세 단어. 진공상태에서는 음파도 반사되지 않는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그래서 대답이란 우리에게 방향감각을 일깨워주는 말. 현실에서 출구는 이렇게 간단한 것이지만, 그렇지만

Posted by 칸나일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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